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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신앙 언어의 왜곡과 오염, 그 배경과 위험성 _ 정병오 7 1장_ 신앙과 윤리 : 신앙의 언어는 윤리의 언어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_ 권연경 17 2장_ 예언과 선동 : 하나님의 정념인가, 욕망의 우상화인가? _ 구미정 45 3장_ 정교분리, 역사적 맥락 : 교회의 정치참여 기준과 책임은 무엇인가? _ 최종원 71 4장_ 자유와 평등 : 대립하는 이념인가, 보편적 가치인가? _ 신진욱 101 5장_ 국민저항권 : 국가에 대한 국민의 권리와 저항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_ 김중락 129 6장_ 세속과 정치 : 극우기독교는 근본주의인가, 카이퍼주의인가? _ 김동춘 159 주(註) 1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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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C. S. Lewis)는 우리에게 신앙이란 그 자체로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빛과 같다고 했다.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현실의 이모저모를 신앙의 눈으로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도리어 ‘신앙의 이름으로 오염된 신학, 역사, 언어’를 염려한다. 역설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신앙이 우리의 현실을 밝히 비추어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잘못 만들어진 안경처럼, 도리어 우리의 현실 인식을 비튼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지 묻는다.
--- p.19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인식한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 두 눈으로 만나는 이는 나사렛 출신의 한 인간 예수다. 우리와 같은 한 사람 예수를 만나는 경험 속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만난다. 사람을 벗어나, 사람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빛을 얻는다. 굳이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하나님 경험의 최대치는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셨던 인간 예수다. --- p.23 이 글의 결론은 분명하다. 적어도 주님이 계시지 않는 시간, 그래서 그를 기다리는 시간을 사는 동안에는 윤리의 실천이 곧 신앙의 내용을 이룬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땅에서는 사랑이 우리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믿음의 형식이다. 물론 이는 윤리가 신앙을 대체한다는 식의 환원주의가 아니다. 하지만 윤리적 실천이 없이는 신앙이 불가능하다는 말 또한 사실이다. --- p.43 예언자는 침소봉대(針小棒大)가 특기다. 세상 사람들 눈에 잘 포착되지 않는, 신문 맨 뒤쪽 맨 아래 한 줄짜리 보도에 확대경을 들이댄다. 노발대발한다. 사회를 움직이는 명사도 아니요, 대중을 사로잡는 셀럽도 아니며, 그저 그렇고 그런 이름 없는 가난뱅이들이 흔하디흔한 불의를 당했다고 해서 그게 망국에까지 이를 일이냔 말이다. 대체 왜 이토록 ‘히스테리’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가? 하나님이 그리 느끼시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느낌을 공유한다. --- pp.51-52 그 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물음은 이것이다. 어째서 우리 눈은 다가오는 심판을 보지 못하는가? 어째서 우리 귀는 선동을 예언으로 알아듣는가? 이 지점에 우리의 욕망이 자리한다. 재물과 명예와 권력만 안겨준다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순수한 욕망, 그게 문제다. 이 욕망은 다른 욕망의 틈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순수하다. 이 욕망은 단박에 여럿을 하나로 엮는다는 점에서 강력하다. --- pp.61-62 전통적인 의미에서 정교분리란 국가 권력과 종교의 유착을 금지하며, 국가로부터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교회의 목소리가 정당하냐, 정당하지 않냐를 논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지만, 교회가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를 정교분리의 위반이라고 몰고 가는 것은 적절한 적용이라고 할 수 없다. --- p.76 지금 우리가 성찰해야 할 지점은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 시민사회와의 협력 속에서 싹텄던 시민종교의 회복이다. 다시 말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문제를 제기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민의식을 갖춘 기독교의 등장이 요청된다. 1987년 체제와 함께 등장했지만,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채 자본에 종속되고 존재감을 상실해 버린 그 흐름이 다시 부활해야 한다. 국가와 교회의 유착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을 해소하는 방편으로만 정교분리를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 p.96 한국 개신교의 숙제는 특정한 하나의 목소리가 마치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과잉 대표되는 현실을 넘어, 교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드러내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의제와 긴밀하게 호흡하면서, 그것을 기독교적 언어로 해석하고 제시할 수 있는 공적 신학적 작업이 요구된다.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 참여의 목소리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적 의제를 발굴하고, 집단적으로 숙고하며, 책임 있게 발화하는 공동체적 목소리를 형성해 가야 한다. --- pp.97-98 오늘날 극우 세력의 담론과 정치 전략은 무엇보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현대의 보편적 가치를 간교한 방식으로 침식한다.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극우들은 ‘자유’를 가장 강력한 선전의 표지로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다원주의, 인권, 법치와 같은 자유주의의 핵심 요소들을 공격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평등’의 가치를 전체주의나 공산주의와 동일시하는 인식을 확산시키면서, 실질적으로는 민주적 세력을 약화하고 자신의 정치적 영향권을 확대한다. --- pp.103-104 한국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정치 이념이자 지배 이데올로기이며, 또한 저항 담론이기도 했다. 그것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누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도로 사용하느냐, 누가 담론과 정치의 헤게모니를 쥐느냐에 따라서 유동하는 역사적, 사회적 구성물이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갈등은 단지 개념 정의의 차원을 넘어, 민주주의의 실질, 국가 정체성, 반공주의, 시민권,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를 둘러싼 지속적 해석 투쟁인 것이다. --- p.118 정부에 대한 국민의 무력 저항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정부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모든 수단이 없어지고, 국민의 재산과 생명이 크게 위협받는 상황에서만 무력 저항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기독지성 운동을 이끌어온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는 그의 『기독교인의 선언(A Christian Manifesto)』에서 무력 저항이 아니고서는 정부와 권력을 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만 무력 저항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바꿀 수 있는 사회라면 무력 저항은 불가한 것으로 보았다. --- p.152 현대 정치에서 종교의 정치적 귀환은 이미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극우기독교=근본주의라는 관성적인 도식화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근본주의가 대거 정치세력화하는 현상 이면에서 개신교 전반의 흐름은 오히려 교리적 근본주의가 점차 약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개신교의 신앙 구조가 ‘근본주의에서 리버럴 기독교’로 이동하고 있다는 흐름을 고려할 때, 한국 정치에서 극우기독교의 새로운 발흥은 근본주의의 귀환이라기보다 문화전쟁의 관점에서 설명될 필요가 있다. --- p.1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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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이름으로 오용되는 언어,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신앙의 언어가 복음을 밝히고 세상을 사랑하는 증언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가리고 현실을 비트는 선동이 될 때, 교회는 자기 언어를 다시 복음으로 되돌려야 한다! 〈‘서문’(정병오 기윤실 공동대표) 중에서〉 이 책은 한국교회가 처한 이러한 상황에 응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정치적 이념과 정파적 이해관계를 복음보다 앞세우고 복음을 정치의 하위 영역으로 축소시키며, 교인들을 정치적 목적에 동원하기 위해 사용해 온 신학적 언어에 주목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성도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대표적인 언어와 논리를 추출하고, 그 말과 논리가 과연 성경과 신학, 역사적으로 합당한지를 살피고자 했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진리이고 어디부터가 왜곡인지, 이러한 왜곡이 단순한 실수인지 아니면 특정한 의도를 지닌 오용인지, 그렇다면 그 언어와 논리의 원뜻은 무엇이고, 오늘 한국 사회와 교회가 처한 맥락에서는 어떻게 사용해야 옳은 것인지를 묻고자 했다. 먼저 “신앙과 윤리”(권연경)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어떻게 보이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윤리, 인권의 언어로 이어지는지를 성경적으로 살핀다. 윤리적 실천 없는 신앙은 불가능하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보이는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구체화 되어야 함을 밝힌다. “예언과 선동”(구미정)에서는 전광훈 목사와 손현보 목사의 사례를 비롯해, 오늘날 강단에서 예언의 외피를 두르고 쏟아지는 정치적 선동의 언어를 살핀다. ‘예언’이 하나님의 정념과 공의에 사로잡힌 말이라면, ‘선동’은 자기 욕망과 권력을 거룩한 언어로 포장하는 말임을 밝힌다. “정교분리”(최종원)에서는 교회와 정치가 무조건 분리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통념을 넘어, 정교분리 개념의 역사적 맥락과 올바른 의미를 살핀다. 정교분리는 교회의 공적 발언을 금지하는 원리가 아니라, 국가 권력과 특정 종교의 제도적 유착을 막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장치임을 밝힌다. “자유와 평등”(신진욱)에서는 극우기독교가 자유, 민주, 헌법, 법치와 같은 긍정적 가치의 언어를 전유하면서 실제로는 그 가치를 어떻게 공격하고 있는지를 살핀다. 자유와 평등은 어느 한 정치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보편적 가치임을 확인한다. “국민저항권”(김중락)에서는 오늘날 극우기독교 진영에서 사용되는 저항권의 논리가 과연 역사적·신학적으로 정당한지를 살핀다. 종교개혁 전통에서 저항권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것이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특정 정치인을 옹호하거나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세속과 정치”(김동춘)에서는 극우기독교를 근본주의와 동일시하는 기존의 통념을 지적하면서, 극우기독교가 신학적 명분과 토대 위에 형성된 조직이 아니라 일종의 ‘세속주의 기독교’의 산물이라는 점을 설명한다. 또한 극우기독교가 카이퍼주의를 어떻게 자신들의 신학적 정치 이념으로 오용하고 있는지도 밝힌다. 이 책이 교회의 정치적 참여를 두고 쏟아져나오는 언어의 홍수를 성경과 신학, 역사의 필터로 잘 걸러내어 건강한 생수로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모든 성도와 교회들이 주변의 큰 목소리를 무작정 따라가거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건강한 신학 위에서 오늘의 현실을 분별하고, 자신의 신앙과 삶에 책임 있게 적용하며 행동할 수 있는 소중한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