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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들어가는 말 1. 양반들은 왜 그렇게 아들을 필요로 했을까? 후계자가 필요했던 양반들 적자가 필요했던 양반들 입양이냐 재혼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2. 입양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양자는 동종(同宗)의 지자(支子) 중에서 항렬도 따져야 했다 입양은 어떤 절차를 거쳤나 3. 잘 데려오고 잘 보내야 한다 양자가 몰고 올 수 있는 재앙 잘 골라 가야 한다 4. 어떤 양자가 인기 있었을까? 양부와 양자의 촌수는? 양자의 나이는? 5. 멀리서 데려온 양자들 가까운 후보를 제친 양자들 멀리서 온 양자들이 더 성공한다? 6. 입양은 누가 주도하는가 양부모 대신 입양을 주도할 사람은 누구? 아들을 주지 않으려는 친족들 양자를 둘러싼 가족 내 갈등 7. 양자를 되돌리는 파양 파양은 본래 인륜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파양 양가를 택할 것인가, 생가를 택할 것인가 8. 조선의 입양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입양 규정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입양 관습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9. 아들 교환은 어떻게 친족을 확대했을까 아들 교환으로 강화되는 부계 친족 종(宗)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다 나오는 말 주석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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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세 번씩 혼인하면서라도 아들을 얻어야 했던 양반들에게 경제력 하락은 큰 문제였다. 오늘날의 경남 산청, 옛 단성현에 거주하던 한 양반 가문의 족보를 분석한 연구는 양반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잘 보여 준다. 연구는 양반들이 점차 어려워지는 재혼 대신 선택한 것이 바로 입양이었다고 설명한다. … 사실 여러 차례 혼인한다고 하더라도 후사를 이을 아들의 출산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불확실한 문제였다. 반면, 아들을 입양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훨씬 쉽고 예측 가능한 방법이었다.
--- p.32~33 현재 안동 김씨 족보에는 김옥균이 양부 김병기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김병기는 김옥균을 파양하고 살길을 찾았지만, 아들이 없었으므로 다시 양자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한때 역적의 부친이었던 그의 아들로 들어오고자 하는 후보자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 김옥균의 사례는 입양이 개인에게는 성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물론, 양자의 잘못으로 양가는 물론 생가까지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아들을 주고받는 행위에는 적지 않은 위험이 따랐다. --- p.71 이토록 어려웠던 입양을 주도하고 국왕에게 청원하는 주체는 기본적으로 양부모였다. 조선 정부는 양부모와 생부모가 모두 생존한 상태에서 입양이 진행되는 것을 가장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형태의 입양으로 이해하였다. 물론 언제나 이렇게 네 명의 양부모와 친부모가 생존한 상태에서 입양이 진행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양가와 생가의 부모가 생존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는 입양은 특수한 경우이자 특별 허가가 필요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행히도 예조에서는 이러한 입양 청원들을 따로 모아 『별계후등록』이라는 책으로 만들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런 특수한 입양의 사례들이 조금이나마 전해진다. --- p.109 흥미로운 것은 파양을 명받아 드디어 역적의 외손자 신세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된 김광진의 반응이다. 오히려 김광진은 신문고를 치면서 파양의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청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광진의 청원에 영조가 답하기 전, 김광진의 양모이자 조태구의 딸인 조 씨가 사망하였다. 실록은 영조의 명령이 거두어지지 않았기에 양모의 상을 주관하지 못한 김광진이 몹시 슬퍼하여 죽으려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 상황을 본 영조는 김광진의 소원대로 파양의 명령을 취소하여 부자의 윤리를 보존시키도록 하였다. 더욱이 영조는 그의 효심을 높이 사 양모의 상을 마친 후 벼슬을 내리도록 명령하였다. --- p.142 조선시대에 가족은 일종의 종교였다. 유교가 국교이자 국시였던 조선에서 유교의 핵심 가치인 효, 그리고 부자 관계는 가히 종교적인 것이었다. 군신 관계에 적용되는 개념인 충이 효와 상충할 때도 효의 논리가 압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조선에서 입양은 가족의 영속성을 지켜 주는 필수적인 기제였다. 더구나 입양은 인위적으로 형성된 부자 관계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 아니라, 양부모의 노후 및 사후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해 주는 현실적인 도구였다. 친족 내에서 거듭된 입양은 아들을 교환하고, 또 공유하는 범위 내에서 점차 한 핏줄, 가족이라는 공동체성을 만들어 냈다. 그 범위가 확대되면서 부계 친족 집단, 즉 가문이 실질적인 힘을 가지게 되는 변화를 이끌었다. --- p.1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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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에게 ‘조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보통 양반이나 선비의 모습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양반과 선비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니까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양반들의 삶뿐만 아니라, 상인과 농민들의 삶도 함께 바라봐야만 한다. 그런데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처럼 국가 기록에서는 이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행히도 개인의 일기나 서간집 등 다양한 사적 기록이 발굴됨에 따라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일기나 서간집을 남긴 사람들이 주로 식자층에 속하기 때문에 일정 부분 한계는 있지만, 상인이 남긴 일기도 있는가 하면, 마을 사람들이 남긴 마을의 이야기도 있어 그동안 알기 어려웠던 주변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통생활사총서는 이처럼 조선의 변두리를 살아간 사람들의 일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들을 따라서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가 몰랐던 조선 사람들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덧 우리는 ‘딸바보’라는 말이 일상이 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만큼 딸은 우리 사회에서 귀한 자식이 되었고, 남아선호사상이라는 말은 이제 유명무실한 과거의 흔적이 되었다. 이런 사회 기조가 반영된 것인지 입양아 중에서도 국외로 입양된 남아의 비율은 80%에 달하는 반면, 국내로 입양된 남아의 비율은 40%를 밑돌고 있다. 이러한 요즘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후계를 세우기 위한 입양이 목적이었기에 입양이라고 하면 그 대상은 당연히 대체로 남아이기 마련이었다. 물론 대체로 남아인 까닭은 지금과 다르게 성인 남성이 입양되는 경우도 빈번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시대 양반 남성 중 30%가 넘는 사람이 입양되었다고 하니, 조선시대 양반들의 남아선호는 선호를 넘어 집착에 가까웠던 셈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토록 남아와 후계에 집착했던 것일까? 이 책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입양 관습과 아들 교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 책을 통해 주로 어떤 이들이 입양되었는지, 예컨대 그들의 나이는 어떠했고, 양부모와의 관계는 또 어떠했는지, 그리고 양부모들은 왜 양자를 입양하고자 했는지, 과연 어떤 절차를 거쳤으며, 혹은 누가 입양을 주도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다 보면 조선 사회의 가족문화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