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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김중업이라는 유산_이명희
전통과 모더니즘 일본 시기의 김중업: 보자르, 아르데코, 그리고 한국적 모더니즘_ 조현정 김중업의 글과 세평을 통한 김중업의 건축교육과 건축관_안창모 서양 건축의 흐름 속에서 본 김중업 건축_정만영 전통건축의 탐색과 석굴암 보수계획_윤재신 구축성과 투명성 김중업과 베통 브뤼트_ 남성택 부산대학교 본관: 근대적 투명성의 현존_ 유재우 삼일로빌딩의 건립 배경과 국제협력_ 우동선 장소성과 거주성 체계적 변주: 주한 프랑스대사관의 한국성과 구성적 질서_최원준 김중업의 제주_이용규 삶을 담은 그릇: 김중업의 주택_ 정재은 김중업의 건축이론에서 음악 예술과 공간 개념의 위상_김영철 스케일 김중업의 도시계획적 사유와 박병주의 새서울 백지계획_정인하 김중업의 서민주거론: 지식인과 예술가 사이에 선 건축가_이종우 김중업의 1980년대 작품에 나타나는 자기복제와 스케일의 확장_정인하 이상과 현실의 간극: 김중업의 미국 경력, 그리고 바다호텔과 민족대성전_김현섭 스튜디오 김중업건축연구소의 계보_정주원 부록: 김중업의 글과 건축 김중업의 글 김중업 및 건축작품 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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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르 코르뷔지에의 초기 사무실에서 엄정한 기하학적 어휘를 습득한 마에카와 구니오나 사카쿠라 준조 같은 이들과 달리, 1950년대 르 코르뷔지에 아틀리에에 있었던 김중업에게 장식적인 것은 모더니즘과 반드시 상충하는 요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후기 르 코르뷔지에 아틀리에에서 요구되는 능력은 숙련된 드로잉 실력에 더해, 건축의 지역성, 상징성, 조형성에 대한 이해였고, 이러한 능력은 다름 아닌 요코하마 고공의 교육이 추구했던 바였다. ... 따라서 김중업의 일본 시기 교육은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과 불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그가 후기식민지 국가의 건축가에게 필요한 중요한 덕목, 즉 상징과 기념비를 만드는 능력을 장착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 p.40, 「조현정, ‘일본 시기의 김중업: 보자르, 아르데코, 그리고 한국적 모더니즘’」 중에서 모더니즘에 장식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것은 아직 충분히 ‘근대’적이지 못한 한국 건축의 기술적, 재료적 한계를 상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지 중 하나였다. 나아가 건축의 상징성과 조형성에 대한 추구는 후기 식민적 조건에서 국가 세우기에 매진하던 한국 사회의 요구에 건축이 응답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이자 야심찬 시도이기도 했다. --- p.41, 「조현정, ‘일본 시기의 김중업: 보자르, 아르데코, 그리고 한국적 모더니즘’」 중에서 김중업은 르 코르뷔지에라는 대가의 건축을 한국에 소개했고, 전쟁과 가난으로 황폐한 한국 건축계에 ‘예술로서 건축’의 가능성을 보여준 건축가이기는 했지만, 코르뷔지에의 건축 사상이 아닌 그가 이룩한 건축적 성과의 어휘만 도입했다. 동시대에 김중업과 미국을 통해 이루어진 ‘모더니즘의 사상이 제거된 모더니즘 건축 어휘의 도입’이 전후 복구와 경제개발기의 폭발적인 건축수요에 대응하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서양의 모더니즘 건축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온 시작이기도 했다. --- p.66, 「안창모, ‘김중업의 글과 세평을 통한 김중업의 건축교육과 건축관’ 」 중에서 르 코르뷔지에를 필두로 한 근대건축가들이 그토록 부정하고자 했던 고전적 구성으로 김중업이 되돌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김중업이 처음 받은 건축교육이 보자르 체제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같은 1980년대 작업이지만 규모가 큰 건물들에서는 대부분 도식적인 좌우대칭을 적용한 반면, 이강홍 주택(1980)으로 대변되는 개인 주택들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 도식적인 좌우대칭이 건축가의 의식(내부)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1980년대 한국 사회(외부)에서 공공건축의 기념적 표현에 기대하는 바와 타협한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1950~1960년대에 의욕적으로 달성한 성취를 계속 밀고 나가 새로운 표현 수단을 공고히 하는 김중업의 과제가 1970년대 강제 추방을 거쳐, 1980년대에 낡은 표현으로 굴절되면서 뒷걸음질하고 만 것은 실로 애석한 일이다. 경직된 기하학과 평이한 기능 해결은 날카로운 시적 언어와 짝이 되기 어렵다. 해외 건축은 김중업에게 활력을 주고 추어올리는 계기였지만, 후반기에 들어서는 서로 대립하고 부딪치는 가운데 울림을 키우는 대위법적 구도를 형성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p.103, 「정만영, ‘서양 건축의 흐름 속에서 본 김중업 건축’」 중에서 본질적으로 건축문화재는 보존해야 하는 유물이 아니라, 보전해야 하는 건물이다. 이것은 오늘날 상식적 명제이지만, 1962년 당시에는 이에 대한 사회적 개념들이 정립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혼란과 오류가 야기되고 석굴암의 수리와 복원에 실수가 발생했다. ...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문화재위원회 권력이 석굴암을 건축문화재가 아닌 조각문화재로 규정하고, 건물이 아니라 유물로서 보존하려는 공통 심리가 과도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김중업의 전통건축에 대한 탐색은 그가 속한 시대의 제한 안에서 그가 추구한 설계 작업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 p.120-121, 「윤재신, ‘전통건축의 탐색과 석굴암 보수계획’」 중에서 김중업의 ‘서방 여행’은 낯선 외국 땅에서 마주친 태곳적 건축 장면을 통해 조국의 뿌리와 갑자기 연결된다. 원시적 인간이 세운 기념비는 동서양의 구분 없이 시공간을 초월하며 절대적인 보편성을 띤다. ‘너’의 건축을 떠나 ‘나’의 건축을 향하고자 했던 김중업은 모든 것을 수렴시키는 ‘우리 모두’의 건축을 발견한다. 프랑스와 인도, 그리고 나중의 한국에 이르기까지 보편 적용될 수 있는 베통 브뤼트의 건축 역시 그렇다. 베통 브뤼트의 경험은 이렇게 원시 건축의 경험으로 이어지며, 궁극적으로 김중업의 건축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공명한다. --- p.160, 「남성택, ‘김중업과 베통 브뤼트’」 중에서 부산대학교 본관은 김중업이 한반도에 남긴 첫 작품으로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그는 대형 유리 커튼월을 외부에 도입해 전후 한국과 대학에 새로운 미래를 보여주고자 했다. 네 개 층이 개방된 로비 공간 동측에 대형 유리 커튼월을, 서측에 브리즈 솔레이유를 대면시켜 빛의 리듬과 명암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서구의 근대성을 넘어, 실내와 실외를 경계 짓는 물질적 투명함을 초월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동측창과 서측창 사이에 교차형 구름계단을 도입해 체험과 기억을 생성하고 확장하는 간투명적인 구도로 금정산, 미리내 계곡, 무지개문, 세상 밖으로까지 존재적 의미를 확장시켰다. --- p.184, 「유재우, ‘부산대학교 본관: 근대적 투명성의 현존'」 중에서 삼일로빌딩은 한국 고층 사무소 건축의 역사에서도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PA&E가 설계한 22층의 정부종합청사(1970), 시저 펠리가 설계한 23층의 교보빌딩 사옥(1978), ... 등은 미국의 설계사무소가 설계한 것들이었다. 미스 반 데어 로에 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힌 김종성은 16층의 효성빌딩(1977), 16층의 동성빌딩(1978), 36층의 SK사옥(1999) 등으로 ... 이러한 경우에는 이미 고층 사무소 건축의 설계와 구조 검토를 위한 조직이나 재료 수급 네트워크가 확보되어 있었다. ... 삼일로빌딩은 이런 사례들과는 전혀 달랐다. 우여곡절 끝에 시그램 빌딩을 목표로 하였고, 그 구현을 위하여 한국인들이 “I빔도 없었고 철골구조를 할 시스템이 전혀 마련이 되지 않았던” 백지상태에서 국제협력을 통해 완성해 나간 것이다. --- p.199-200, 「우동선, ‘삼일로빌딩의 건립 배경과 국제협력’」 중에서 주한 프랑스대사관은 여러모로 새로운 실험이었다. 건축가 개인에게는 유럽의 전기 모더니즘적 성향에서 벗어나 “비로소 건축가 김중업의 첫발을 굳건히 내딛게”한 작품이었고, 현대건축의 형식에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담는 모색은 우리 건축계에서도 처음이었다. 이렇듯 새로운 시도가 미숙한 중간 결과가 아닌 최상의 완성형에 도달했다는 점이 이 작품의 놀라운 성취다. ... 그렇기에 주한 프랑스대사관은 직관을 통한 시적 초월성보다는 논리적 체계성을 통해 그 아름다움에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 --- p.226-227, 「최원준, ‘체계적 변주: 주한 프랑스대사관의 한국성과 구성적 질서」 중에서 1960년대 김중업의 제주 작품 활동은 주로 제주대학과 관련되어 진행되었다. 당시 전국의 대학들이 그러했듯 제주대학 역시 본격적인 성장기를 맞이하며, 이농학부 이전과 수산학부 신설, 법문학부와 병설교육과의 내실화 등 시설 확충이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김중업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던 문종철 학장의 재임 기간(1961~1967)과 일치한다. 김중업 고유의 건축 어휘를 찾아가는 여정은 이러한 제주의 지역성에 대한 고찰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점에서 그에게 있어 제주는 의미 있는 장소이며, 그의 제주 작품들의 전형성과 지역성을 밝히는 일은 그의 건축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 하겠다. --- p.256, 「이용규, ‘김중업의 제주’」 중에서 김중업은 당시 군사정권과의 불편한 관계 속에서 공공 건축물을 제대로 수주받지 못했고, 그러한 상황에서 주택은 그의 건축언어를 펼칠 수 있는 최선의 매개체였다. ... 그에게 주택설계는 건축을 예술의 형태로 구현하려 했던 그의 염원처럼 켜켜이 쌓아 올린 창작의 힘이 되었다. --- p.259, 「정재은, ‘삶을 담은 그릇: 김중업의 주택」 중에서 김중업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설계한 주택을 통해 건축 공간의 변화체계, 자연과 건축의 관계, 한국 전통성을 포함한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시도하며 자신의 작품을 확장했다. 그의 주택작품을 살펴보면 건축가의 세계관과 건축 어휘가 함축적으로 담긴 시(詩)와 같다. 이러한 주택작품을 통해 아이디어를 적용하고 실험을 거듭하며 자신만의 건축양식을 구축해 나갔다. --- p.302, 「정재은, ‘삶을 담은 그릇: 김중업의 주택’」 중에서 건축가로서의 그의 생애는 음악 예술의 축복으로 시작했고, 그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건축은 음악을 주도하는 디오니소스와도 같은 신적 질서의 형식 논리를 따라 표출되지는 않았지만, 음악 예술은 그의 삶 전체에 내재한 채 그의 사유의 세계를 끊임없이 주도하고 있었다. ... 그는 마치 고전의 작품들처럼 자신의 작품도 이 규율을 통해 기억되기를 바랐다. “「할모니」·「바란스」·「리듬」” 이들이 건축가 김중업에게는 최고의 미적 규율이었다. --- p.329, 「김영철, ‘김중업의 건축이론에서 음악 예술과 공간 개념의 위상’」 중에서 무궁화 형태의 윤곽을 지닌 새서울 백지계획은 박병주의 생각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으면서, 장차 그가 주도하게 될 도시계획을 예견하고 있다. 여기서 계획가는 고밀도의 중심지구와 저밀도의 주변 주거지역이라는 도시모델을 제안하고 있다. ... 또한 거기에는 또한 김중업을 통해 전해진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계획 사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 박병주의 새서울 백지계획에서 흥미로운 점은, 녹지를 중심으로 고층건물이 배치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김중업이 상상했던 도시의 모습과 유사하지만, 박병주는 김중업처럼 도시 기능의 복합화를 가정하지는 않았다. 대신 조닝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계획 개념 가운데, 박병주가 특히 주목한 부분은 고밀화된 도심이었다. --- p.347-348, 「정인하, ‘김중업의 도시계획적 사유와 박병주의 새서울 백지계획’」 중에서 김중업은 건축이 기술적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사회와 긴밀히 연결된 분야라는 생각, ‘건축은 시대의 거울’이라는 입장을 지속적, 반복적으로 표명했다. 그에게 ‘건축 활동’의 목표는 건축과 사회와의 상관성을 입증하려는 것이었다. ... 그동안 부각되지 않은 또 하나의 방향은 사회적, 문화적, 도시적 차원에서 시민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결부된 영역인 주택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발언하는 것이었다. --- p.355-356, 「이종우, ‘김중업의 서민주거론: 지식인과 예술가 사이에 선 건축가’」 중에서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한국의 급격한 도시화의 과정 속에서 서민들의 주거 문제와 해결 방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발언했던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가의 주택 정책에 거침없는 비판을 했고, 국가 권력에 의해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제재를 받았던 것. 오랜 외유 끝에 건축가로서 재기했고 다수의 작품을 실현했던 것, 하지만 사회적 발언이 예전과 같지 않았던 점. 우리는 김중업 한 개인의 일생을 통해 한국 건축에서 대사회적 지식인으로서의 건축가의 등장과 시련을 확인할 수 있다. --- p.375-376, 「이종우, ‘김중업의 서민주거론: 지식인과 예술가 사이에 선 건축가’」 중에서 김중업의 후기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자기복제와 스케일의 확장에 대해 살펴보았다. 1980년대 처했던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김중업은 이 같은 방법을 사용해서 여러 변종을 만들어냈지만, 이로 인해 전반적으로 작품성을 떨어트리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예술의 전당 계획안이나 올림픽 세계평화의 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스케일의 확대가 기념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건축에서 스케일은 상대적이고 도시적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p.396, 「정인하, ‘김중업의 1980년대 작품에 나타나는 자기복제와 스케일의 확장’」 중에서 그가 귀국 후 자신의 해외 경력을 점차 더 포장하게 된 것은 일면 이해가 간다. 그간 고국에서의 공백을 만회하려는 욕망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한 과장된 욕망이 바다호텔과 민족대성전 프로젝트에도 여실히 투사됐던 것이다. ... 김중업도 참여했던 1966~1967년의 전통논쟁에서 진화한, 현대건축에 어떻게 ‘한국성’을 녹여낼 수 있을까에 대한 이론화 작업이다. 이 같은 이론화 작업과 비교한다면 김중업의 건축은 이지적 논리보다는 낭만적 감성과 예술적 자유에 호소하는 면이 더 두드러진다. --- p.420-421, 「김현섭, ‘이상과 현실의 간극: 김중업의 미국 경력, 그리고 바다호텔과 민족대성전'」 중에서 김석재는 김중업으로부터 “한국적인 정신”으로 서구 현대건축을 한국 전통과의 조화 속에서 재해석하는 건축관과 꾸준히 연구하는 투지를 배웠다고 하였으며, 안병의도 건축가로서의 사회의식과 책임감, 한국의 “고전”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려는 건축관과 성실함을 배웠다고 했다. 김효일은 김중업의 소명 의식, 열정, 그리고 새로운 건축 창작을 추구한 작가적 정신에 관해 서술했고, 배병길은 김중업으로부터 개성 있는 건축 창작을 위한 집념과 인내심을 배웠다고 했다. 김석철은 김중업의 건축적 성취와 독자적인 작가 정신 덕분에 한국에서 건축가가 “작가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으며, 장석웅도 김중업이 “건축가로서의 사명감과 자부심을 일깨워” 주었다고 했다. 연구소 출신 직원들은 김중업건축연구소에서 독립한 뒤에도 김중업의 건축관과 건축가가 지녀야 할 자세를 나름대로 내재화하고 이어나갔던 것이다. --- p.464, 「정주원, ‘김중업건축연구소의 계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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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가지 주제로 읽는 김중업 건축:
전통과 모더니즘, 구축성과 투명성, 장소성과 거주성, 스케일, 스튜디오 ‘전통과 모더니즘’에서는 일본 유학 시기 건축교육의 영향과 졸업 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의 건축 활동 및 글을 통해 그의 건축관을 분석한다. 또한 그의 자필 수첩을 통해 해외 체류 시기에 접했던 서양 현대건축의 흐름과 이를 반영한 김중업의 건축 및 변화 과정을 살피고, 석굴암 보수계획 등 여러 작업에 반영된 한국 전통건축과의 연관성을 다룬다. ‘구축성과 투명성’에서는 김중업이 르 코르뷔지에 아틀리에에서 체득한 베통 브뤼트와 1950년대 유럽을 답사하며 경험한 원시 건축의 영향을 탐구한다. 또한 초기작인 부산대학교 본관을 통해 건축의 투명성을, 삼일로빌딩에서는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의 국제협력을 다룬다. ‘장소성과 거주성’에서는 주한 프랑스대사관과 제주대학교 본관을 중심으로 그의 건축에서 나타나는 장소적 특성을 분석한다. 또한 주택 및 예술 작업을 중심으로 그의 건축적 공간 개념과 원리를 이해하고자 시도한다. ‘스케일’에서는 도시적 사유와 함께 주택 및 도시개발과 관련한 김중업의 생각과 활동을 짚는 한편, 1980년대 작품에서 나타나는 자기복제와 스케일 확장의 변화를 분석한다. 마지막 ‘스튜디오’에서는 김중업건축연구소의 구성과 운영 방식, 계보를 추적하며 그가 우리 건축계에 남긴 유산을 살핀다. 연구의 집대성, 미공개 자필 기록 공개 이 책은 ‘김중업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김중업건축박물관에서 2022년에 진행한 전시와 국제 포럼의 성과를 정리해 발전시킨 것이다. 책 후반에는 김중업건축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비공개 자료를 부록 형태로 담았다. 김중업이 1950년대 프랑스 체류 시절과 1970~1980년대에 기록한 자필 공책 원문을 실물 사진과 함께 수록해 그의 목소리를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이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건축작품과 생애를 보기 쉽게 정리한 연보도 수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