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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들어가는 말 1. 조선인의 국방 의무, 군역 조선시대의 군사 조직 군대에 가는 사람과 세금을 내는 사람 2. 군대에 가면 고생인 이유 고단한 훈련 수도 경비와 왕의 경호 노동하는 군인들 3. 국방 의무의 한 형태, 세금 부담은 크고, 균일하지도 않다! 군역세 개편에 대한 여러 의견 영조의 최대 치적, 균역법 4. 약해지는 군대 지방 관청의 재정 손실과 군역자 폭증 훈련의 축소와 노동의 증가 향촌 방위 강화 방안의 대두 나오는 말 주석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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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때가 켜켜이 묻은 고문서를 뒤적이다 보면, 당시 군대 입대나 군역세 부담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때에는 군역을 회피하거나 도망가는 일이 빈번했다. 황구첨정(黃口簽丁), 백골징포(白骨徵布) 등은 당대 군역 문제의 심각성을 잘 대변한다. 이러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군사 제도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국가를 지키는 최후의 수단이 군대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즉위년(1418) 10월 19일의 기사에서 병조가 태종에게 장계한 내용을 보면, “국가 통치의 안정성[治安]을 유지하는 방책은 무비(武備)보다 더 요긴한 것이 없사온데, 나라가 오랫동안 평안하여 백성들은 군대의 일[兵事]을 보지 못하였고, 중외의 관리들은 다만 한 문구(文具)로만 보게 되니 매우 불안합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가 나라가 평온하더라도 군대는 정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 p.11~12 현대에는 군대와 행정 조직이 분리되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는 보통 행정 조직의 수장인 수령이 그 지역에 편성된 영진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군현의 행정 지휘관인 수령은 보통 첨절제사 등의 군사 지휘관 직책을 겸임하였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나 너무 궁벽한 곳에 있어 군현을 설치하기 어려운 지역에는 진(鎭)을 두고 전임 지휘관을 파견하는 사례가 있었다. 북방에는 여진이나 거란 등의 이민족의 침입이 예견됨에 따라서 육군진이 많았고, 연해 지역에는 일본군의 침입이 예견되었으므로 수군진이 많았다. --- p.20 여러 성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성은 도성이었다. 도성은 조선이 건국한 지 4년 만인 1396년(태조 5), 11만여 명의 인력을 동원해서 쌓은 성곽이었다. 이 성은 그 후에도 계속 수리와 증축이 진행되었다. 특히 국왕 영조는 도성의 수리와 증축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대신 중에 도성의 수리와 증축에 대해서 찬성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중 하나인 홍중효(洪重孝)는 도성을 수리하고 증축하면 증축 후에 성의 안과 밖에 거주하는 백성을 동원하기가 쉽지 않고, 성에서 적의 침입을 방어할 때 군량 조달이 쉽지 않기 때문에 수비가 성공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의견이 있기는 했지만, 국왕 영조의 의지를 꺾기 어려웠다. --- p.70~71 일반적으로 육군은 6승 40척짜리 포목을 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어영청이나 금위영의 보인이 내는 포목이 이 평균치에 가장 가까웠다. 이에 비해 훈련도감 포보가 내는 포목은 일반 육군보다 훨씬 좋았다. 어떤 자료에서는 7승포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기록에서는 8승포를 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수군은 보통의 포목보다 질이 좋지 않은 5승 35척짜리 포목을 냈다. 포목은그 질에 따라 가격이 책정되었다. 이들이 내는 포목의 가격 차이도 상당했다. 보통 6승 40척짜리 포목은 2냥으로 가격이 책정되는 데 비해 수군이 내는 포목은 1.6냥, 훈련도감 포보가 내는 포목은 3.5냥으로 책정되었다고 한다. --- p.83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의 군대는 급격히 약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방군의 훈련 정지와 노역 동원이 상시화됨에 따라 지역 방위가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서양 배들이 조선 해안에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배를 ‘모양이 다르다’라는 의미에서 이양선(異樣船)이라고 한다. 이 이양선은 당시 조선이 보유한 군선인 판옥선과 비교되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성능도 우수했다. 한편으로는 서양 종교인 천주교도 점차 그 교세를 넓혀 갔다. 천주교는 당시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학을 근본적으로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유교 국가인 조선에 큰 위협이 되었다. 일부 지식인은 천주교를 수용했지만, 지식인들 대부분은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 p.126~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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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에게 ‘조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보통 양반이나 선비의 모습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양반과 선비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니까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양반들의 삶뿐만 아니라, 상인과 농민들의 삶도 함께 바라봐야만 한다. 또 양반들의 삶 역시도, 중앙정치에서의 활동만으로는 충분히 이야기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처럼 국가가 편찬한 관찬 기록에서는 이들의 일상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행히도 개인의 일기나 서간집 등 다양한 사적 기록이 발굴됨에 따라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일기나 서간집을 남긴 사람들이 주로 식자층에 속하기 때문에 일정 부분 한계는 있지만, 그러한 식자층이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면서 주변의 이야기도 남겨 왔기에, 우리는 그동안 알기 어려웠던 주변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통생활사총서는 이처럼 조선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들을 따라서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가 몰랐던 조선 사람들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송나라처럼, 조선은 우리에게 ‘문약’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송나라가 마지막까지 몽골에 항전하며 그들을 골치 아프게 했다는 사실이나, 조선이 임진왜란 시기에 평양성 탈환 등 반격에 성공하기도 했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저 ‘이순신’으로 대표되는 일부 영웅들의 활약이나, 의병으로 대표되는 민중의 역할일 뿐이라고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영웅과 민중을 탄생시킨 것이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전란 속에서 활약한 것은 이러한 영웅과 민중만이 아니었다. 비록 사흘 만에 전멸했지만, 정발과 부산진 병사들의 분전은 갑작스러운 전란에 맞설 준비를 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 마치 6.25 전쟁기에 6사단이 북한군에 맞서 시간을 벌어 준 것처럼 말이다. 물론 조선의 군대가 말기에 가서 약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아도 튼튼한 국방의 유지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현재 우리나라도 군 자원의 부족이라는 위기를 겪고 있지 않은가. 과연 이러한 위기에 조선은 어떻게 대응하고자 했을까? 우리는 조선이 내놓은 답안지를 보면서 오답 노트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