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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점잖은’ 남자이니 약혼녀에게 과거를 숨겨야 하고, 메이는 결혼 적령기의 여자로서 감출 과거가 없어야 하니, 둘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 p.53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이 늘 하는 질문이었지만, 아처는 메이의 그 말이 유난히 유치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걸 유치하다고 느낀 자신이 부끄러웠다. 메이는 그저 어른들이 하는 말을 따라했을 뿐일 터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곧 스물두 살 생일을 앞두고 있었다. 아처는 ‘점잖은’ 여자들은 대체 몇 살이 되어야 독자적으로 행동하게 되는지 궁금했다. ‘평생 못 그러겠지. 우리가 그렇게 놓아두질 않겠지.’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본인이 실러턴 잭슨 씨에게 퍼부었던 말을 떠올렸다. “여자들도 우리처럼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어요……” 그렇다면 이 젊은 여인의 눈을 가린 안대를 벗기고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게 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하지만 그녀를 그런 사람으로 길러낸 수많은 여성 역시 평생 안대를 벗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지 않았던가? --- p.95~96 마음속으로 생각한 말을 실제로 입 밖에 낸다면 부인이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평생 사소한 것들을 완벽하게 관리해오면서 얻게 된 헛된 권위가 깃든, 팽팽하고 평온해 보이는 그 얼굴이 충격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부인의 얼굴에는 메이가 지닌 싱그러운 미모의 자취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아처는 메이의 얼굴 역시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순수함을 간직한 이 통통한 중년 부인의 얼굴로 변해갈 운명인지 궁금했다. 아, 안 돼, 아처는 메이만은 그런 순수함을 갖지 않기를 바랐다! 상상력을 거부하는 정신과 경험을 배척하는 마음이 만드는 그런 순수함 말이다. --- p.164~165 “하지만 처음부터 당신만큼 친절한 사람은 없다는 걸 느꼈어요. 내가 정말 어렵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왜 해야 하는지 가르쳐준 사람도 당신뿐이었고요. 아주 착한 사람들 얘기는 들어도 공감이 안 갔어요. 시험에 빠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 같았죠. 하지만 당신은 알고 있었고, 이해했고, 바깥세상이 황금빛 손으로 우리를 유혹해도 그것이 요구하는 것들을 거부했어요. 당신은 배신이나 잔인함, 무관심의 대가로 행복을 얻는 건 바라지 않았죠. 나는 전에는 그걸 알지 못했는데, 지금까지 배운 그 무엇보다 좋은 교훈이었어요.” --- p.194~195 아처가 볼 때 그녀는 아마 평생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최선을 다해 대처할 테지만, 정말 한순간이라도 과거를 돌아보고 앞날을 예측한다든가 하는 일은 결코 없을 터였다. 메이의 눈빛이 그토록 투명하고, 그녀의 얼굴이 한 개인이라기보다 하나의 유형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아마 삶에 대한 그런 무의식 때문이리라. 그녀는 마치 공공의 가치나 그리스 여신의 모델로 선택된 사람 같았다. 깨끗한 피부 바로 밑을 흐르는 그녀의 피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죽어가는 생명의 액체가 아니라 방부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원히 젊을 것처럼 청순한 얼굴 덕분에 그녀는 냉정하거나 아둔한 게 아니라 순진하고 순수해 보였다. --- p.213 그 일을 보면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요즘 사람들은-이런저런 개혁, ‘운동’, 유행, 쇼핑, 각자의 취향 추구에 너무 바빠서-남의 일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차원에서 살아가는 이 거대한 만화경 속에서 어느 한 사람의 과거가 뭐 그리 중요하랴? --- p.391 아들의 말을 들으면서 아처는 점점 자신이 초라하고 답답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들이 무감각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다들 자기가 운명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그와 동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쾌활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 바로 그거야. 요즘 애들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럴 능력도 있고.’ 아처는 전형적인 신세대 청년인 아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들은 옛 이정표를 전부 없앴고, 그러면서 안내판이나 위험 신호까지 제거해버렸다. --- p.3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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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 작가 이디스 워턴이 자신의 삶을 딛고 이룬 예술적 성취 이디스 워턴은 1862년 1월 24일 뉴욕의 명망 높은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디스 뉴볼드 존스. 1866년부터 6년간 유럽 각지에서 머물며 유년시절을 보냈고, 아버지의 서재를 드나들며 문학적 재능을 키웠다. 1878년 첫 시집을 자비로 출간하고 『애틀랜틱 먼슬리』에 시가 게재되나 결혼 전까지 창작 활동은 이어갈 수 없었다. 바로 이듬해 관행보다 일찍 뉴욕 사교계에 데뷔하게 되고, 1885년 열두 살 연상인 에드워드 워턴과 결혼했다. 남편 테디와는 여행을 즐기고 건축과 저택을 애호하고 개를 사랑하는 취향을 공유하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1890년 단편소설 「맨스티 부인의 눈에 비친 세상」을 문예지 『스크리브너스』에 발표하고 1899년에야 첫 단편집을 출간한다. 1901년 레녹스에 ‘마운트’라는 저택을 직접 설계해 짓고, 유럽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역사, 미술, 건축 등에 대해 다수의 글을 집필했다. 1902년 헨리 제임스를 만나 문학적 동지로 평생을 교유했다. 1913년 테디 워턴과 이혼하고 프랑스에 거주하며 제1차세계대전 상황에서 구호 활동을 벌여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20년 출간한 『순수의 시대』로 이듬해 여성 작가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후 해마다 작품을 선보이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다 1937년 8월 11일 프랑스에서 타계했다. 『순수의 시대』는 이디스 워턴이 57세에 집필한, 작가의 삶에서 분수령이 되는 작품이다. 이보다 앞서 발표한 『이선 프롬』(1911) 『암초』(1912) 『여름』(1917) 등의 소설에 자전적 요소가 투영되어 있기는 하나, 『순수의 시대』는 생득적인 뉴욕 상류층이라는 좁디좁은 사회적 관계망 내에서 관습에 억눌려 작가 아닌 사교계 일원으로서 결혼에 집중해야 했던 젊은 날과 이어진 불행한 결혼생활, 외도임에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몰두했지만 결국 헤어지고 만 연인 등 자신을 옥죄고 소모시켜온 관계들로 인해 삶에 드리워진 어둠을 소재로 완성한 워턴만의 “고전 비극”이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생애와 더불어 제1차세계대전 이후의 대전환을 예리하게 포착해 작가로서 목표로 한 위대한 예술적 성취를 거머쥔 작품이다. 1920년 작품이 출간되자 출판사는 뉴욕 오페라하우스의 휘황한 광경에서 시작해 파리에서 끝나는 소설이라 줄거리를 소개하며 엘런 올렌스카의 이혼 주장은 과연 정당한가를 묻는 문장을 홍보 문구로 썼다. 1921년 퓰리처상 선정 위원회는 “미국 사회의 건전한 분위기를 잘 그려내고, 최고의 습속과 남성상을 잘 묘사한 작품이라야 한다”는 기준에 부합하는 작품이기에 『순수의 시대』를 첫 여성 작가의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또한 당대를 이미 대표하던 두 “천재 작가” 헨리 제임스, 조지프 콘래드와 비견된다는 상찬을 받기도 했다. 이후로 냉혹한 시간의 흐름에도 작품은 본연의 가치를 잃지 않고,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평가들은 도금시대(The Gilded Age)의 풍속과 전후 급변한 사회상을 면밀히 기록해낸 소설로 손꼽았고, 특히나 1993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연출을 통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출간된 지 백 년이 흘러도 평단과 대중 모두의 사랑받는 위대한 미국 문학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1921년 퓰리처상 뉴스위크 선정 ‘역대 최고의 명저 100’ 모던라이브러리 선정 ‘20세기 100대 영문학’ 무지와 위선이 만든 삶의 실제와 허상을 가르는 심연 그 사이를 풍요롭게 채운 아이러니와 로맨스의 정교한 향연 뛰어난 연애소설로서 『순수의 시대』는 1870년대 뉴욕 상류층 세 남녀의 연정과 결혼을 다룬다. 주인공 뉴런드 아처가 새하얀 피부에 투명한 눈동자를 지닌 스물한 살의 메이 웰런드와 막 약혼한 때, 메이의 사촌 올렌스카 백작부인(결혼 전 이름 엘런 밍곳)이 폴란드 귀족 남편과 이혼하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온다. 새로운 경향과 예술에 대한 너른 이해, 열린 생각과 합리적인 사고를 자신해온 뉴런드 아처는 유럽에서 성장해 자유분방하며 솔직한 엘런을 다시 만나 매료된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나 개성보다 관습과 예법을 중시하는 뉴욕 사교계는 “그렇게 유럽 사람 같아진 것도 당연”하다며 엘런을 “특이한 외국 여자”로 규정하고, 밍곳 가문은 이혼을 원하는 엘런의 의사에 반해 부와 지위가 보장된 남편에게로 돌아가도록 은밀하게 단합하며 변호사인 아처를 내세워 엘런을 회유하게끔 만든다. 아처는 연민과 열정으로 엘런을 사랑하지만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몰라서 끝없이 흐르는 강물” 같은 냉담하고도 막아낼 수 없는 상황에 떠밀려 결국 메이와 결혼하게 된다. 아처는 그렇게 엘런을 잃은 후 자신의 “너무 많은 것이 허비되고 망가졌”으며 “운명에 묶여 꼼짝할 수 없다”는 회환으로 남은 생을 보낸다. 『순수의 시대』에 대한 초기 리뷰들은 관행에 준해 익명에 따른 것이 대다수였으나, 소설가 캐서린 맨스필드는 기명 리뷰를 통해 독자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섬세하고도 애절한 로맨스만큼이나 작품 내에서 강력하게 기능하는 아이러니를 언급했다. 마찬가지로 워턴의 작품들 중 ‘삼각관계 3부작’으로 묶이는 『이선 프롬』 『암초』를 모두 옮긴 손영미 원광대 영문과 교수 역시 워턴이 사용한 아이러니에 주목한다. “고전 비극의 본질은 어떤 대상이나 현실에 대해 주인공이 갖고 있는 정보의 오류나 부족,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오판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여러 층위의 아이러니가 비극의 대표적인 수사학적 장치로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삼각관계 3부작’의 『이선 프롬』과 『암초』에도 아이러니가 자주 등장하지만, 『순수의 시대』는 그야말로 수많은 아이러니를 동원해 아처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해설 중에서) 특히나 이디스 워턴이 회고록에서 “나의 캐릭터들은 반드시 그들의 이름과 함께 온다”고 밝힌 바대로, 뉴런드 아처, 메이 웰런드, 엘런 올렌스카 백작부인 이 세 캐릭터의 이름들에 담긴 아이러니에 대한 분석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더해준다. 딜레탕트인 뉴런드 아처는 섬세한 안목으로 세상의 변화를 인지하고 그와 대조되는 옛 뉴욕 사교계의 관습과 위선을 꿰뚫어보며, 뉴욕 사교계라는 상형문자 같은 세계 안에서 평생 사소한 것들을 완벽하게 관리해오면서 얻게 된 헛된 권위만 깃든, 팽팽하고 평온해 보이는 얼굴들과 소름끼치도록 무섭게 박제된 그들의 삶을 인지한다. 그리고 메이 같은 젊은 여성들이 선대 할머니들의 음모를 통해 인위적인 순수함, 상상력을 거부하는 정신과 경험을 배척하는 마음이 만드는 그런 순수함을 지니도록 길러졌음을 안다. 그러한 앎을 지녔으나 뉴런드 아처는 사회 변화에 동화되지 못하고 그 변화를 스스로 이루어낼 자질도 없는 한계를 지닌 주인공이다. 그러한 한계로 인해 그는 결국 사랑하는 여인인 엘런 올렌스카가 속한 세계로 나아갈 수 없었고, 평생 곁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온 아내 메이의 내면도 엿보지 못한 채 정말 무미건조한 삶 속에 스스로를 갇히게 만든 현대 비극의 주인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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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시의적절한 작품 같다. 생각해보면 모든 시대가 순수의 시대이다.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감히 표현하지 못하거나 어렴풋이 생각만 하다가 나중에야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 엘리프 바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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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소설 중 하나이자 문학이라는 세계를 항구히 확장할 작품이 될 것이다. -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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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스 워턴은 사랑하듯 친밀하게, 증오하듯 적확하게 옛 뉴욕의 생활상을 그린다. - 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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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는 옛 뉴욕의 문화적 사회적 전통을 재평가한 예리한 풍자소설이나, 그보다는 강렬한 심리소설임을 강조하고 싶다. - 벨린다 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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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방식의 정밀한 조정을 거쳐 유지되는 로맨스와 아이러니 사이의 균형은 이디스 워턴만의 숙련된 감각의 문제로, 고된 작업이라기보다 즐거운 놀이에 가까워 보인다. - 캐서린 맨스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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