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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다섯 개의 예각
039 크리놀린 077 평론 | 이명원(문학평론가) 093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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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길은 내리막이 더 가팔랐다. 바로 아래가 평지였음에도 그곳은 아까와는 달리 아득하게 느껴졌다. 경주는 몇 발짝의 무거운 걸음 끝에 뒤돌아보았다. 보드라운 이파리 몇 개를 내민 어린 녹차나무는 주변의 잡초보다도 키가 작아 잘 보이지 않았다. 선 채로 주위를 한 번 휘 둘러보았다. 우거진 솔숲 멀리 하늘에 구름이 아무렇게나 뭉쳐진 채로 흘렀다. 구름의 잔상은 비탈길에까지 따라왔다. 관목들 사이로 난 길의 아래쪽에서 구름 뭉치가 위쪽으로 떠오고 있었다. 여유와 자신감이 깃든 속도였다. 낯선 숨소리가 성큼 가까워지자 경주는 다급하게 비탈을 되올라 어린 녹차나무를 뽑아 던졌다. 흰 덩어리가 흔들리며 거리를 좁혀왔다. 거칠게 육박해오는 숨소리를 느끼며 경주는 맨손으로 흙을 파기 시작했다.
--- 「다섯 개의 예각」 중에서 여인은 신사 쪽으로 잠깐 눈길을 주었으나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사내가 크리놀린을 주워들고 신사에게 들어 보이며 물었다. “그럼 이건 누구 건가?” 신사가 눈썹을 사납게 치켜떴다. 사내는 깜짝 놀란 척을 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여인은 두 남자를 향해 고개를 내젓고는 광장의 끝을 향해 나아갔다. 시선은 광장 저편에서 어른거리는 검은 그림자에 꽂혀 있었다. “이봐, 에, 엘라…… 엘라! 엘라!” 여인은 신사의 호명에 대답하듯 어깨를 한껏 젖혔다. 턱을 들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로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광장에는 신사의 일그러진 표정과 사내의 웃음소리만 남았다. --- 「크리놀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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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자기 상실, 그 불안의 순간들을 마주한 신예작가 이경란의 단편소설 2편을 모은 두 번재 소설집이다. 「다섯 개의 예각」의 경우는 지속되고 반복될 것으로 생각되었던 일상성의 균열에서 나타나는 자아의 불안을, 「크리놀린」의 경우는 부부 관계의 파탄이 초래하는 불안을 ‘모자’라는 소도구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불안을 의식하는 소설 속의 두 인물은 모두 여성이며, 그들이 상이한 서사적 시간 안에서 느끼는 불안은 시간이 변화시킨 관계의 문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존재론적 상실감을 마주한 작가는 자기를 상실했던 여성 주인공이 소설의 끝에서 그것을 복원하고 재구축하면서, 새로운 ‘나’로 재생하는 존재론적 드라마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 출간되는 이경란의 작품집에서 공통 모티프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존재론적 자기’를 회복하는 데 있다. 이 두 소설은 공통적으로 가족이라는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자기를 망각하거나 상실함으로써 ‘불안’에 노출되었던 여성 인물들이, 소설의 끝에서 ‘존재론적 자기’를 자각한 끝에, 삶의 전환적 회복을 결심하는 장면에서 끝난다. 일종의 여성의 자기정립 혹은 주체화 과정을 다루는 소설적 모티프이지만, 소설의 기법과 형식이 개성적이다. 「다섯 개의 예각」이 연대기적 서술방법을 통해 여성의 내면적 의식의 변화를 치밀하게 묘파한다면, 「크리놀린」은 극적 구성을 통한 결단과 행동의 전환적 변화를 활달하게 제시하고 있다. 두 편의 작품만으로 한 작가의 창작세계를 규정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이 창작집에서의 서사적 실험이 이후에 더 탄탄한 작품세계의 구축을 기대하게 만든다는 점은 적극적으로 긍정해도 좋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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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란의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작가가 ‘불안’이라는 문제에 대해 의식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 개의 예각」의 경우는 지속되고 반복될 것으로 생각되었던 일상성의 균열에서 나타나는 자아의 불안을, 「크리놀린」의 경우는 부부 관계의 파탄이 초래하는 불안을 ‘모자’라는 소도구를 통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안을 의식하는 소설 속의 두 인물은 모두 여성이며, 그들이 상이한 서사적 시간 안에서 느끼는 불안은 시간이 변화시킨 관계의 문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존재론적 자기의 상실에서 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경란의 소설은 자기를 상실했던 여성 주인공이 소설의 끝에서 그것을 복원하고 재구축하면서, 새로운 ‘나’로 재생하는 존재론적 드라마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이명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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