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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4
들어가는 말 10 1. 호조의 기본 구조 17 호조(戶曹) 19 호조의 업무 21 호조 사람들 24 호조 판서의 역할 29 2. 왕대별 호조 판서들 33 광해군의 호조 판서 35 인조의 호조 판서 44 효종의 호조 판서 56 현종의 호조 판서 61 숙종의 호조 판서 70 경종의 호조 판서 87 영조의 호조 판서 91 정조의 호조 판서 99 순조의 호조 판서 121 3. 호조 판서를 고민하게 만든 문제들 127 대동법의 시행과 호조 판서의 자리 129 청 사신의 접대와 호조의 대책 132 국장 재원의 마련과 호조 판서의 역할 135 호조와 평안감영의 줄다리기 137 나오는 말 148 주석 150 참고문헌 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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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가 평시에 수행하는 업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녹봉과 급료를 지급하는 일이었다. 이때 지출하는 경상비 규모는 대략 쌀 12만 석이었다. 우리가 호조 재정이 대략 10-12만 석이라고 할 때의 그 비용은 녹봉과 급료에 한정된 것이다. 국가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관료들의 인건비를 모두 호조가 담당했기 때문에 재정적인 책임은 막중했으나, 전체 국가 재정의 경상비 규모만 보면 국가재정을 총괄하는 호조의 위상은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호조의 재정 업무와 책임은 사실 경상비 이외의 지출에서 잘 나타났다.
--- p.31 과거시험이 치루어지면 항상 종이값이 문제가 되었다. 원임대신들은 시지(試紙)의 품질을 문제로 삼았으나 호조 판서 민진장은 종이값은 조정에서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만 이번 과거에만 한하여 종이의 품질에 대하여 구애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과거 시험에 사용하는 종이는 매우 두꺼운데 그 제한을 풀어 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1689년 9월에는 평안도의 청북 지방과 함경도, 강원도에 한하여 한전(旱田)에 급재(給災)를 허락하도록 요청했다. 보통 급재는 수전에만 적용하는데, 이들 세 지역의 밭농사가 매우 흉년이었기 때문에 면세를 허락한 것이다. --- p.79 박문수가 호조 판서가 된 것은 1748년(영조 24) 4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호조 판서로서 박문수의 관직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대간(臺諫)에서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는 대의를 저버리고 대론(大論)을 주장한 훈재(勳宰)들을 비난하였다고 하여 배척을 받았다. 박문수는 당론을 비호하거나 유현(儒賢)을 업신여긴다는 말을 평소 자주 듣고 있었다. 그가 관직에 제수되면 대간의 공척(攻斥)은 늘 있는 일로 여겨진 정도였다. 그는 호조 판서에 있으면서 매우 강력하게 일을 추진하였다. 1748년(영조 24) 9월, 그가 대간의 배척으로 면직되고 다시 호조 판서에 제수되었을 때 사관은 “박문수가 탁지에 부임하여 강력하게 일을 해 나가면서 심력(心力)이 있게 헛된 비용을 절감했으므로 백성들에게 약간의 칭예(稱譽)를 얻었다. --- p.96 조선 정부는 청나라의 등장 이후 청 사신 접대에 많은 공을 들였다.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중원을 차지한 이후에는 청 사신의 왕래 횟수가 줄어들긴 하였으나 비정기적인 청 사신 접대에 들어가는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은으로 환산하더라도 수만 냥이 지출되었다. 청 사신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조선 정부에서는 영접도감을 설치하고, 정부의 모든 기능을 청 사신을 접대하는 데 집중시켰다. 영접도감에서도 다수의 재원이 지출되었기 때문에 호조 판서가 제조로 참여하였다. --- p.132~133 호조의 제도적 관점을 벗어나면 눈에 보이는 인물은 호조 판서였다. 호조의 업무를 총괄하면서 호조의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인물은 호조 판서였다. 그러므로 호조 판서는 경력이 있다고 하여 임명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호조 판서가 대간의 탄핵을 받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재무 관리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파직된 인물이 다시 임명될 수밖에 없는 것도 호조 판서로서의 재목을 쉽게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p.1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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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에게 ‘조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보통 양반이나 선비의 모습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양반과 선비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니까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양반들의 삶뿐만 아니라, 상인과 농민들의 삶도 함께 바라봐야만 한다. 또 양반들의 삶 역시도, 중앙정치에서의 활동만으로는 충분히 이야기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처럼 국가가 편찬한 관찬 기록에서는 이들의 일상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행히도 개인의 일기나 서간집 등 다양한 사적 기록이 발굴됨에 따라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일기나 서간집을 남긴 사람들이 주로 식자층에 속하기 때문에 일정 부분 한계는 있지만, 그러한 식자층이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면서 주변의 이야기도 남겨 왔기에, 우리는 그동안 알기 어려웠던 주변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통생활사총서는 이처럼 조선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들을 따라서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가 몰랐던 조선 사람들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조선의 재정에 대해 갖는 현대인들의 인식은 ‘수취’, 더 나쁘게는 ‘수탈’에 치우쳐 있기까지 하다. 한편으로는 세금에 대해 일반적으로 갖는 부담과 같은 부정적인 느낌이 투사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실제적으로는 조선의 재정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이 현실적인 이유일 것이다. 책에 따르면 최근 정조 연간 부세 총량을 기록한 『부역실총』이 데이터화됨에 정부의 재정 활동이 매우 다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즉, 조선의 재정 활동이 단지 수취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과정으로 재분배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밝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호조의 재정 운영에 대한 책은 많았지만 실제로 그 업무를 수행했던 호조 판서들의 면면을 소개한 책은 없었다. 다시 말해서,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의 재정 지출에 대한 내용을, 알려지지 않았던 호조 판서들의 시각에서 전개되어 그 관점이 새로우며 인물의 관점에서 사건을 전개된다는 점에서 이해가 매우 용이하다. 다양한 호조 판서들을 왕대별로 정리하여 대동법과 균역법의 시행으로 재정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다각화되었는지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제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