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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나는 입버릇처럼 가게 문을 닫고 열어요 나의 시는 나의 육체를 지배하지 못하고 소심한 책방 비명 점박이 느와르 메롱나무 밤까시 팃검불 필사 쯧쯧의 기원 2부 겨울 이사 청소 살구들 육아살이 플립 시계 육아가계부 그물녘 수리남 두꺼비 나무항구 1 나무항구 2 나무항구 3 별명이라는 고향 1 별명이라는 고향 2 3부 끼니 생각하는 모자 도서관 식당 인공수정 개미 드로잉 닭닭닭 오래 핀 것들 수혈 닭숲 가족사진 이명 독백 대화행 바나나 4부 미끄럼틀 나비바늘꽃 1 나비바늘꽃 2 곤히 장날 양말 태안 유전 감기 블루빌 목포 미처 다 살지 못한 오늘을 펼치고 오줌길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증보기도 부록 공치는 날 다슬기 바다낚시꾼 보풀 도토리 징글쟁글 시창작교실 오동도 부르고스 축구 해설 불행 너머의 시 / 김주원(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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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는 나의 육체를 지배하지 못하고
나의 시는 나의 영혼을 가지어 본 적이 없고 나는 멀리 떠나는 자의 딱딱한 신발을 닮았고 나는 어깨를 위해 울어 본 적이 없음을 후회하고 나의 식사는 언제나 불평과 망각 사이에서 허술했고 그 빈약함으로 나의 늙은 시는 나를 쉽게 잊어버렸고 낮과 밤이 둥글어 가는 톱날 바퀴의 시작점은 얼마나 무의미한지 ---「나의 시는 나의 육체를 지배하지 못하고」중에서 짧아지는 연필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 딱딱한 솔방울을 궁굴리며 궁굴리며 용기의 얼굴을 내밀고 가야겠다는 생각 손바닥 같은 숲속 작은 사람들 곁에서 우산을 펼쳐야겠다는 생각 신앙을 가져야겠다는 생각 첫 시집을 내고 예술가라기보다는 생활인에 가까워졌다는 생각 시집을 팔아야겠다는 생각 깨진 보도블록 탓하지 않으면서 까인 무릎을 껴안아 줘야겠다는 생각 저마다 바다를 띄우고 그마다 닻을 품고 이마다 파도를 버틴다는 생각 ---「소심한 책방」중에서 송아지가 죽은 날 남편은 축사 뒷산에 올라 땅을 팠습니다 한 줌씩 구덩이가 열렸습니다 긴 혓바닥으로 새끼를 닦고 닦은 어미 소를 뒤로하고 볏짚에 싸인 입과 귀와 몸뚱이를 천천히 구덩이에 묻어 주었습니다 밤나무 감나무 쑥부쟁이 복숭아나무 미나리 씀바귀 들깨풀 냉이꽃 개미들 곁으로 송아지가 이사를 갔습니다 ---「겨울 이사」중에서 비 오면 우린 만나요 눈발이 천둥 치는 날에는 창문마저 날뛰는 날엔 가게 문을 닫아요 떨어지는 우박을 맞으면서 빈 길을 걸어요 손님도 주인도 없는 날에는 가로수의 옷깃을 여미고 우리는 설거지 같은 얼굴로 바깥에 쌓여 비의 우리에 우리를 담가 놔요 비 오는 날이면 우리는 만나요 ---「공치는 날」중에서 쓴다는 건 엉킨 나를 푸는 일 엉킴을 확인하는 일 놔둔 채로 며칠을 묵혀 두는 일 이 또한 손들의 일이다 때론 실눈을 뜨고 백지를 노려보는 일 변기를 내리고 사랑의 기술자처럼 와장창 꽂히는 번개에 감전이 되다가도 벌떡 뒤 닦는 일 ---「시창작교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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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문을 열면 낱말들이 몰려와
슬픔이 무사하다는 생각 첫 시집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갖게 된 시인들에게 두 번째 시집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박송이 시인의 이번 시집이 자기 세계의 확장이라면 슬픔이 다 지나가 버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시인은 새로움을 원한다. “무슨 소용으로 누추해질 것 인가/ 어떤 용기로 써먹은 꽃을/ 재탕할 셈인가”에는 관심이 없으므로 “꽃을 증오”(「나비바늘꽃 2」)한다. 써먹은 꽃을 또 피우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해독할 수 없는 시처럼/ 폼나게 떠들어 대”는 것도 할 수 없고 “폭죽이 터지는 시/ 그런 건 없”(「육아살이」)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의 시는 슬픔에 침잠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품고 가는 더 넓은 삶을 갖게 되었 다. “첫 시집을 내고 예술가라기보다는/ 생활인에 가까워졌다는 생각”(「소심한 책방」) 때문일까. 시쓰기에 관한 시들이 눈에 띄는 것은 시가 결국 삶을 쓰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체득한 시인이 있어서이다. 시인에게 시쓰기는 일상의 시 간이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무엇이 시를 쓰게 하는가를 질문한다면 박송이 시의 화자 들은 불행과 슬픔이 그렇게 한다고 답할 것이다. 시는 어디에 서 오는가. 번뜩이는 영감이나 상상력이 필요할 때마다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창조의 샘이 늘 흘러넘치는 건 아닐 것이다. 박송이 시의 불행한 의식은 모든 좋은 시인들이 갖추고 있는 시적 재능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생을 지배하는 불행한 의식으로 그들은 절실해지는 것이다. “쓴다는 건 엉킨 나를 푸는 일/ 엉킴을 확인하는 일/ 놔둔 채로 며칠을/ 묵혀 두는 일”(「시창작교실」)이고 보면 시는 삶의 밑바닥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과거의 슬픔과 대면해 그 엉킴을 푸는 일이다. 박송이의 시에서 눈여겨볼 점은 불행한 의식을 놓지 않되 그 불행에 고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엉킨 나를 푸는 일’이 절실해서 그의 시는 유년 시절과 양계장과 아버지에 관한 기억을 들춘다. 하지만 불행한 의식으로 그의 화자는 다른 이의 슬픔을 바라볼 수 있다. 박송이의 시는 사회의 불행이 자신과 연루되어 있다고 느낀다. 불행한 의식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의 시가 남 달리 생명 의식이나 생태주의를 표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박송이의 시가 생명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개념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불행한 의식이 다른 불행을 민감하게 포착한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슬픔은 그의 세계를 넓힌다. “손이 있다는 게/ 손의 감각이 있다는 게/ 정서 단어 상상이 있다는 게”(「시창작교실」) 연결되는 이유는 시가 다른 세계를 감지하는 능력을 뜻하기 때문이다. ‘정서’, ‘단어’, ‘상상’은 시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 열고서야/ 손가락만으로/ 나눠 가질 이야기/ 씀으로 복 있는 나”(「시창작교실」)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슬픔을 겪은 사람이 다른 슬픔을 이해할 수 있고, 아픈 사람이 다른 이의 아픔을 잘 보는 것처럼. 좋은 문학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근본적인 긍정을 느끼게 한다. 같은 의미에서 좋은 시는 외부의 상황과 조건이 아무리 힘들고 비참해도 한 인간에게 잃어버릴 수 없는 가치를 선사한다. 소멸되지 않는 삶의 힘이 있다는 것을 믿게 한다. 박송이 시의 불행한 의식은 시에 관한 의미를 되살려 놓는다. 세상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삶은 그것과 교감하는 일이라는 것 말이다. 잘 익은 밥알들처럼 내리는 눈을 ‘시밥’이라고 부르는 시인에게 시는 세상을 눈부시고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다. 박송이의 시는 불행을 넘어 삶의 예술로 가는 중이다. ■ 시인의 말 맨발을 감싸는 저 하얀 눈발들, 저 거룩한 아무것도 부수려 애쓰지 않는 양말의 일생 - 졸시, 「양말」 중에서 세상의 모든 양말들에게 이 시집을 마땅히 바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