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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우아하기 짝이 없는
정경훈
시인동네 2021.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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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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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부

패러독스 · 13
오로라 · 14
13월 11일의 나체 · 16
말아다오 · 21
나는 요 며칠간 제대로 된 시를 쓰지 못했다 · 24
젊은 이안소프의 슬픔 · 27
이름을 좋아해 주세요 · 28
이름을 기억해주세요 · 30
이월 이십팔일 · 32
나는 어디선가 그대의 이름을 부른다 · 35
그대는 어디선가 나의 이름을 부르고 · 36
이월 이십구일 · 38
타투이스트 · 42
은밀하게 · 43
파리를 가지 못한 젊은이의 몽정 · 44
그 핵 · 46
이월 삼십일 · 50
블루문 · 52

제2부

백야 · 55
스코츠보로 소녀들 · 56
달나라 · 60
들개 · 62
대배우와 앵무새의 희곡 · 70
너는 연민의 힘 · 74
음악이 있다면 영원히 · 75
해마의 실업: 바그다드 카페에서 · 76
자화상 · 81
가시는 좋아해 주지 못하나요 · 82
헤아릴 수 없는 · 84
오 ː이 · 87
동숭동 · 90
시대의 몰락에게 키스를 · 94
내 애인의 시집 · 100
:) · 104
두 번째와 첫 번째 사이 · 106
아인슈페너 · 108

제3부

찔레꽃 · 113
마로니에 공원 · 114
프롤레타리아트의 먹이사슬 · 116
알레고리의 아홉 번째 궤도 · 119
이성과 감성 사이의 블록 · 122
뱅쇼 · 124
ㄱ과 ㄹ을 기억하는 곳에서 · 127
Been · 130
Est―Ce―Que · 134
동부 이촌동 · 137
이마에 앉아서 하는 사랑 · 140
퇴적장 · 143
08 · 146
투 써머 · 148

해설
고봉준(문학평론가) · 149

저자 소개 1

199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6년, 10년 넘게 해온 축구를 그만두고 시를 썼다. 그라운드를 뛰던 지난날보다 더 숨 가쁘게 살아내고 있다. 불완전하지만 불안하지는 않은 하루하루를. 끊이지 않는 질문과 사유를 기록하며 내면의 자신과 동행하고 있다. 연남동과 동교동 일대의 다양한 공간에서 글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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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2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68쪽 | 153*225*20mm
ISBN13
9791158965037

책 속으로

백수는 사랑을 하고
사랑은 백지를 탐하게 하고
백지 안에서는 사랑을 꾸며 써야 하고
그럼에도 은유하지 않고 사랑의 시를 쓰고
(이것은 과연 감탄할 기백인가 알량한 고집인가)
시는 이렇게나 믿을 만한 것이 없고
믿음이 없으면 배반을 하게 되고
배반은 한평생 백수처럼 할 짓이 못되고
할 짓이 없으면 혼자임을 구걸하고
구걸은 울부짖는 혼자가 되고
혼자는 요컨대 백수임이 틀림없고
그러다가 백수가 백수가 아니게 되면
(이 시는 짧게 끝나야 한다)
사랑을 시인하게 되고
---「패러독스」중에서

이른 아침,
뜨면서도 감습니다 좋아하는 이름이 많아서, 좋아할 수 없는 이름이 적지 않아서 각막의 기지개를 유예합니다
기상을 하면 수많은 이름들이 커튼에서 새어 나옵니다 ㄱ부터 ㅎ까지, 다다한 그대를 나열한 뒤 암묵적으로 밀폐된 침실에서 과거를 뒤척입니다 A부터 Z까지, 다 알지 못하는 그대를 외우며 딱딱하고 말랑한 두뇌를 뜯어봅니다 그대와 저는 가학을 생성하고 서로의 치부로 고통을 주며 연연하도록 노력합니다 치고 박고 싸우지는 않지만 침대만 있다면 그대는 이길 것처럼 서 있고 저는 질 것처럼 엎드려 있습니다 그대가 승자이고 제가 패자라면, 그대와 저는 성공과 실패 안에서 넣고 싸고 했던 이름들처럼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오열처럼 맥없이 폭발할 것만 같습니다 그대는 그곳에서 밥을 먹었고 저는 그곳에서 밥을 뱉었습니다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그대에게 담아 보낼 글자들을 지어봅니다 수많은 문장들이 김을 피우고, 이중 여럿은 증발하고 몇 개는 그대에게로 보내집니다 증발한 것은 묵은 때처럼 막막하게 양심으로 배겨집니다 무탈하게 보내진 문장들을 이끌며, 저는 이토록 울컥합니다 취침에 들어서도 수많은 이름들을 부른 탓에 동굴에서 재해들이 굴러다닙니다 닦고 헹궈도 아무렴 편안해지는 것은 없습니다 소실되지 않는 모순들이 빛깔 좋게 붙어 있습니다 그대의 건치를 떠올리며, 저의 고르지 못한 치아를 고문하며 이른 아침부터 불러야 할 이름들 때문에 닥치고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그대의 숨이 바빠지면…… 심장을 반으로 갈라 같은 박동으로 죽고 싶습니다
---「이름을 좋아해 주세요」중에서

그대는 나의 남자친구
나는 그대의 몸을 좋아하는 게 아니란다, 나는 그대의 본디를 좋아하는 거야, 자꾸 어디 가려고, 나가 놀고 싶어서 그렇게 육체를 뒤척이나, 그대는 자발적으로 악몽을 꾸고 나는 그런 그대를 보며 하염없이 코를 찡찡이기만 하지, 그대는 어린 계집들이랑 골반을 맞잡고 싶구나, 춤도 그런 춤이 아니라 애욕적이고 사사로운 아우성의 춤을 추고 싶은 거구나, 그대는 술을 먹고 싶은 거구나, 새롭고 낯선 계집들과 눈동자를 보며 건배를 하고 싶은 거구나, 혹시 그대, 자주 자고 자주 일어나던 파트너도 보고 싶은 거니, 그대는 섹스를 하고 싶은 거구나, 그대는 나의 남자친구고 나는 그대의 하나뿐인 연인이거늘, 그대는 자꾸 어딜 가고 싶은 건지, 만나지 마, 아니 그대, 나 말고 다른 계집들이랑 만나지 말라고, 나는 나를 지키고 싶어,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줘, 나를 처량한 암코양이 한 마리로 유기하지 마…… 응?
그대, 가끔 시발놈이라고 불러도 될까?
---「나는 어디선가 그대의 이름을 부른다」중에서

다리가 부서지는 사람이 지구를 차려고 한다

열렬해지면 주전자에서 김이 빠진다 부엌이 소란스러워지면 그의 마음 또한 수군거린다 그는 너무 메말라 금방이고 비약할 것만 같다 그는 너무 길어서 반 토막이 되어 단명할 거 같다 그는 너무 대단해서 모조리 파생되는 사람으로 기억될 거 같다 내 둔전이 그에게로 향하면 나는 그의 종아리가 되어 결사를 두둔한다 그는 참 젊고 결코 강건하지 않아서 나를 대여해 주고 싶고 기꺼이 반납을 거부할 수도 있겠다 그의 하와이안 조명 덕에 가난한 밤의 거실에서 부유한 낮의 왕실로 당도할 수 있었다

성립되지 않는 연민도 나의 힘이다
---「너는 연민의 힘」중에서

비둘기가 고개를 둘러대고 있다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치고 그렇게 뒤를 돌아보면 비둘기는 백색이었다
날아오른다
말끔하게 바둑돌을 부리에 물고

다시 날아오른다 그 사람의 발길질 때문에

핫도그 가게 앞에만 서면
폭력의 재해가 맴돌았던 예술들이 매대에 놓여 있다
그 역사를 전범하는 희극이 소시지처럼 숨어 있다
이모, 설탕 묻혀주세요 케첩 이거 쓰면 되는 거죠
누군가는 밀고에 의해 누군가는 이모의 권력에 의해
핫도그를 사 먹는다

이토록 간단한 과정이었으나
씹히지 않는 대물림은 구역질을 일으키기에
내 옆과 나와 너는
핫도그를 겨우 사 먹어야 했던 가난한 자였으리라

날아갔던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고
그 발길질이 예술가였음을 빙자하였으니

예술이라는 건
무엇보다 무거운 탓에 내려놓지 못하는 것
가라는 건
가야 할 길을 잃어서 갈 곳이 없다는 것

이모, 요즘 들어 핫도그가 작아진 건 왜일까요

---「마로니에 공원」중에서

출판사 리뷰

정경훈의 시는 2인칭, 그러니까 ‘당신’이나 ‘너’를 향한 발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시집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연쇄적인 진술, “백수는 사랑을 하고/사랑은 백지를 탐하게 하고/(…중략…)/사랑을 시인하게 되고”(「패러독스」)에서 확인되듯 이 ‘백수·사랑·백지·시인’은 패러독스한 세계 안에서 의미의 계열을 형성하고 있다. ‘사랑’은 ‘백지’, 즉 발화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사랑을 시인하게” 되는 단계까지 데려간다. 이때의 ‘시인’이라는 기호는 두 번 읽어야 한다. 한번은 ‘시인(admission)’으로, 또 한 번은 ‘시인(poet)’으로. 분명한 것은 2인칭 ‘당신’이나 ‘너’와의 관계인 ‘우리’가 ‘사랑’, 즉 ‘the love’(「13월 11일의 나체」)라는 기호로 집약된다는 것이다.

시인이 ‘시인(admission/poet)’하는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오로라」에서 시인은 ‘당신’이 있어서 “울다가 웃다가 혹은 울거나 울지 않거나”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상”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당신과 함께” 떡볶이를 먹고, 국을 끓이고, 오이를 깎고, 설거지를 하는 “뻔한 과정”을 머릿속에 그려보다가 불현듯 시인은 “우리의 아름다운 것이 무서”(「오로라」)움을 깨닫는다. 아름다운 것은 왜 무서워지는 것일까? ‘사랑’이라는 사건이 무섭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것이 끝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13월 11일의 나체」에서 화자는 “안녕, 안녕 이 더러운 사랑아”라는 진술처럼 ‘the love’, 즉 사랑을 잊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사랑 빼고는 남는 게 없으니까, 사람을 버릴 수 있었던 거야 숫제 너 하나가 문제다 너 하나가 내 세계를 가난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너 하나를 사랑해서 내 세계가 행복에 겨운 거다 물리적으로 고통을 받아야 변화하던 내가, 너 하나로 족히 거룩해지니, 본디 성체로 거듭난 것만 같다 조물주가 된 것만 같이, 세렝게티의 하이에나가 된 것만 같이, 일루미나티의 광추가 된 것만 같이, 책망은 더 이상 나의 성질이 아닌 것처럼, 나는 좀처럼 빗겨 나간다 화학의 주의를 오용하지도 남용하지도 않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너 하나가 가히 메토이소노를 이룬 것이다 아아, 종교가 무슨 필요가 있어 믿음으로 세상을 직시하는 것이, 윤회를 바라며 고즈넉이 귀의하는 것이, 자연을 먹고 단식을 하고 돼지를 살생하고 모가지를 바치는 일들이 내 세계에 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중략…)

방만했던 너 하나를 질투했고 미욱했던 나의 행성을 선회하며, 우회하고 망설이다가 돌고 돌아 만났다 세계를 열거하고 손바닥을 마주치며, 너 하나에게 향응하며 손톱을 갉는다 너 하나 때문에 여자를 증오할 줄이야, 너 하나 때문에 남자를 저주할 줄이야, 너 하나 때문에 살인을 계획할 줄이야 이로써 내 세계에 남아 있는 건 불가하다 불가능하고 여지도 없으며 오롯한 불능이다 그렇다면, 너 하나는 도대체 무엇이냐, 대지의 종말에게 인류애의 멸종에게 필사하여 잉태를 뿌리는 연유가 무엇이냐, 자주적인 너 하나에게 기거하는 너 하나에게 변명을 착상하며 언어를 지어보다가, 너 하나가 남겨졌다는 것이 바로 무진장이었음을 깨닫고야 만다 사람은 버렸다 해도 사랑은 버릴 수가 없었어, 아직까지 명치가 헛헛하다 딱딱하게 살아내서 유연하게 사랑하고 싶었어, 아직은 척추가 떳떳하다 너는 언젠가 사랑해를 뱉고, 나는 여전히 좋아해를 얼버무린다
― 「이월 이십팔일」 부분

정경훈의 시에서 ‘사랑’은 절대적인 사건이다. 이 시에서 ‘사랑’은 ‘너’와의 관계이고, ‘너’는 ‘너 하나’라는 표현처럼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단독적인 존재이다. 사랑이란 무수한 ‘너’와의 관계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너’와의 관계이기에 특별한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너’는 “너 하나가 내 세계를 가난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너 하나를 사랑해서 내 세계가 행복에 겨운 거다” 같은 진술처럼 ‘나’의 운명을 좌우하는 존재이다. ‘너 하나’로 인해 ‘나’는 거룩함을 느낀다. ‘너 하나’로 인해 ‘조물주’가 되고, “세렝게티의 하이에나”가 되고, “일루미나티의 광추”가 된다. “물리적으로 고통을 받아야 변화하던 내”가 ‘너’로 인해서 고통 없이도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리고 그 경험이야말로 ‘사랑’의 위대함이 아닐까.

‘나’에게 있어서 ‘너’는 메토이소노(Metoisono, 聖化), 곧 이상적인 인간이자 성스러운 존재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에서 주인공 조르바는 완전한 자유인을 꿈꾸는 인물이다. 메토이소노는 바로 그가 갈망했던 자유인의 이상적 존재이다. 메토이소노는 물리적·화학적 변화가 아니라 영혼과 정신의 변화이다. 포도가 포도주가 되는 물리적·화학적 변화가 아니라 상징(象徵)이 되는 변화, 결국 메토이소노는 영혼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화학의 주의를 오용하지도 남용하지도 않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너 하나가 가히 메토이소노를 이룬 것이다”라는 시인의 진술은 이러한 영혼과 정신의 변화를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성화(聖化)는 ‘종교’와는 별개이다.
― 고봉준(문학평론가)

시인의 말

웅, 그래도 내일은 오더라

세상이 더럽기 짝이 없어도
우리의 얼굴을 바라봐 주자
아름답고 우아하면 된 거라고
마음을 이어 잡아보자

마음속 작고 깊은 숲에 이른 내 친구들에게 고마워
이곳에서 살다 어제처럼 떠난 사람들에게도 고마워
자꾸 말하면 닳겠지만 진심은 닳지 않는다

언젠가는 닿을 거라 믿으며, 고마워

2021년 2월
정경훈

시인의 산문

만약 아직까지 시가 존재한다면,

이런 이야기들은 검붉은 과실처럼 쉽게 삼키지 못하고
너와 나의 이야기는
죽고 싶을 만큼 떫었던 이야기와
살고 싶어서 감 껍질을 먹었다는 이야기이고
너의 손목에 그어진 줄은 분명 구절의 밑줄일 거라는
이야기일 것이며
탄닌감이 미네랄틱 해서 좋았다는 너의 이야기에
피니시가 버터리 해서 좋았다고 받아친 나의 이야기는
부드럽게 때로는 느끼한 만큼 오래도록
너의 통곡 뒤에 평안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이야기였고
오크 향이 맴돌다가 가죽 향이 났다기에
우리는 말을 멈추고 구두끈을 조였지

친구,
아직까지 시가 존재한다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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