우리가 처음 만난 국립문화의전당 화장실 같은 곳에서 경고란 공기와도 같은, 어디에나 있고 빠져나갈 수 없는 요소라 그곳에 서식하는 사람들의 일부가 되고, 따라서 우리를 그리로 끌어들이는 욕망의 본질이 되어버린다.
--- p.11
시 특유의 청아한 소리에 이르지 못하는 삶, 어색함과 흘려버린 기회로 이루어져 있지만 어쩌면 견딜 만했던 삶, 어느 정도 내가 선택했고 계속해서 선택해온 삶.
--- p.57
자아를 온전히 인식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작별이라고, 남은 평생 회복하고자 애쓰게 될 상실이라고.
--- p.60
나는 그가 술을 마신다는 사실과 그가 하는 일에 따르는 위험에 대해 생각했고, 잠깐은 그를 필사적으로 구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무엇으로부터 구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게 터무니없는 욕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구하려면 내가 원하지 않는 관계를 상상해야 했고, 게다가 미트코는 구원받고 싶다는 욕망을 표현한 적도 없었으니까.
--- p.70
진실만 말해. 그가 말했다. 마음에 있는 그대로 말하라고. 하지만 내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고, 나는 생각했다. 그 의미라는 것이 내게서 완전히 도망쳐버렸는데.
--- p.87
아버지는 내가 느꼈던 안전함을, 아버지와의 연결을, 그 최초의 연결에 대해 내가 품고 있던 확신을 거두었다. 그날까지 나는 그 연결이 다른 모든 연결과 마찬가지로 녹아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건 나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내게서 물러나면서 내가 무언가 덜 현실적인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 자신의 실체감이 줄어든 것 같았다. 나 자신의 실질성에 대한 확신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 내가 녹아내릴지 모르는 무언가가 된 듯했다.
--- p.121
나는 매독이 문학작품에서 아무리 끔찍하게 그려진들 쉽게 치료되는 병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내게 필요한 건 그저 항생제, 어쩌면 주사 한 대뿐이었다. 창피해하는 건 멍청한 일이라고 나 자신을 타일렀다. 매독도 다른 병과 같은 감염병일 뿐이었다. 하지만 접수대로 다가가면서는 이중 어떤 생각도 내 감정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그 감정은 강력하고도 뿌리깊은 수치심의 일부였다. 첫 만남부터 이런 뒤늦은 결과에 이르기까지 미트코와 나의 모든 사연도 그저 그 수치심을 한번 더 반복한 최근의 사건에 불과했고.
--- p.194
어쩌면 나는 그저 세상이 어떤 의미를 띠기를 바랐던 것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 바란 그 의미는 징벌이었다.
--- p.203
나는 말하자면 그 질병의 시학에, 그러니까 수치심의 후광 혹은 불쾌한 공기에 다시 붙들려 있었다. 더러워진 기분이었고 나 자신을 어딘가에 숨겨버리고 싶었다. 이 질병에 대해 알 만큼 알았지만 다른 사람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오염시킬지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강박적으로 손을 씻었고, 대부분 교사들이 손닿는 곳에 두고 쓰는 작은 손소독제를 집착적으로 사용했다. 할 수 있는 한 집에 머물렀으며, 나가야 할 때면 거리나 식료품점의 사람들과 부딪히거나 그들을 밀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며 어떤 접촉이든 피했다. 개인 공간에 대한 감각이 너무도 다른 이곳에서는 퍽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전에도 아팠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질병 이상의 무언가로 느껴졌다. 수치심에 대한 신체적 확인처럼.
--- p.209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것 혹은 그것들을 진정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우리는 여러 가지를 동시에 볼 수 없으며, 눈을 돌리기란 너무도 쉽다.
--- p.228
나는 아무것도 받지 않고 주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그 점이, 흥정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모욕적이었던 게 틀림없었다. 이제는 내가 그의 치욕을 좋아했던 것인지, 나 자신의 너그러움에서 누린 기쁨이 바로 그것이었는지 궁금해졌다. 아무 보답도 필요없다고 주장하면서 미트코한테 필요한 것을 주는 방식으로 그를 모욕하며 즐거워했던 걸까. R가 맞았다. 미트코가 무언가를 받아가는 일에도, 나 자신의 거짓 동기에도 끝이 없을 터였다. 우리 사이에 공동의 토대는 존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품위 있게 굴 방법을 절대 찾지 못할 것이다. 끝내야 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미트코가 주는 쾌락을 포기해야 했다. 뻔한 쾌락만이 아니라 친절을 베푸는 데서 오는 쾌락, 내가 친절이라고 이해했지만 이제는 다른 것일지도 몰라 두려운 무언가로부터 오는 쾌락까지도.
--- p.249
나는 메모를 남겼다. 내가 녀석에 대한 시를 쓰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시가 될 것이다. 진실한 동시에 거짓된, 진짜 인상을 대체하는, 내가 만들어낸 인상. 나는 늘 시를 짓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그것들을 보존하고 그 순간을 두 번 살아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왔다. 아니, 오히려 그 순간을 더 완전하게 살아내는 방법, 경험에 더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더 눈에 담고 싶어서 녀석을 돌아봤을 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시는 상실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 녀석으로 구성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녀석을 작아지게 만들 것이다. 나는 무언가를 시로 바꾸어놓으면서 내가 실제로는 그것을 외면하는 게 아닌지, 세상을 보존하는 대신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게 아닌지 궁금해졌다.
--- p.280
내 몸을 따라 그의 몸 전부가 느껴졌다. 비록 불완전하고 위태롭고 간헐적이라 해도 내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했던 그의 몸. 그의 목에 얼굴을 가져다대고 그를, 땀과 알코올에 절은 그의 시큼한 향을 들이마시자 내 두 손과 입으로 너무도 상세히 알고 있는 이 형체가 녹아 없어진다는 것이, 그냥 녹아 없어져버린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내게 그토록 소중한 이 몸이 죽는다니 견딜 수 없었다. 내가 그를 더욱 꽉 끌어안았음에도 우리 사이에 벌어진 공간은 좁혀지지 않았고, 나는 나 자신이 그 공간의 너머, 건강한 쪽에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 자신은 미트코와 함께 머물지도 않을 것이고 그가 마주한 죽음을 마주보지도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 p.292
지금의 나는 사랑은 그냥 누군가를 바라보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사랑은 그 사람들과 함께 바라보는 것, 그들이 마주보는 것을 함께 마주보는 것이다.
--- p.292
나는 신을 사랑해. 노 멘 네 메 오비차, 하지만 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신은 강한 자를 사랑하고 나는 강하지 않아. 그는 다시 울고 있었다. 긴장하면 튀곤 하던 그 이상하고 높은 음정으로. 그분은 강한 자를 사랑해. 그는 계속해서 그렇게 말했다. 구호를 외치듯 혹은 기도하듯 그 말을 되풀이했다. 신은 강한 자를 사랑해. 그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난 강하지 않아. 이스캄 마이카 시. 그때 그가 말했다. 엄마가 필요해. 그러더니 또다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내 손을 잡고 꼭 쥐었다. 형은 신을 사랑해? 신은 형을 사랑해. 그가 말했다. 형도 신을 사랑해야 해, 신은 형을 믿어. 형도 신을 믿어야 해.
--- p.294
형은 진짜 친구야. 그가 말했다. 이스틴스키, 형은 나를 여러 번 도와줬어. 나는 도움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그 거래들을 떠올리고서, 하지만 내가 한 일은 널 도와준 게 아닌데, 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를 차지하려 했을 뿐이었다.
--- p.300
거리에 홀로 서 있는 미트코를 본 나는 다시 그에 대한 슬픔으로 가득찼다. 그가 언제나 혼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기 자리를 한 번도 찾지 못한 채, 이제는 그에게 거의 완벽하게 냉담한 세상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에게는 세상에 작은 파문이나마 일으킬 능력조차 없었다. 세상이 굳이 귀를 기울일 만한 소리를 낼 힘이 없었다.
--- p.309
서술자가 섬세한 애정을 담아 그려낸 미트코의 매력적인 모습은 서술자와 독자 모두의 머릿속에 지배적으로 남아 그를 인간쓰레기로 취급하는 경향을 강하게 거부하도록 만든다. 미트코 자신도 누가 그를 가엾게 여기거나 계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니 서술자로서는 대체 미트코 같은 아름다운 소년을 망가뜨리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구원의 손길을 뻗으려고 하면서도, 이런 자신의 생각조차 미트코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건 아닌지, 그의 모습을 글로 포착하려는 시도조차 그의 모습을 앙상하게 왜곡하는 건 아닌지 혼란스러워할 수밖에 없다.
--- p.320,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