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제1부
길 강화에 와서 고개를 숙인다 늙은 산 겨울비 (...) 제2부 물결 카타콤 나는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그마저 스러진 뒤 저녁 놀 (...) 해설 시인의 말 |
|
담뱃집도 술점방도 문을 닫은 어두운 실골목
찬바람 속에 조등이 환하다 밀리고 밀려, 간신히 살아남은 바람받이 저마다 층층이 언 몸뚱이를 올리고 구공탄더미가 탄다 불꽃 속으로 미루어진 철거 날짜가 타닥타닥 튀어오르고 술애비 상주는 이제 집 나간 아내를 찾지 않는다 조등 주변엔 함흥집 고향 사투리 같은 눈발이 붐비는데 눈길을 따라 발자국 하나 아무도 몰래 골목을 빠져나간다 눈이 한번 더 마을을 덮고 지나가면 다 잊혀질 일이다 --- 함흥집 |
|
모를 일이다 내 눈앞에 환하게 피어나는
저 꽃덩어리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는 거 불붙듯 피어나 속속잎까지 벌어지는 저것 앞에서 헐떡이다 몸뚱어리가 시체처럼 굳어지는 거 그거 밤새 술 마시며 너를 부르다 네가 오면 쌍소리에 발길질하는 거 비바람에 한꺼번에 떨어져 뒹구는 꽃떨기 그 빛바랜 입술에 침을 내뱉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흐느끼는 거 내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 저 꽃이 불편하다 |
|
1980년대에 노동시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하여 『취업공고판 앞에서』를 상재한 이래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노동문학의 전위에 있어온 박영근 시인이 새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를 간행했다. 어지러운 세상 질서에 대응하고 변모해온 그의 궤적과 더불어, 뿌리 없는 삶이 어떻게 흔들리며 사람과 길을 찾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이 시집에서, 그러나 그가 고집하고 가는 길은 막막하기 그지없다. 그 자신의 말처럼 길을 잃고 찾는 그의 20년 문학활동은 오롯한 것인가.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한 시인의 모습이 사라질 듯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는 것은 무슨 연유일 것인가.
박영근 시인은 이번 새 시집에서 삶과 시에 대한 변화의 기미를 드러낸다. 「시인의 말」에서 "이 시집을 다시 펼치는 것이 두렵다"고 했듯 그는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알고 싶은 한편 그 도정을 바꾸고 싶은 심정을 나타낸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반성하면서 곳곳에서 자신을 찾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개를 숙인다」에서 보듯 시인은 이제 넘쳐나는 불빛과 소란 속에서 고개를 숙인다. 이전과는 다른 이 태도에서 우리는 80년대 초반 이후 우리 시의 한 가능성으로 자리했던 노동시의 피곤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스스로 어두워오는 산 속에서 "더 무겁게 뿌리를 내리는 돌"(「나에게 묻는다」)처럼 침잠하는 자신에게 끝없이 묻는다. 이번 시집의 「겨울비」는 20년간 지속해온 박영근 노동문학의 빼어난 한 결과물이다. 그것은 또 우리 시대의 슬픈 노래이기도 하다. 「겨울비」에는 삶에 대한 뼈아픈 참회가 녹아 있다. 한 시인의 내면 에서 일어나는 화자의 심리적인 대화는 절규처럼 들린다. 시 중의 어느 독백 부분은 화자의 친구 것일 수도 있으나 시인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 타자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과 포개고 있다. 시 속의 한 여인은 이번 시집 내내 중요한 고리로 작용하고 있다. 박영근 시인이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면서 발견하는 것은 상처투성이의 삶이다. 돌아가봐야 아무것도 남지 않은 「길」을 노래하고, 스스로를 "한밤중 온통 얼어가는 얼음덩어리"(「봄」)라고 규정하며, "이 무거운 몸 헐어버리자"(「비수구미에서」) 한다. 이 상처와 절망 속에서 시인이 갈구하는 곳은 연평도 '말'의 세계다. 「연평도의 말」 제3연에서 "어린 칠산바다에서 억센 파도를 배우고/황금색으로 단단해지는 비늘의 바다/서산 태안을 지나/바람 잔잔해지는 한저녁쯤에/내 깊은 곳에서 알을 싣던/물고기떼의 길"이고 싶은 것이 그의 원(願)이다. 이 연평도의 '말'이란 곧 자신의 누추한 삶이 칠산바다의 흐르는 물과 고기와 합일을 이루는 몸짓이며 산란일 것이다. "내 깊은 곳에서 알을 싣"는 「연평도의 말」은 삶으로써 진정한 '말'(바다와 고기)이 되고 싶은 바람을 나타낸, 이번 시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세계관이 없을 수 없고, 또 그것은 세계를 우수에 젖게 하여 우리를 돌아보고 완성해가는 한 동기이기도 하다. 부정과 내면의 절규뿐 아니라 의외의 희망이 함께 숨쉬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이번 시집이 보여주는 넉넉한 '말'과 몸을 찾아가는 시적 태도는 오히려 든든하다. 공장 담벼락을 '타고 넘어' 꽃을 피우는 본능이나 "더 깊이 가라앉아/꽃의 뿌리에 닿도록" 하려는 아픈 몸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을 향한 시인의 일여(一如)의 마음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