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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
1부 적멸 적멸, 겨울의 빛, 길, 개미, 입춘, 별 등 2부 가변차선의 날들 9월도 저녁이면, 없는 길, 낙타의 꿈, 가변차선의 날들, 검은 강, 너무 긴 이별 등 3부 고독의 기원 강, 그들만의 세상, 행복, 몸살, 유예의 형식, 고독의 기원, 감옥 등 4부 다시 적소에서 어젯밤 꿈속에, 안녕 안녕, 고요, 운명, 가위 건너간 자리, 백야, 식당에서, 어깨결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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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시인, 시로 해탈하다
--- 김병희 (cbang36@yes24.com)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가 있다. 불교는 참 대범한 종교라는 착각이 그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스님들이 절에 그저 앉아 있다가 해탈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모든 것은 空'이라고 한 마디 하고 나면 해탈하는 걸로 생각한다. 알고 보면, 불교는 대단히 엄밀한 종교이다. 적어도 불교의 기원은 그랬다.
'달마에 대하여'라는 의미를 가진 아비달마는 원시 불교를 지칭한다. 정확한 명칭은 원시 구파 불교. 이 종교는 아주 세밀한 인식론, 또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을 5범주와 75가지 세부 형상으로 나누었다. 좀 지루하지만 5범주 주장에 의하면, 세상은 물질적 대상(色), 마음(心), 마음의 작용(心所), 마음도 사물도 아닌 것(不相應行), 무위(無爲)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이 5범주는 차례로 1 가지, 11 가지, 46 가지, 14 가지, 3 가지 세부 부류로 다시 나뉜다. 그래서 이 부류들을 합하면 75 가지, 결국 5범주 75가지 분류의 인식론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서 해탈은 무엇인가? 해탈을 뜻하는 무위는 세 가지로 나뉜다. 궁극적인 무위, 지혜에 의한 무위, 연기가 소멸된 무위가 그것이다. 시인은 속세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다. 시인에게 가능한 무위는 지혜에 의한 무위뿐이다. 그래서 여행시나 기행시가 많은 이 즈음에도 시인은 어디 가지도 않고, 술집이며 중국집, 약국, 식당, 사우나를 오간다. 그러고 보면 일상을 떠나 산으로 가야 속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은 '모든 건 마음'이라는 불교적 신념과 영 어울리지 않는다. 속세는 허무, 적멸, 해탈로 가는 작은 깨달음들로 가득 차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해 깨닫기도 하지만 길과 강, 점과 선에 대해 깨닫기도 한다. 죽은 자를 위한 술과 음식을 먹는 것 / 그걸 음복이라고 하지요 / 죽은 자를 위해 대신 먹는다는 것 / 그건 눈물나는 일이지요 / 그러니까 말하자면 죽음 대신 사는 / 혹은 삶을 대신 죽는 일이지요 (후략) <음복> (전략) 굽이가 없는 강도 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 건널 만한 강도 과연 강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인가 (후략) <강> (전략) 수학적 정의는 화두나 잠언과 닮아 있다 / 때로 법열을 느끼게도 한다 / 길이란 것도 말하자면 /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점들의 집합이다 (후략) <길> 시인이므로 그의 지혜는 시로 표현되고, 시인이 시인을 넘어서는 것도 시를 통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의 시는 자기 시를 헐뜯는 모양을 한다. 그렇게 해서 이르는 곳이 적멸이다. (전략) 간절함을 포기하면 이제는 노래나 시 같은 것 / 그 동안 베껴썼던 모든 문자들에게 / 나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 (후략) <적멸> 그리고 그건 해탈이다. (전략) 이제 나, 문학은 시는 목숨 같았다는 엄살은 / 그만 피울 거야 그런 말을 하는 애들 보면 /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타이를 거야 / (중략) / 이제 나, 내가 아니야 <슬픈 해탈> 그런데 제목에서 보듯이 해탈 치고는 슬프다. 해탈이 슬픈 것은 그것이 자기 부정이기 때문이다. '한 밤의 음악 편지', '존재의 슬픔', '미어지는 연애'. 낱낱이 세어가면서 '편지 따위', '슬픔 따위', '연애 따위'는 듣지도 않고 입에 담지도 않고 꿈꾸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것은 어김없이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자기 부정이다. 해탈이 슬픈 것은 또한, 자기 부정이 자기 연민과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을 샌드백 걸 듯 천정에 매달아 두고 내내 맘껏 두들겨 패고 너스레를 떨지만, 결국 눈이 글썽해지고 만다. (전략) 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있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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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듬지에 겨울 햇살이 이명처럼 매달려 있다
초록이 없으므로 햇살은 더이상 빛나지 않는다 나무는 제 발치께를 우두커니 내려다본다 발로 쓸어모으는 기억은 누구에게나 허전한 법이다 한때 우숭깊었던 그늘의 넓이를 가늠하며 나무는 체온계를 문 아이처럼 생각에 잠긴다 텅 빈 고요가 압박붕대에 묶인 허리춤을 더듬는다 동그랗게 말린 이파리 몇 장이 마저 떨어져 이미 탕진한 삶을 둔탁하게 덧칠한다 저 잎들이 움켜쥔 허공조차 내 몫이 아니었구나 바람도 없는데 나무는 진저리친다 나뭇잎 대신 이명의 햇살이 떨어져내린다 그늘이 있던 자리를 비춘다 배추 속같이 환하다 나무를 지탱하는 힘은 이제 고요가 아니다 -<겨울의 빛>전문 --- p.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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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세상
그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라고 나는 쓴다 내가 은밀히 구상하는 소설의 첫 구절이다 그러나 나는 곧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언제 무엇 때문에 세상을 떠났는가 그들이 떠난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는가 그들은 과연 어디로 갔는가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래서 박박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고쳐쓴다 그들이 세상에 돌아왔을 때 하지만 그들은 어쩌자고 돌아왔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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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글썽거리게 하는 것들에 대한 조용한 중얼거림
{비단길}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에 이은 강연호의 세번째 시집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밖을 향해 닫혀 있는 시보다는 안을 향해 열려 있기를 꿈꾸는 그의 시는 자기 자신을 꼬집으며 삶의 쓸쓸함에 대해, 고요에 대해, 우리를 글썽거리게 하는 것들에 대해 가만가만 중얼거린다. 인간의 의지라든가 다짐, 그리움, 절실함 등을 모두 포기하고 적멸의 세계에 젖어드는 자아의 내면을 점묘한 그의 명상적 어법 속에는 시선의 경계를 초월하는 그리움, 어떤 것으로도 충족되지 않는 도저한 그리움, 그러한 강인한 그리움의 지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완강한 한계의식이 드러난다. 이러한 한계의식은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보이도록 눈물 글썽한 그의 시선으로 이어지고 그리하여 내팽개치고 싶은 과거도 지루한 일상도 그의 시선을 통해 단단하게 빛나는 한 편의 시로 탄생하는 것이다. 탁자 위의 물방울이 마른 흔적 같은 시 쓰기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저 물 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모은다는 것을/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간이듯/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고 있다/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전문 이 한 편의 시는 존재와 흔적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물위에 번지는 파문은 흔적 그 자체이며 그것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부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지만 그전에 명확한 무엇이 존재했다는 것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파문을 일으킨 나뭇잎을 두고 보면 그 나뭇잎은 한 나무의 뿌리에서 퍼져나가 저마다의 가지에 매달려 자신의 육체를 드러내던 존재들이다. 각각의 나뭇잎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고 무작정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흔들리게 되는 필연적 근거를 갖고 있다. 이것은 존재와 흔적이 상대의 일부를 자기 것으로 수용하는 상관성을 형성한다. 움직임이나 흔들림은 정지의 연속 형태라는 동일한 위상에 놓이며 물위에 떠 있는 나뭇잎이건 물위에 일어나는 파문이건, 모든 움직임과 그 자취는 존재의 뿌리에 연결되어 있다("저 나뭇잎의 고요는/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고 있다"). 이는 흔들리는 나뭇잎이건, 떨어진 나뭇잎이건, 나뭇잎이 일으킨 파문이건, 파문조차 사라진 흔적이건, 그 유형 무형의 물상들은 다 뿌리를 지니고 있고 뿌리의 근원에는 존재자의 숙명적 비애가 내포되어 있다는 시인의 내면세계를 나타내는 증거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허무주의만을 피력하는 것은 아니다. 절구통만한 먹이를 문 개미 한 마리/발 밑으로 위태롭게 지나간다 저 미물/잠시 충동적인 살의가 내 발꿈치에 머문다/하지만 일용할 양식 외에는 눈길 주지 않는/저 삶의 절실한 몰두/절구통이 내 눈에는 좁쌀 한 톨이듯/한 뼘의 거리가 그에게는 이미 천산북로이므로/그는 지금 없는 길을 새로 내는 게 아니다/(……)/모두 오체투지의 생애를 살다 가는 것이다//그 경배를 짓밟지 마라 ―[개미] 중에서 시인은 시행을 열어두고 상상의 여백을 남겨두던 그의 작법과는 매우 다른 종결법인 "그 경배를 짓밟지 마라"라는 구호적인 어구로 시를 끝맺었다. 모든 존재가 소멸로 귀결되는 것을 그대로 수락하던 시인이 삶의 절실한 몰두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물방울 같은, 좌절된 열망의 흔적"이라 정의한 시쓰기는 이제 흔적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서 의미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