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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역의 소멸론 | 조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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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를 뭐라 부르든, 지방이든 지역이든 로컬이든, 솔직히 난 별로 관심이 없어. 중요한 점은, ‘나-지역’을 당신 바깥에 두는 한 우리의 대화는 겉돌 수밖에 없단 거지. 오랜만에 찾았는데 주말인데도 도심이 휑하다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내가 감사해야 할까? 스스로 파괴한 것을 애도하는 제국주의자의 향수와 닮았다면 과도한 비판일까? 다른 지역을 원한다면, 무엇보다 당신이 달라지길 바라. 지역을 걱정하고 배려하는 대신에 당신과 내가 맺어온 관계를 돌아보길 바라. 지역의 주변성을 강요한 역사가 곧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성장사였음을 알길 바라. 이 역사에 나도, 당신도 적극적으로 연루되고 공모해왔단 걸 깨닫길 바라. 이제, 나의 소멸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함께 얘기해볼까?
---p.12 조문영, 「나, 지역의 소멸론」 할머니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야 한다. 그 누구도 읽어서는 안 된다. (……) 저런 할머니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소설에서는 존재해야 한다. 소설만이 열어젖힐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소설 속에서만 들려오는 말과 소음이 있다. 소설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이 있다. 할머니는 나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될 수 없다. 나는 할머니를 언어로 재현할 뿐이다. 언어가 아닌 사람을 만나야 할지 모른다. ---p.47 김태용, 「말과 소음」 글을 쓰면서 붉은색 경고등이 들어온 지역 지도와 인간의 자취만 남은 거리 풍경이 계속 되살아난 것 같다. 불안의 시선 속에서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지역소멸을 둘러싼 말들을 의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역은 과연 소멸하는 것이 맞는가? ---p.47 김태용, 「말과 소음」, 작가노트 우리는 매일 놀이터에서 만났다. 그때는 별다른 연락을 하지 않아도 매일 그럴 수 있었다. 만나서 같이 땅도 파고 고운 흙도 만들고 돌도 고르고 그랬다. 그네도 타고 시소도 타고 그러다 지겨워지면 애들을 모아 술래잡기도 했다. 사방치기도 하고 이따금 정체를 알 수 없는 게임을 하기도 했다. 우리보다 어린 아이들은 깍두기를 시켰다. 제외되는 아이는 없었다. 놀이터에서는 따로 통성명을 하지 않아도 게임 한 판이면 모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모두 승패가 중요하지 않은 게임이었다. 아니, 그 누구도 승패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기면 이기고 지면 지는 것. 이긴다고 좋을 것도 진다고 나쁠 것도 없었다. 그냥 실컷 뛰어다니다가 해가 질 때 집에 가면 그만이었다. ---p.53 내가 이곳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가 떠나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오빠도, 멜빵바지 애도, 놀이터에 가면 언제든 볼 수 있었던 그애들도. 이제 더이상 없었다. 그들은 이 거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들이 정말 여기에 존재했던 게 맞나. 한때 그랬던 게 맞나. 나는 내 기억을 믿을 수 없었다. 지수에게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그때 같이 놀던 애들을 기억하냐고 묻고 싶었다. 혹여나 지수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p.71 서이제, 「진입/하기」 영유가 사는 동네에는 대부분 나이든 사람들이 거주했다. 영유가 아주 어렸을 적에는 그렇지 않았다. 영유의 아빠는 아프기 전, 그 도시에 있는 자동차공장에 다녔다. 아주 오랫동안, 타 지역 사람들이 영유가 사는 도시에 대해 말할 때, 자동차공장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공장이 망하면서 도시가 쇠락하기 시작했다고. 시와 도 차원에서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다. 이를테면 관광지를 개발하고, 도시에 있는 커다란 호수 주변을 개발하는 것. 개발 지역의 땅값이 올랐고, 거기에 살던 사람들이 얼마간의 혜택을 보았다. 하지만 영유네 동네는 아니었다. 영유네 동네는 관광지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는데(호수와는 멀었다), 개발이 시작되자 오히려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했고, 그나마 남아 있던 젊은 사람들도 모두 떠나버렸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에, 영유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문을 닫았다. 그후로 영유는 아침마다 삼십 분 넘게 버스를 타야 했다. 그때마다 눈물이 찔끔 났다. 새로 간 학교는 호수 근처의 개발 구역에 있었고, 같은 시에 속해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경이 전혀 달랐다. 나중에 영유는 이때를 떠올리며 생각하게 된다. 세상이 무너질 때에도 순서는 있는 거라고, 그 알량한 순서가 많은 것을 바꾸어놓는다고. ---p.82 손보미, 「자연의 이치」 해나는 꽤 넓은 것 같지만 사실은 전체 면적의 삼십 퍼센트도 안 되는, 자기 지분만큼의 땅을 찬찬히 걸어보았다. 여기서 뭘 할 수 있을까. (……) 곧 떠날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일을 하는 것은 골치 아프고 서러웠다. 이곳저곳 떠돌더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p.146 대진은 입버릇처럼 할 일이 없으면 이곳에 정착하라고 했다. 사실 해나도 아예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알아본 바로 청년영농정착금을 받은 청년 중 제대로 정착한 이들은 극히 드물다고 했다. 몸 쓰는 일에 익숙지 않고, 그러다보니 무리하게 장비에 자본을 투자했다가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몇 년 안 되어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p.153 예소연, 「팜」 |
이야기는 타인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직접 알려줄 수는 없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느낄지를 상상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가 가지는 공감의 힘일 것입니다. 추상적인 논증은 어느 정도 배경지식을 일러줄 수 있지만, 이야기야말로 오히려 직접적이고 절실하게 핵심을 보여줍니다.
소설잡지 『긋닛』은 그런 이야기의 힘을 믿습니다. 이야기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와, 거기에 분명히 있지만 잘 보이지 않고 보지 않으려 하는 세계를 연결해 보입니다. 『긋닛』은 우리 시대에 간과할 수 없는 특정한 주제와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편의 주제 에세이와 세 편의 단편소설을 엮어 독자들에게 선보입니다. 『긋닛』은 매호 정해진 주제를 미리 공개하고 투고작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작품을 보내주셨음에도 지난 3호에는 아쉽게도 선정작을 선보이지 못했지만 4호에서는 예소연 작가의 「팜」을 함께 읽기로 했습니다. 지방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할지, 『긋닛』의 고민에 젊은 작가가 힘을 보태주었습니다. * 한때 수천 명의 학생들이 다녔다는 지방 대학교의 정문은 이제 굳게 닫혀 있습니다. 철조망 사이로 보이는 건물 지붕과 창문은 관리가 되지 않아 뜯겨 있고 운동장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지만, 매각조차 되지 않아 규모가 큰 건물들은 흉물스럽기만 합니다. 2000년 이후 폐교된 전국의 대학교는 20개, 그중 19개 학교가 모두 지방의 대학입니다. 『긋닛』 4호는 ‘지역소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통계청과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지난 2월 기준 전국 228개 기초지방자치단체(시군구) 중 118곳(51.8%)이 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지난해 소멸위험 시군구는 113곳으로, 올해 5곳 늘어나 처음으로 전체의 50%를 넘었으며, 읍면동 기준으로는 1951개가 소멸위험지역입니다. 지난해 1849곳에서 100여 곳 늘어났습니다. 그중에서도 ‘소멸고위험’ 지역은 2020년 23곳, 2021년 36곳, 2022년 45곳, 2023년 51곳으로, 그 속도는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젊은 인구는 블랙홀처럼 수도권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습니다. ‘명문대’와 ‘좋은 일자리’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현재로서는 ‘소멸고위험’ 지역이 모두 농산어촌 군 지역이지만, 수도권 집중이 더 심화되면 지방 중소도시들도 차례로 소멸 위기에 놓일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지방의 존폐와 더불어 인구 집중으로 인해 수도권에서의 삶의 질은 점점 더 떨어지는 악순환 역시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긋닛』 4호는 더는 간과할 수 없는 지방 소멸이라는 주제를 둘러싼 우리의 삶에 대한 문제적인 이야기 4편을 선보입니다. * 어쩌면 수도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아직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사라지고 있는 지역에서 살아갈 방법들을 모색하고 있을 다른 모든 ‘우리’에겐 더없이 다급한 이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해준 작가는 조문영(주제 에세이), 김태용 서이제 손보미 예소연(단편소설)입니다. 조문영 연세대 인류학과 교수의 주제 에세이 「나, 지역의 소멸론」은 지역의 입을 빌려 위기에 처한 이곳들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간결하게 되짚습니다. 지방소멸위험지수의 개념에서부터 저출산, 지역의료의 부재, 현실과 겉도는 정부와 지자체의 정책들, 정작 지역민은 함께하지 못하는 여러 모색의 방법들 등, 매일같이 기사를 접하면서도 대충 눈으로 훑고만 지나가던 내용들이 길지 않은 지면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김태용의 소설 「말과 소음」은 작가 특유의 소설적 고민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원인은 비교적 분명하지만, 해결 방안은 찾기 힘든 사회적 문제 앞에서 소설적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지역소멸에 대한 기사를 쓴 지방 도시의 신문기자 남편과 남편의 이야기에서 소설적 모티프를 얻은 소설가 아내의 심리적 특성을 전면에 두고, 작가는 지역소멸을 배경으로 우연과 상상을 겹쳐놓으며 불안과 답이 없는 이 문제를 소설적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김태용만의 독특한 스타일은 여전하면서도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야기 아래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제의식이 작동하는 소설입니다. 서이제의 소설 「진입/하기」는 간간이 연락하고 지내는 고향 친구의 결혼식 때문에 오래전 떠나온 고향을 다시 찾게 된 ‘나’의 이야기입니다. 그토록 떠나오고 싶던 곳을 오랜만에 다시 찾은 ‘나’의 눈을 통해 우리는 과거와 달라진 우리 모두의 고향을 마주하게 됩니다. 얼핏 그대로인 듯 보였던 도시의 곳곳은 비어 있고, 한때 번화했던 중심가를 한참 걷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이제 그곳들―많은 우리의 고향들은 더 이상 “살 만한” 곳이 아닙니다. 작가는 “ 한 개인이 계층 이동을 욕망하는 동안, 한 사회에 진입하려고 애쓰는 동안 등을 지게 되었던 것들에 대해” 결국 이를 구분짓는 “언어”에 대해 고민합니다. 손보미의 소설 「자연의 이치」는 작가 특유의 드라마틱한 서사가 강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자동차공장이 망하면서 쇠락하기 시작한 지방의 어느 소도시, 다니던 초등학교까지 문을 닫아 삼십 분 넘게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야 했던 (이제는 열여덟이 된) 영유의 성장드라마 뒤로는 서울이라는 메트로폴리탄을 제외한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한 시공간이 펼쳐집니다. 한 편의 극영화를 보는 듯 생생한 캐릭터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스토리라인 너머를 생각하게 합니다. * 『긋닛』 4호에 보내주신 많은 작품들 중, 예소연 작가의 소설 「팜」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동할 때, 그냥 ‘오고 가지’ 않고 ‘내려’갑니다. 손쉽게 타인을 배제하고 혐오하는 세계에서 마음껏 ‘지방’과 수도권을 오가며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작가는 소설을 통해 묻습니다. 젊은 시절 민주주의운동을 하다가 이제는 지방에서 기후위기를 고민하고 스스로 농법을 개발하며 지속가능한 세상을 꾸려나가고자 하는 아빠 대진과, 생태도시 이름 공모에 당선되어 적지 않은 상금을 받게 된 딸 해나의 어느 하루에 많은 고민들이 녹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