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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들어가는 말 1. 조선시대의 경강京江 성저십리城底十里로서의 경강 서울의 강, ‘경강’ 조선 후기의 경강, 8강八江 경강의 이원적 관리 경강의 방어와 치안 2. 경강에 사는 사람들, 강민 도성 안 경민京民과 경강 주변 강민 『북부장호적』에 보이는 강민의 실태 경강 변 신흥 주민으로서의 군병 경강 속 작은 섬의 사람들, 여의도와 율도 얼음을 떼는 사람들 화물의 운송, 마부색장馬夫色掌 엄웅찬嚴雄贊 3. 경강 변 사건·사고 경강 변 유흥 공간의 형성 마포 강변 어린이 살해 사건 미곡을 둘러싼 폭행과 살인 도성 주민들, 경강의 미상米商을 습격하다 관속官屬의 위세를 이용한 강민 살해 뚝섬 주민의 포교 폭행: 강민의 집단행동과 저항 4. 강민의 분쟁 및 갈등 강민, ‘호송지민好訟之民’으로 불리다 강민과 성균관 반인泮人의 분쟁 강민과 마계인馬契人과의 갈등 강민 간의 30년 분쟁: 주인권을 둘러싼 강민 간의 갈등 용산방 도화동桃花洞 외계外契 주민의 집단 소송 나오는 말 주석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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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강을 경강으로 부른 사례는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14년(태종 14) 전라도全羅道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 정간鄭幹이 삼남 지방의 조운에 관한 사항을 왕에게 보고하는 데서 처음 등장한다. 그는 전라도의 선군船軍이 매년 네 차례의 조운으로 농사 시기를 놓치므로 조운할 때마다 진포鎭浦에서 충청도 선군과 교체하여 경강으로 수송하는 방안을 병조에 요청했다. 이때 정간이 말한 경강은 지금의 한강을 의미한다. 조선 전기 경강이란 호칭은 조운제의 운영, 공사公私 물류 및 교역의 거점, 건설용 재목의 집하장, 세곡의 최종 종착점, 군사 훈련 및 산천제의 장소 등 도성 배후 하천으로서 강의 역할을 드러낼 때 사용되었다. 즉,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공적 기능을 담당하는 오늘날 한강을 말할 때 경강이라고 불렀다.
--- p.25 조선시대 사람들은 한양에 사는 서울 사람들을 어떻게 불렀을까.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의 연대기 자료를 보면 왕이나 관원들의 경우 서울 사람들을 ‘방민坊民’으로 호칭했다. 그 이유는 한성부의 행정구역이 오부五部-방坊-계契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지방의 사람들은 한성부의 방민을 ‘서울 사람’을 의미하는 ‘경민京民’으로 불렀다. 1769년(영조 45) 영조는 연화문延和門에 나가 공시인貢市人과 서울에 온 지방 백성에게 “대동법을 설치한 것은 향민鄕民을 편하게 하고 경민을 위하며 담당 관리를 위해 설치한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경민은 서울에 사는 한성부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지방의 향민과 대조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798년(정조 22)에는 지방에서 승호군陞戶軍을 뽑아 올리는 폐단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만약 향군鄕軍을 뽑아 올리는 규정을 폐지하고 그 대신 경민을 뽑아 들이면 정예 군사가 되어 폐단을 제거할 수 있어서 일거양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승호군은 조선 후기 군현마다 인원수를 할당하여 훈련도감 등의 군사로 충정充定된 지방민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승호군으로 선발되어 가족들과 함께 재산을 처분하고 서울로 올라오는 경우가 많아 폐단이 발생하기도 했다. 따라서 수령들은 향민보다는 서울에 사는 경민으로 승호군을 선발하면 정예 군병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의 속에서 조선시대 백성을 지방의 향민과 서울의 경민으로 구분해 호칭했다. --- p.59~60 뚝섬민의 집단 소요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자들의 직업도 짐꾼·마부 등 생활수준이 낮은 영세민이었다. 고덕철을 포교로부터 빼 오는 데 가담한 자들의 직업은 금난사령·짐꾼·마부·땔감 상인·국수 장수·술 장수 등이다. 뚝섬의 존위 홍희일이 사건의 주동자로 체포된 이경철·김관희·김순길 등 13명을 가리켜 ‘겸노의 무리(?奴之屬)’라고 말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천대받거나 생활수준이 낮은 영세민이었다. 이 사건은, 이들이 자기 일이 아닌데도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었던 데에 포교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 큰 원인이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경강의 강민은 시기가 지날수록 관속에 대한 침학을 거세게 받았으며, 19세기에 이르면 결국 관속에 대한 집단 대응으로 갈등을 표출하고 있었다. --- p.120~121 마포 강민과 반인 간의 분쟁은 현방이 반인의 세업世業으로 인식된 것처럼 마포 염해전은 마포 강민의 세업으로 그들이 가진 독점 영업권을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마포 강민이 가진 젓갈·소금의 독점권을 반인이 취한다는 것은 곧, 이 시기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구매와 유통권이 점차 경쟁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강민들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독점권 침해에 제동을 걸었으며, 7년간의 분쟁을 통해 이를 지켜 내고 있었다. --- p.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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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에게 ‘조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보통 양반이나 선비의 모습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양반과 선비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니까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양반들의 삶뿐만 아니라, 상인과 농민들의 삶도 함께 바라봐야만 한다. 그런데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처럼 국가 기록에서는 이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행히도 개인의 일기나 서간집 등 다양한 사적 기록이 발굴됨에 따라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일기나 서간집을 남긴 사람들이 주로 식자층에 속하기 때문에 일정 부분 한계는 있지만, 상인이 남긴 일기도 있는가 하면, 마을 사람들이 남긴 마을의 이야기도 있어 그동안 알기 어려웠던 주변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통생활사총서는 이처럼 조선의 변두리를 살아간 사람들의 일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들을 따라서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가 몰랐던 조선 사람들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도성 주위에 그어진 투명한 경계선, 경계 바깥에서 살아간 사람들에게 주목하다 바야흐로 많은 사람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한강을 즐겨 찾는다. 즐비하게 들어선 고층 건물들과 인파로 붐비는 한강. 언제부터 이 공간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을까? 한강 주변은 조선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거주 및 생활공간으로 변모했다. 도성 사대문 안으로 인구가 몰려 거주할 수 있는 땅이 부족했고, 자연스럽게 도성 바깥에 집들이 들어서면서 마을을 이루는 곳이 많아졌다. 한강 주변은 도성 밖의 주요 지역이었고, 조선시대의 한강은 전국 군현에서 거둔 세곡과 군량미가 수송되고 집결되는 거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군사들의 열병식 및 훈련 장소로도 이용되었고, 가뭄이 극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한강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는 주민에게 한강 주변은 생업의 공간이었고, 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운 경관을 제공하는 유람과 관광의 명소였다. 조선시대 서울 사람들은 도성 안의 사람들을 ‘경민’, 도성 밖 성 밑 사람들을 ‘성저민’, 한강 주변 사람들을 ‘강민’으로 구분했다. 강민은 한강의 주요 구성원이었으며, 지역 경제 활동의 동력원이었다. 그러나 도시와 비도시적 삶의 경계로 인해 도성 안 사람들과 구별되는 경향이 있었고, 도성 안 사람들과 경쟁하고 대립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토록 한강 지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강민에 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다. 『조선의 한강, 그 곁 사람들』에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시대 도성 밖 사람의 주요 구성원이면서 도성 안 사람과 구별되는 강민의 존재와 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책은 우리가 몰랐던 조선시대 한강의 기능과 도성 바깥에서 살아간 강민들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