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제1부 정월
시 정월 그 빵집 우미당 여섯 살 지독한 어둠 배스킨라빈스, 서른한 가지의 이름들 춘자 이야기 이민 덕성장 어떤 여름밤 천리포 동물의 왕국 비눗방울 떠나간다 버드나무 솜틀집 향미루 강문, 그 저문 바다 다시 우미당을 위하여 높은 곳 오르골 그 마당의 오래된 펌프 그리운 골목 제2부 그늘 백일홍 그늘 조금 늦은 것들 후회는 아름답다 다시 첫사랑에 관하여 달그락달그락 슬픈 박모 소나기 그치고 그 무지개 찻잎을 두 번 우리다 넘버나인에서의 하룻밤 서귀포 강화도 여관 한 사나흘 성긴 눈 밤기차에서 내려 아직 어두운 저 파도 소리 마지막 오지 외로움에 대하여 안국동 검은 출구 제3부 허물어진 집 스르륵스르륵 허물어진 집 이름들 횡단보도 썰물 기차 소리 꽃무늬 사랑 천리포 파도 소리 봄날 저녁의 놀이터 라디오를 닮는다 한밤의 공중열차 몇 마리 연어 편안한 걸음 냉장고 무거운 구름 오래된 사이 퇴색한 풍경 인용 어떤 꽃 적멸에 대하여 안경 그 섬, 독도 꽃 지는 저녁 작품 해설 / 이혜원(문학평론가) 따뜻한 기억의 저편 |
|
여섯 살
초가을 오전의 얇고 느릿한 창가에 엎드려 크레파스로 집이며 가족이며 척척 그리던 어린 아들이 걱정스러운 듯 나에게 물었다 내가 크면 아빠는 할아버지가 되는 거야? 여섯 살의 믿음은 차돌보다도 단다한 것이어서 나는 두려운 대답을 선뜻 하지 못하고 너 크면 알록달록한 이층집 하나 아빠에게 사줄 수 있겠느냐 아이도 대답 대신 집을 더 크게 그린다 새순 같은 손이 온통 무지갯빛이다 무지개의 빛나는 고리가 내게 건너오다가 곧 투명한 속도로 사라진다 밤새 가물대던 빗소리처럼 잠귀에 들리는 듯 이내 사라지는 것들 칠순을 훨씬 넘은 아버지의 오늘을 그 옛날 여섯 살도 물어보았을까 지금 창가에서 잠시 머물고 있는 저 여섯 살 나의 두려움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나 막막한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그런데 있잖아 마당이 넓고 이층이고 하는 그 집을 사면 무거운데 어떻게 들고 와? --- p.16 |
|
누구에게나 하나씩 불에 덴 자국 같은……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데뷔, 2002년 현대시 동인상 수상 시집인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을 펴낸 심재휘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제목 하여 <그늘>. 그 아래 총 3부로 나뉘어 있는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코드는 무엇보다 기억인데 시인의 그것은 참으로 세심하고 정확하면서도 풍부해서 하나의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진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이혜원의 말을 따르자면 ‘기억의 창고가 풍성하다는 것은 시인에게 복된 일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언제든지 시상이 되어줄 원료가 넉넉하기 때문이다.’ 심재휘의 시는 가히 낭만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유년시절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틈틈이 보이고 있는 애착과 그리움은 시대를 불문한 따스함으로 아울러지는 탓이다. ‘우미당’이나‘ 향미루’ ‘덕성장’등의 지명도 그렇거니와 그 안에서 먹고 자고 커가면서 쟁여 왔던 어떤 기억들은 그의 과거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현재로까지 이어져 그의 아이들에게로 가 그늘로 드리운다. 그러나 이 때 이 그림자는 난롯가의 온기처럼 더 이상 온온한 것이 아니라 천천히 식고 또 삭혀져 불 꺼진 난로처럼 손 시린 차가움으로 살짝 그 온도를 바꾼다. 그는 이제 어른이 된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는 성찰의 거리를 인지하고 이를 잴 수 있을 만큼 자라버린 것이다. 이 어쩔 수 없는 성숙 앞에서 그는 묵묵히 침묵으로 현미경이거나 때로는 망원경으로 세상을 엿볼 뿐이다. 일관되게 이 간극이 유지되고 있었기에 낡은 기억을 토양으로 삼은 그의 시가 새롭게 현재적인 의미로 환원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참 무던히도 쓸쓸한 것, 그렇지 아니한가. 심재휘가 불러오는 세상에는 부르고 싶었으나 애써 부르기엔 부끄러운 시절과 사람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마치 오래 전 사진첩을 우연찮게 열어보고 그 자리에 오래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게 하는 느림… 심재휘가 느끼게 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