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잉크는 이를 알아보는 독자가 발견하기 전까지 행간에 그리고 행의 안팎에 숨어 있는 것이다. ‘알아보는’ 독자라고 하는 이유는 책에 따라서 모든 독자에게 맞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책을 최선의 방식으로 혹은 알맞은 방식으로 사랑하지 못할 수 있다. 그 책에 ‘딱 들어맞는’ 사람은 바로 보이지 않는 잉크에 민감한 사람이다.
--- p.19~20, 「보이지 않는 잉크」 중에서
내가 누구이고 나의 작업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아는 능력이 부족 내에서, 혹은 가족, 국가, 인종, 성별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밀접하게 엮여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명확성은 자아의 평가를 위해 필수적이고, 다른 부족이나 문화와의 어떤 생산적 교류를 위해 필수적이다. 자신의 문화에 대한 명료한 이해야말로 다른 문화 안에서, 곁에서, 혹은 다른 문화와 나란히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게 없다면 작가는 어떤 정점에 오르든 고독하게 살게 되고, 어떤 길을 걷든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보살피고 돌보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핵심이다.
--- p.45, 「단단하고 진실되고 영원한 것」 중에서
《빌러비드》를 쓸 때는 노예 여성의 자기 존중에 무엇이 가장 크게 기여하는지 관심이 있었습니다. 노예 여성의 자존감은 어땠을지, 노예 여성이 자신에게 어떤 가치를 부여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머니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법과 제도가 허락하지 않은 이 정체성을 취하고 또 유지하는 데서 나왔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노예 여성이 중요하게 여긴 것이었습니다.
--- p.80~81, 「자기 존중의 근원」 중에서
작가가 하는 일은 기억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기억한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책임은 (시대가 어떻든) 세상을 바꾸는 일, 자신의 시대를 더 낫게 만드는 일이다. 그게 너무 야심에 차 보인다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위한 일이다.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 p.96, 「종이 앞에 앉은 작가」 중에서
나는 때 지난 관념이 되어버린 진보의 징후를 찾는 데는 관심이 없다. 진보는 단일한 공산주의 국가의 파괴된 미래와 함께 사라졌다. 자유롭고 무제한적이며 진보적인 자본주의의 벗겨진 가면과 함께 사라졌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고의적인 빈민화와 함께 사라졌다. 음경 중심적인 ‘국가주의’에 대한 믿음과 함께 사라졌다. 실상 독일이 첫 처형실을 가동했을 때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를 합법화하고 피를 흡수하기에는 너무 엷은 먼지 속에서 아이들에게 총을 난사했을 때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웃 나라의 공동묘지 위로 국경을 그린 수많은 나라들의 역사 속에서 이미 사라진 뒤였다. 시민들의 뼈에서 흘러나온 영양분으로 정원과 초원을 비옥하게 했을 때, 여성들과 아이들의 등골 위로 건축물을 올렸을 때. 정말 나는 진보에는 아무 흥미도 없다. 나는 시간의 미래에 관심이 있다.
--- p.114~115, 「시간에는 미래가 있다」 중에서
아프리카니즘이 문학적 상상력 속에서 무엇이 되었고, 어떻게 기능했는지는 아주 중요한 관심사다. 문학적 ‘흑인성’을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문학적 ‘백인성’의 본질과 심지어 기원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백인성의 용도가 무엇인지? 백인성을 창조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이 ‘미국적’이라고 칭해지는 특성의 구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여기에 대한 탐구가 혹여 완성된다면, 미국 문학의 일관된 해석에 접근할 수 있을지 모른다.
--- p.157, 「흑인의 의미」 중에서
나는 미국 흑인 문학의 존재, 그리고 미국 흑인 문화에 대한 각성이 미국 내 문학 연구를 소생시키고 그 연구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길에 대해 말하고 싶다. 먼저 정전에 관한 논의가 서구 문학비평에서 진전되어온 맥락을 살펴보는 게 이 글의 목적에 부합할 것이다.
--- p.247, 「입에 담지 않은 차마 못할 말」 중에서
남성 우월주의 내의 인종주의적 요소가 성차별보다 부차적인 듯 가장하는 것은, 다시 말해 성차별을 완전히 없앨 기회를 회피하는 것이다. 19세기 노예폐지론자들이 회피했듯이 20세기 페미니즘도 이를 무시했다. (……) 남성이 규정하고 남성이 축복한 계층 위계를 받아들이는 것 역시 운동의 숨통을 막고, 우리를 열매 없는 전쟁에 갇혀 있게 하며, 우리는 그 속에서 각각 방해 공작 여성이 된다.
--- p.353~354, 「여성, 인종 그리고 기억」 중에서
우리가 아는 한 인간만이 이 은하계의 도덕적 주민입니다. 그 장엄한 임무를 맡기 위해 자궁 속에서 그토록 애를 써놓고 왜 이제 와서 내버리려고 합니까? 여러분은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삶의 성격과 질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신뢰를 받는 자리 혹은 권력을 가진 자리에 섰을 때, 생각하기 전에 조금은 꿈을 꾸길 바랍니다. 그래서 누가 살고 누가 그러지 못하는지, 누가 번영하고 누가 그러지 못하는지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과 해법, 방향, 선택이 여러분이 선택한 신성한 목숨만큼의 가치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는 방법이 없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인정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시간이 있습니다.
--- p.02~403, 「우리는 최선을 다해 타자를 상상해야 합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