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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
차례 제1부 제2부 제3부 제4부 발문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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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기 시인이 조운 생가를 지키며 사는 이유
영광에서 그는 시인이라기보다는 환경운동가로 통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환경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던 고향 영광에 내려와 현장시, 걸개 시화전, 촛불시위, 벽시 등을 쓰며 활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던 그. 2000년에 시인의 이름을 얻은 후 십여 년이 훨씬 지난 후에야 첫 시집을 내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영광에는 원자력발전소가 있다. 영광에서 멀지 않는 부안에 핵폐기장이 들어서려고 했던 적이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장진기 시인의 환경운동가로서의 삶과 그가 겪었을 삶의 신산함을 짐작하게 한다. 전국의 각지에서 벌어지는 환경생태 운동과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공권력과의 지난한 투쟁 그리고 공권력에 의해 무너지는 대오 그리고 흩어지는 사람들. 그 속에 외롭게 서 있는 한 사람이 바로 장진기 시인이다. 바람 부는 법성포에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외로운 시인 장진기와 이백 년 된 석류나무가 잘려나가 잡초와 바람과 시비만이 지키고 있는 조운의 생가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조운 선생이 월북하기 전까지 살았고, 탈출기의 작가 최서해가 잠시 머물며 글을 쓰기도 했다는 그 생가의 실질 주인이 바로 장진기인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시와 결혼한 총각 시인의 첫 시집 그는 고등학교와 대학을 서울에서 나왔다. 어느 지방이나 그렇듯 그 지역의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지역사회에서 사람노릇하며 살기 어렵다. 그도 역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역에서 마이너리티일 수밖에 없는 그가 수십 년 동안 지역에서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가족과 시였을 것이다. “대학을 늦게 갔어요. 고등학교 졸업한 후에 대학에 안 가고 아버지께 대학 등록금을 달라고 해서 깨 농사를 지었어요. 그해 매우 가물었는데, 다행히 제가 지은 깨가 잘 돼서 대박이 났지요.” 그가 대학을 늦게 간 이유는 가족 때문이다. 자신이 대학을 가면 동생들이 학교를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군대를 갔다 온 후에서야 늦깎이로 들어갔고,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다시 고향에 내려와 동생들을 자신의 손으로 다 시집장가 보냈다. 그러느라 본인 정작 때를 놓치고 말았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어요. 그래서 서울 생활을 접고 무작정 고향에 내려왔죠. 그러다가 눌러앉은 거죠.” 시인은 어머니를 간호하느라 한 달을 꼬박 중환자실에서 지샜다.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무식하게 효도했다. 그러나 “내가 드러누운 가슴살이 푸석거리며 흙이 되어 / 어머니를 묻고 봄이 왔다 (중략) 그 이듬해 그녀도 갔다.”(「눈은 본붕하듯 날리고」 중에서)어머니도 가고 그녀의 사랑도 갔다. 그 후로 그는 계속 혼자다. “시와 결혼했다고 해야 마음이 편하죠.”라며 그는 허허 웃는다. 그러나 그의 웃음이 울음이 되어 가슴에 꽂히는 것은 왜일까? 그에게는 지체 장애를 가진 아우가 한 명이 있다. 동생들 걱정에 첫사랑을 보낸 후 본인의 몸을 돌보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은 지체 장애인 아우 때문에 어디도 맘 편하게 다니지 못한다. 결혼은 더구나 생각하지 못한다고 했다. 동생을 혼자 살게 할 수 없으므로..... 더구나 지체 장애인 동생을 데리고 함께 살자고 할 여인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므로 그는 시와 결혼한 것이다. 늦깎이 시인의 미래-우리가 잊고 사는 진정성의 회복을 꿈꾸며 윤동주 시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나온 것은 윤동주 시인의 뜻이 아니었다. 그가 일본의 형무소에서 죽은 후 친구였던 정병욱이 발견하여 묶어낸 것이다. 이와 똑같지는 않지만 장진기 시인의 시집 역시 이규배 시인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시집을 내고자 하는 것 또한 장진기 시인의 뜻은 아니었다. 이규배 시인 이전에 천승세 선생님의 눈에 걸린 것이다. 천승세 선생님과 이규배 시인의 안목과 장진기 시인의 진정성이 이 시집 『사금파리 빛 눈 입자』의 탄생 배경이다. 장진기 시인이 써놓은 시가 무려 1000여 편이 넘는다고 하니 첫 시집 이후의 다음 시집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물론 그 중에서 첫 시집에 적합한 시 50편을 뽑기는 하였으나 그의 삶과 진정성이 묻어나는 시 또한 그의 방구석 어디엔가 잠자고 있을 것이다. 벌써부터 숨겨져 있는 그의 다른 시들을 엿보고 싶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욕심이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조탁하고 걸러 낸 시어들이 법성포 햇살 아래 늘어선 굴비들처럼 말려진 시집. 그렇게 하루종일 시를 말리고 시와 대화하고 봄꽃잎과 함께 시를 날리고 시와 함께 살아가는 늦깎이 시인, 장진기의 삶이 이젠 더 이상 외롭지 않았으면 한다. 그의 시가 세상 사람들에게 좀 더 알려져 우리가 잊어가는 시의 진정성과 “시는 사는 것만큼 쓰는 것이여.”라는 김남주 시인의 말이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날이 하루빨리 오길 바랄 뿐이다. 우리가 잊었던 시인의 얼굴, 장진기 시인 학창 시절에 일찍이 등단하여 선후배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던 이규배 시인이 어느 날, 이십여 년만에 한 뭉치의 시집 원고를 보내왔다. 무조건 내야 한다고 했다. 읽어보고 좋으면, 돈이 될 것 같으면 내라고 하였지만 무조건 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이십여 년만에 나타난 것 자체게 아미 내겐 압력 그 이상이었다. 더구나 한때 시인을 꿈꾸지 않았던 국문학도가 없었을 만큼 시가 인기였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았던 세대였기에.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눈가에 눈물도 비쳤다. “명절이 보름쯤 지나 엄니 국맛을 못 잊어 두부를 사다 파를 썰어 넣고 끓이는데 / 왈칵, 눈이 붓는다 / 엄니도 저 뼛국을 끓이다가 눈물을 빠트렸을까”라는 대목에서 정말 ‘왈칵’ 하고 말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시인을 영광에서 만났다. 시의 구절구절에서 만났던 시인의 마음이 얼굴 곳곳에, 그의 입에서 잔잔히 터져나오던 지난 삶의 회한에 진하게 묻어나왔다. 이규배 시인이 발문에 인용한 김남주 시인의 “시는 사는 것만큼 쓰는 것이여.”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장진기 시인. 그의 시는 그의 삶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객기 넘치는 화장빨에다가 조명빨도 모자라 온갖 빨이라는 빨은 다 붙어다니는 요즘 시들에 대해 통탄을 금하지 못하던 어느 노시인도 “오래만에 만나는 참 좋은 시”라는 평을 부쳐주었다. ‘시가 넘쳐나는 시대, 알짬시’를 모으겠다는 취지로 시작한 작은숲출판사의 ‘사십편시선’에 딱 맞는 시라는 부추김도 있었다. 시 자체였던 시인. 지체 장애를 앓고 있는 동생 때문에 결혼을 못한 총각 시인. 영광이 나은 최고의 시조시인이라는 조운 시인(월북)의 생가를 지역의 반대와 홀대 속에서도 묵묵히 지키고 있는 뚝심의 시인. 그러면서도 휴대폰에서 시집에 실을 사진을 골라 이왕이면 잘 나온 사진을 실어달라던 아이 같던 시인. 그를 무어라 소개할까. 환갑이 멀지 않은 나이에 첫 시집이 나온다면 설레던 그 시인을 세상사람들에게 무엇이라 알려줄까. 우리가 잊고 지냈던 시인의 얼굴로 시처럼 사는 늦깍이 총각 시인. 그런 이름보다 그의 시 한 편 한 편보다 그를 더 잘 소개할 도구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