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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고라니ㆍ13/원고지의 힘ㆍ14/자화상ㆍ16/사랑ㆍ17/아무도 오지 않는 오후ㆍ18/너……라는 벼락을 맞았다ㆍ20/개꿈ㆍ21/물끄러미 칸나꽃ㆍ22/달 속에 달이 기울 때ㆍ24/칡 캐러 간다ㆍ26/파경ㆍ27/폭낭ㆍ28/배꼽이 명함이다ㆍ30/반딧불이ㆍ32 제2부 못ㆍ35/삼겹살에 대한 명상ㆍ36/황야의 건달ㆍ38/화살ㆍ40/그림자ㆍ41/평발ㆍ42/이사ㆍ44/천사보육원ㆍ46/이미지ㆍ47/떠들썩한 슬픔ㆍ48/돼지의 무기ㆍ50/건달의 슬픔ㆍ52/고욤나무집 사내들ㆍ54/상처ㆍ56 제3부 킥킥, 유채꽃ㆍ59/햇발국수나 말아볼까ㆍ60/눈물은 힘이 세다ㆍ62/큰곰자리별 어머니ㆍ64/벅수야! 벅수야!ㆍ66/음복(飮福)ㆍ68/인절미ㆍ69/망령 난 봄날ㆍ70/코스모스ㆍ72/목련여관 304호ㆍ74/꽃들은 입을 다문다ㆍ75/추석 전야ㆍ76/아버지의 안전벨트ㆍ78/확인ㆍ80 제4부 마제잠두ㆍ83/은자(隱者)ㆍ84/북청전당포ㆍ86/개구리ㆍ88/구름의 종점ㆍ89/슬픈 호사(豪奢)ㆍ90/칼날 잎사귀ㆍ92/속죄ㆍ94/팔랑팔랑ㆍ95/함부로 그늘을 엿보다ㆍ96/오직 한 갈래ㆍ98/토종닭집 감나무ㆍ99/바람의 꽁무니를 따라 걷다ㆍ100/눈사람의 귀환ㆍ102 해설 박동억(문학평론가)ㆍ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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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술렁거리는 밤이었다
수수깡이 울고 있었다 문득, 몹쓸 짓처럼 사람이 그리워졌다 모가지 길게 빼고 설레발로 산을 내려간다 도처에 깔린 달빛 망사를 피해 오감만으로 지뢰밭 지난다 내 몸이지만 내 몸이 아닌 네 개의 발이여 방심하지 마라 눈앞에 있는 올가미가 눈 밖에 있는 올가미를 깨운다 먼 하늘 위에서 숨통을 조여 오는 그믐달 눈꼴 언제나 몸에 달고 살던 위험이여 누군가 분명 지척에 있다 문득 몹쓸 짓처럼 한 사람이 그리워졌다 수수깡이 울고 있었다 --- 「고라니」 중에서 원고지를 놓고 막상 책상에 앉고 보니 무엇을 쓸 것인가 그대에게 못다 한 진정의 편지를 쓸까 하늘에게 사죄의 말씀을 쓸까 달리의 늘어진 시간에게 안부나 물을까 막상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 지난여름 내게만 사납게 들이치던 장대비가 원고지 칸과 칸 사이를 적시고 목적지도 없는 폭풍의 기차가 지나간다 기차가 끌고 가는 기―인 강물 위 빠져 죽어도 좋을 만큼 깊고 푸른 달이 반짝 말라비틀어져 비로소 더욱 눈부신 은사시나무 잎이 떨어진다 지난 과오가 떠오르지 않아 얼굴 붉히는 밤 수천 마리 피라미 떼가 송곳처럼 머릿속을 쑤신다 눈에 보이지 않아 더 그리운 것들 원고지를 앞에 놓고 보면 분명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 그 전부가 그립다 --- 「원고지의 힘」 중에서 날개가 불이라서 뜨겁니? 아님 네 한 몸 다 불살라야 닿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나라가 있니? 기어이 처음 그날처럼 기어이 홑겹의 날개 위에 평생 지울 수 없는 문신을 새기며 상처에 불을 밝히며 저 텅 빈 날갯짓으로 날아가는 너는 누구의 영혼이니? --- 「반딧불이」 중에서 어쩌다가, 어쩌다가 몇 달에 한 번꼴로 들어가는 집. 대문이 높다. 용케 잊지 않고 찾아온 것이 대견스럽다는 듯 쇠줄에 묶인 진돗개조차 꼬리를 흔들며 알은체를 한다. 짜식, 아직 살아 있었냐? 장모는 반야심경과 놀고 장인은 티브이랑 놀고 아내는 성경 속의 사내랑 놀고 아들놈은 리니지와 놀고 딸내미는 딸내미는, 처음 몸에 핀 꽃잎이 부끄러운지 코빼기 한번 삐죽 보이곤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다. 그나마 아빠를 사내로 봐주는 건 너뿐이로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고 황송하구나, 예쁜 나의 아가야.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식탁에 앉아 소주잔이나 기울이다가 혼자 적막하다가 문득, 수족관 앞으로 다가가 큰소리로 인사를 한다. 블루그라스야, 안녕! 엔젤피시야, 안녕! 너희들도 한 잔 할래? 소주를 붓는다. --- 「황야의 건달」 중에서 가늘고 고운 햇발이 내린다 햇발만 보면 자꾸 문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종일 들판을 헤집고 다니는 내 꼴을 보고 동네 어른들은 천둥벌거숭이 자식이라 흉을 볼 테지만 흥! 뭐 어때, 온몸에 햇발을 쬐며 누워 있다가 햇발 고운 가락을 가만가만 손가락으로 말아가다 보면 햇발이 국숫발 같다는 느낌, 일 년 내내 해만 뜨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면 그럼 모든 것이 타 죽어 죽도 밥도 먹지 못할 거라고 지나가는 참새들은 조잘거렸지만 흥! 뭐 어때, 장터에 나간 엄마의 언 볼도 말랑말랑 눈 덮인 아버지 무덤도 말랑말랑 감옥 간 큰형의 성질머리도 말랑말랑 내 잠지도 말랑말랑 그렇게 다들 모여 햇발국수 한 그릇씩 먹을 수만 있다면 눈밭에라도 나가 겨울이 되면 더 귀해지는 햇발국수를 손가락 마디마디 말아 온 세상 슬픔들에게 나눠줄 수만 있다면 반짝이는 눈물도 말랑말랑 시린 꿈도 말랑말랑 --- 「햇발국수나 말아볼까」 중에서 철길인 줄 모르고 꽃을 피웠다 민들레 노란 입술에 까맣게 때가 묻었다 날려 보내야 할 홀씨마저 까맣게 때가 묻었다 너에게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스스로 꽃못이 된 꽃모가지 벼락 맞은 꽃모가지 레일을 베고 잠이 든다 --- 「자화상」 중에서 |
어떤 만남은 눈을 멀게 한다. 당신을 떠올리고 다시금 당신만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밤이 있다. 또한 모든 길이 당신에게 향하는 것만 같거나 혹은 당신에게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처럼 보이는 순간도 있다. 어떤 사랑은 맹목을 낳는다. 서시 「고라니」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지뢰밭을 지나는 ‘고라니’는 그러한 맹목의 자세를 그리는 상징이 된다. 더 나아가 “문득, 몹쓸 짓처럼 사람이 그리워졌다”라는 진술처럼 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언제나 몸에 달고 살던 위험이여”라는 진술처럼 위험을 무릅쓰는 순간을 훈장으로 여기는 당당한 자세로 이행해간다. 당신을 향한다는 것, 그것은 당신 이외의 모든 존재와 장소가 거추장스러운 올가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뜻한다. 당신에게 닿는다는 것, 그것은 그 순간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겪는 모든 시련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시집에서 길을 잃는다는 말의 의미는 당신에게 닿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그대에게 못다 한 진정의 편지를 쓸까”「(원고지의 힘」)라고 되뇌거나 “너에게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자화상」)라고 말할 때, 이렇듯 홀로 회상하다가 문득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외로움을 느낄 때 이 마음들은 스스로 자임한 원칙이나 사회적 죄의식 때문에 발생하는 수치심이나 고독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이 감정들은 당신을 소중히 대하는 태도이다. 어쩌면 “지난 과오가 떠오르지 않아 얼굴 붉히는 밤/수천 마리 피라미 떼가/송곳처럼 머릿속을 쑤신다”「(원고지의 힘」)라는 고백조차 오직 당신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혹은 “너……라는 말 속에는 죽음도 두렵지 않은 불멸의 그리움도 살고”(「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있다는 진술처럼, 그리움이 ‘너’로 인해서 탄생하듯 이 시집은 ‘너’로 인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폭낭 그늘에 초가 한 채 짓고 그대와 단둘이 누웠으면 좋겠네 남들이야 눈꼴이 시든 말든 하르방 몸뚱어리가 달아오르든 말든 그대와 오롯이 배꼽이나 들여다보면서 ― 「폭낭」 부분 고개를 쳐들고 들어가야 하는 집 앞에서 자꾸 목이 꺾인다. 무슨 낯짝으로, 무슨 염치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내가 들어가 폐만 끼치는 집 상처만 되는 집 차라리 대가리를 버린다. 뱀처럼 휘어져 흘러든다. ― 「못」 전문 반복되는 공간 상징인 ‘집’은 실은 상이한 두 가지 관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폭낭」은 만사를 잊고 당신과 사랑을 나누는 순간을 그리는 시편이다. 세상 따위는 잊고 당신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폭낭 아래의 “초가 한 채”는 시인이 소망하는 낭만적 사랑의 풍경을 잘 보여준다. 한편 차마 되돌아가기 부끄러운 ‘집’도 있다. 「못」에서 줄곧 상기되는 부끄러움은 폐만 끼치고 상처만 입히는 관계에 대한 반성의식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제목처럼 ‘나’가 그들에게 상처 입히는 ‘못’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는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차라리 대가리를 버린다”라고 자조(自照)하고 있다. 따라서 외딴 사랑의 풍경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집’이 대조를 이룬다. 우리는 이 대조 안에서 ‘당신’을 향하는 ‘집’이 굴레가 되는 상황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황야의 건달」에서 ‘집’은 장모와 아내와 자식들 모두가 아빠인 ‘나’를 신경 쓰지 않는 쓸쓸한 거처를 의미한다. 그러한 거처를 “어쩌다가, 어쩌다가 몇 달에 한 번꼴로 들어가는 집. 대문이 높다.”라고 표현할 때 높은 대문은 벽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낭만적 사랑은 그러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로서 상상되는지도 모른다. “담장 위에도, 지붕 위에도, 전봇대 위에도/생문(生門)은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그에게/허공에 집 짓는 일을 시켰다”「(평발」)라고 진술할 때, 그는 허공에 집을 짓는 거미의 운명으로부터 자신의 운명을 연역해내는 것은 아닐까. 그가 낭만적 사랑의 풍경을 꿈꾸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보, 너도 집 잃어버렸지?”「(이사」)라는 반문처럼 그에게 지상의 현실은 거주할 곳 없는 황야인 셈이다. ― 박동억(문학평론가) ■ 시인의 말 나 하나 살자고 너무 멀리 와버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잃었다. 내 곁엔 늘 벼락만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모두들 나를 떠나갔다. 아니, 떠나보냈다. 이젠 그마저도 덕분으로 알고 살 것이다. 덕분에 나는 살 것이다. 라고, 썼던 2009년의 나의 자서(自序)는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다. 2021년 11월 고영 |
고영 시인의 시를 읽는 시간은 쓸쓸하다. 술이 덜 깬 그를 불러내 다시 술 한 잔 사주고 싶어진다. 그의 시가 꺼내놓는 시간 속에는 아픈 장면들이 너무 많다. 그의 시에는 짙은 외로움이 배어 있다. 그의 시 속에는 철길 옆에 핀 민들레처럼 위태로운 운명을 아슬아슬하게 살아가야 하는 여리고 아름다운, 아름다워서 아픈 생을 쳐다보고 있는 또 하나의 그가 있다. 너에게 가는 길을 찾지 못한 채, 너와 불화를 거듭하는, 너에게 들어가지 못한 채 겉도는, 그래도 너를 향해 끝없이 가야 하는 가엾은 그가 있다. -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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