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물질하는 동안에 엄마는 테왁을 끌어안고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들어간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짙고 깊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 둘, 셋, 넷,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어린 엄마가 셀 수 있는 숫자가 다 지나가고도 바다는 조용했다. 파도만 처얼썩 치고 사방이 고요했다. 처얼썩 처얼썩. 파도가 자꾸만 가슴을 때리는 바람에 울 것 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 엄마는 눈을 감고 처음부터 다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 p.9, 「프롤로그 : 짠맛이 나를 키웠다」 중에서
자장가 같은 노래를 불러주며 나의 배를 만져주던 엄마의 보드라운 손바닥. 속이 쓰리거나 탈이 났을 때, 엄마는 나를 솜이불에 눕히고 손바닥으로 배를 쓸어주었다. 동그랗게 손바닥 온기가 스미면 아픈 배는 꿀렁이며 움직이기도 하고 쿠루루루 소리를 내기도 하다가 차츰 잠잠해졌다. 따스해졌다. 그러면 나는 아픈 것도 잊고 잠이 들었다. 엄마 손바닥에 배를 맡긴 그 시간이 좋아서, 조금만 꾸룩거려도 조로로 달려가 배를 까고선 엄마 앞에 누웠더랬다.
--- p.19~20, 「엄마 손바닥 같은 가재미」 중에서
살면서 한 번이라도 이런 음식을 만나본 사람은 알 것이다. 특별할 것 없는 음식이 평생 기억에 남은 이유가 단순히 맛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어떤 음식은 손으로 만드는 위로 같다. 재료를 구하고 씻고 다듬고 만들어 전하는 수고로움과 누군가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이 한데 섞인 맛깔스러운 위로. 그런 음식을 입으로 넘겼을 때 나는 처음으로 미음을 먹어본 아기처럼 살아갈 힘을 얻었다. 그저 고맙습니다, 인사하며 울 것 같은 마음으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세상에는 이런 음식도, 이런 위로도 있다.
--- p.48~49, 「아랫집이랑 나눠 먹으렴」 중에서
그러나 그 후로도 나는 자주 부엌에 서서 밥을 먹었다. 아이 둘 홀로 육아하며 나까지 챙기기에는 시간과 체력이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번씩은 나를 위해 따뜻한 국을 끓여보고 고등어도 구워보았다. 집이 좁고 혼자 밥 먹는다고 불평하기에, 누군가 나의 수고를 알아주길 바라기에, 누가 해주는 밥이 그립다고 슬퍼하기에, 먹고사는 일상은 하루하루가 반복. 지겹고 지루했다. 먹고 돌아서면 또 배고프고. 밥을 지어 먹이고 먹으며 다시 힘을 내야 했다. 놀랍게도 살아가는 일의 절반은 밥을 지어 먹는 일이라는 걸 아이들 키우면서 깨달았다. 그러니 제대로 힘내서 살아가려면 나 스스로를 잘 챙기는 수밖에.
--- p.91, 「서서 밥 먹다가 엄마에게 혼난 날」 중에서
“딸, 잘 들어라. 잘 들으래도 너는 듣지 않겠지만. 인생이 그렇다. 부모가 중요하다고 여러 번 일러줄 때는 귀찮고 부아가 나서 잔소리라고만 여겼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새록새록 중요하게 느껴지고 중요하게 나타난단다. 그걸 깨닫고 배우고 싶어서 달려가면 부모는 없어. 그 맛도 이미 없고. 그게 얼마나 허망한 마음인지 아니.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부모가 중요하다 하는 것들에 대해 조금은, 아니 조금만 너그럽게 돌아봤으면 좋겠어. 엄마가 살아 있을 때 말이야.”
--- p.99~100, 「엄마가 쥐여준 보따리를 먹기만 할 때는 몰랐지」 중에서
혀는 맛을 기억했다. 소금, 설탕, 다진 마늘, 깨소금, 식초, 간장, 참기름, 매실액 같은 것들을 조금씩 넣어보다 어느 순간 동생이랑 나는 엄마가 해준 집밥 맛을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손가락으로 한 꼬집 넣고서 조물조물 버무려 한입 와아암. 그래, 이 맛이야! 외치는 순간이 어찌나 뿌듯한지. 뭐라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딱 맞는 간을 우리는 똑같이 찾아냈다. 세상에 같은 맛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식사는 즐거웠다. 아무리 오래 아무리 멀리 떨어져 산다 해도 ‘맛있다’라는 어떤 맛을 똑같이 알아보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 p.109, 「혼밥생활자들의 집밥」 중에서
할머니는 처음 말린 예쁘고 좋은 오징어들은 팔지 않았다. 예쁘고 예쁜 것들만 골라 묶어서 딸들부터 챙겼다. 멀리멀리 시집간 딸들에게 해마다 첫 오징어를 보내주었다. 덕분에 나는 꼬꼬마 시절부터 오징어를 쫀드기처럼 질겅거렸다. 딱딱하고 짠 오징어는 씹으면 씹을수록 침이랑 뒤섞여 짭짤한 바다 맛이 돌았다. 일일이 깨끗이 손질하고 빳빳이 늘린 손길의 맛이었을까. 뜨고 지는 햇볕을 머금고 바닷바람이 도닥거린 시간의 맛이었을까. 오래 매만져 굳세어진 짠맛이 나를 씩씩하게 했다.
--- p.132~133, 「할머니의 빈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