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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붉다 13/내 안의 나 14/먼지처럼 15/안심 16/나비 18/소통 19/태풍 20/누름돌 22/전동성당 23/용서 24/쉬엄쉬엄 26/비움 28/돌아오기 위해 떠난다는 29/죄 30/나무와 까치 32 제2부 미역국 35/사회적 거리 36/바다와 파도 38/신발 40/도보다리의 증인 41/삐걱 42/집 44/하늘 45/생각을 그리다 46/월남치마 48/일기예보 50/키스 51/녹두꽃 52/이모 54/꿈 56 제3부 의자 59/양은냄비 60/싸리 채반 61/수평선 62/이명 64/출판기념회 66/다물다 67/반품 사절 68/관계 70/소리를 훔치다 72/벌벌 73/옛 친구 74/삥땅 76/곰삭다 78 제4부 개명(改名) 81/점(點) 82/가상 인간을 사랑하여 84/고통이 고통에게 86/풍금 소리가 들리는 몽돌 87/옷장 속의 전설 88/전주천 90/앵두 92/호박잎 된장국 93/섬진강 94/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96/악성종양 98/이팝꽃 100 해설 인생길에 관한 처연한 고찰/안성덕(시인) 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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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도 끝에
채운다 빈듯하던 꽉 채운 물항아리가 비로소 텅 비어 충만하다 들릴락 말락 신의 음성 손에 쥔 먼지도 놓고 가라는 말씀 --- 「비움」 중에서 한낮 마당에 없던 그림자가 얼씬거린다 해고당했다는 말 없었지만 뜨끔하다 일없이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일자리 해결” “코로나 쉼쉼 경영” 쉼쉼 백신 처방에 밑줄 긋는다 4일 근무에 3일 쉰다는 3일 일하고 4일 논다는 말 안심이다 코로나 쉼쉼, 월화수목 뼈 빠지고 금토일 또 쌔 빠진 네겐 특별휴가 아니겠냐 네 그림자의 양어깨가 수평을 잃었구나 그래 쉼쉼 아니 쉬엄쉬엄, --- 「쉬엄쉬엄」 중에서 진도 맹골죽도 갯바위 돌미역은 낫 자국이 있다 미역귀에서는 거친 파도 소리가 난다 따개비처럼 바위에 붙어살았다 파도인 양 바람인 양 평생 갯바위와 한 몸이었다 물고기처럼 바닷물에 젖어 있는 김서운 할매네 돌담 아래 세워둔 김발, 핏빛 노을이 물들고 있다 맹골죽도 사람들 날마다 미역국을 끓이는 건, 살아남은 그날 그날이 생일이기 때문이다 --- 「미역국」 중에서 코로나19 진단검사 후 날짜가 잡혔다 보호자는 한 명, 간호는 아들에게 맡기고 네온사인 화려한 모텔에 들었다 사회적 거리? 침대와 침대 사이가 멀다 남편 퇴원 후, 양지바른 101동 대추나무와 목련 사이가 사회적 거리인 걸 알겠다 백목련 마른기침에 대추나무 잔가시 움츠리고 서로 밟지 않을 거리에서 비바람에 흔들려도 팔 닿지 않을 음압 격리병실처럼 침묵은 생존이다 서로 찌르지 않고 찔리지 않아야 저 대추 곱게 붉어질 것이다 나와 남편 딱 그만큼의 거리로 떨어져 익어왔음을 알겠다 침대와 침대가 너무 멀다 --- 「사회적 거리」 중에서 찌그러진 것은 나이테다 부글부글 밥을 끓이며 보글보글 찌개를 끓이며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 하루에도 세 번씩 달아올랐다 탄내 나는 밥보다 속이 더 새까맣던 시절, 세상은 언제나 설익었다 찬장 아래 쥐구멍에 기어들고만 싶었다 연중행사로나 끓이던 삼계탕 속 닭인 듯, 멀쩡한 날개로 날지 못했다 뚜껑부터 들썩거리던 일용할 밥이 되고 국이 되던 찌그러진 양은냄비, 반백 년 버리지 못했다 눌어붙은 이력 지워지지 않았다 양은냄비처럼 찌그러져 쉬 끓고 금세 식던 시절이 있었다 엿이나 바꿔 먹을 걸, 쓸데없이 귀는 밝고 눈 어둔 시절이었다 --- 「양은냄비」 중에서 내 안의 내가 폭발한다 성경 속 갈등 꾹꾹 눌러 열두어 가마 피 끓는 공적 예닐곱 권 가슴에 박힌 상처가 너무 많아 주엽나무처럼 가시를 품고 산다 소리 없이 박힌 못 밤새도록 뽑아내고 나니 피눈물이 두 됫박 후들후들 들숨 날숨 가빠진다 왼뺨과 오른뺨을 채반에 올려놓고 바짝 말린다 가시가 돋는다 가시는 뾰족해지고 용서는 작아진다 갈기갈기 바람을 찢는 내게 폭발한 내 안의 내게 밑줄 그어놓은 말씀 한 구절 담아 보낸다 옆구리 통증도 끼워 보낸다 “반품 사절” --- 「반품 사절」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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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점(點)은 원고지에 옮길 수 없는 가상적 존재, 손바닥에 점을 찍는 순간 점이 아닌 면으로 보일 때가 있다. 세월에 덴 흔적은 끝내 지워지지 않는 주름이 되었다. 아름다운 무늬로 변신하고 싶었지만…… 내 시는 파편화된 감정이 서로 엉킨 점의 집합이다. 2021년 8월 이소애 해설 엿보기 이소애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을 상재했다. 『수도원에 두고 온 가방』(2018, 문학의전당) 출간 후 3년 만이다. “랭보가 말한 견자(見者)의 경지에 이르러 무의식의 인식을 건너 경계를 넘나들고, 변용하고, 역설하며, 수직의 불상들을 수평으로 눕혀 전 생애로 굽이치게 하는 영성의 바다를 창조”한다는 평을 받은 후 그의 시력은 더 멀어졌다. 사유는 더욱 깊어졌다. 시류와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재촉하지 않고 ‘쉬엄쉬엄’ 제 길을 간다. 가던 길 멈추고 왔던 길 뒤돌아본다. 야생화를 좋아했다 구속과 해고의 바람을 견뎌온 나비 한 마리 허공을 간다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 공장 마당을 나풀나풀 날고 있다 복직은 울 너머 장다리 밭 같은 것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 나비 한 마리 평생 헛발을 딛고 날았다 운명처럼 허공을 딛어야만 했던 나비 한 마리 꽃잎처럼 졌다 짧으나 짧은 봄볕을 헤치고 울 너머 간다 --- 「나비」 중에서 나비로 상징된 삶이 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 어디 있으랴, 그도 나비처럼 “야생화를 좋아했다”. 그러나 수상한 세월 탓에 “구속과 해고의 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나비는 나풀나풀 우아하게 날지 않는다. 날 수가 없다. 허공을 딛고 꺼질 듯 꺼질 듯 한 걸음, 한 걸음 날아간다. 허공을 딛는 걸음이 편할 리 없다. 나비처럼 “평생 헛발을 딛”는 자에게 시절은 엄혹하다. “울 너머 장다리 밭”엔 꽃이 피었을 봄이지만, 세상은 언제나 신기루 같다. 죽을 둥 살 둥 금은보화가 그득하다는 무지개 끝에 찾아가 봐도 무지개는 또 멀어지듯, 그렇게 평생 “헛발을 딛고 날았다”. 알에서 애벌레로 번데기로 나비로 이어지는 나비의 길이야 한 해에도 몇 생이라지만 어디 사람의 평생이 그러하랴. 장다리 밭 찾아 울 넘어가지 못한 나비 한 마리 “꽃잎처럼 졌다”. “짧으나 짧은 봄볕을 헤치고/울 너머 간다”. 나비가 된 그가, 살아서 되돌아가지 못한 “공장 마당을 나풀나풀 날”아가고 있다. 지고 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마라, 했건만 사람의 평생이 어디 그렇던가. “소리 없이 박힌 못/밤새도록 뽑아내고” “피눈물”(「반품 사절」)을 흘리며 또 길을 가는 게 인생이다. “이정표 없는 먼 길에 풀풀/흙먼지 날”(「삐걱」)리며 간다. 숙명처럼 길 위에 서 있어야 할 인생, 길 아닌 허공에 길을 내고 간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더라. 다음 생은 나비로 오지 마시라, 나비여. - 안성덕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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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던가? 가는 세월은, 시쳇말로 유수와 같다는 세월은 문학의 대표적 소재다. 어쩌랴, 세월이 가면 사람도 따라가야 하건만, 몸이 가면 마음도 따라가야 하건만, 세월 따로 몸 따로요 몸 따로 마음 따로니 멀미가 날밖에. 그러니 당연히 야속한 세월이나 탓하는 수밖에. 멀미라는 게 두 물체 사이의 속도 차이 아니랴, 간극 아니랴. “흐릿흐릿 흔들리며 노인이 간다/신발이 끌고 간다”(「신발」). 신발이 세월을 잊지 못하는 노인을 끌고 추억 속으로, 길 속으로 간다. 천관녀를 찾아간 김유신의 말처럼 간다. 그렇게 이소애 시인의 시는 간다. “마음속 마른 잎맥의 고요를 꺾”(「붉다」)으며 간다. 이 시집 『쉬엄쉬엄』은 노을 따라 붉을 줄 아는, 열심히 길을 걸어온 자만이 체득할 수 있는 인생에 대한 작은 고찰이자 혜안이다. - 안성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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