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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4
1. 장쾌하고 호방한 일 좀 없을까? 9 유람이 제일이라 하는데_전통(傳統) 11 유람에도 체면이 있어야_명분(名分) 22 2. 그럼 어디로 떠날까? 31 죽기 전 꼭 한번 봐야 할 곳_금강산(金剛山) 33 조선 제일의 팔경이 있다는데_관동팔경(關東八景) 43 3. 평생의 소원을 다 풀었노라! 55 이보다 아름다운 곳 또 있으랴_탐승(探勝) 57 여기서는 붓을 씻지 못하겠네_제술(製述) 106 4. 낭만과 고통의 경계 115 이 좋은 날 흥이 없어서야_풍류(風流) 117 Please, 이제 그만_폐단(弊端) 136 5. 꿈에도 잊지 못할 여운을 남기고 151 이 여운 산수에 영원히 기리고파_각자(刻字) 153 그 감흥 곁에 두고 오래 품으리_기록(記錄) 1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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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은 선비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던 문화 행위였다. 유람 중 과도한 유흥으로 물의를 빚는 경우도 일부 있었지만, 대다수는 뚜렷한 명분과 목적의식을 가지고 유람을 결행했다. 그 목적의식이란 산수를 유람하고자 했던 그들만의 관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를 ‘산수유관(山水遊觀)’이라고 한다. 선비들이 유람을 가장 선호했던 것, 그리고 유람이 꾸준히 성행할 수 있었던 것도 그 타당한 명분과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선비 대다수는 유학자였다.
--- p.23 조선시대 한양에서 출발하여 관동을 유람한 대다수의 사람은 철원 → 김화 → 금성 → 회양 → 단발령(斷髮嶺) → 금강산으로의 노선을 택하여, 회양의 내금강만 보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거나, 고성으로 넘어가 외금강과 해금강을 유람한 후 다시 회양으로 넘어와 한양으로 돌아갔다. 관동팔경까지 보길 원하면 고성의 해금강에서 남하하여 관동팔경을 유람하고 강릉의 대관령을 넘어 한양으로 돌아가는 장기간의 노선을 택하였다. 한양을 출발, 강릉 대관령을 넘어 관동팔경을 먼저 보고 북상하여 고성 → 금강산 → 회양 → 금성 등을 지나 한양성으로 가는 반대 여정을 택하기도 했다. 통상 한양에서 금강산까지 도착하는 데에 7일 정도가 걸렸고, 금강산 내에서의 유람기일은 노정에 따라 짧게는 보통 4일, 길게는 14일 정도였다. 관동팔경까지 함께 보려면 한 달 이상이 걸렸다. --- p.58~60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한 선비들은 목도한 경치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 감탄의 심정을 시문으로 담아냈다. 관동의 경치는 시문 창작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문학적 감흥을 자아내던 곳이었다. 모두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관동을 유람한 대다수의 선비는 수많은 시문을 창작하고 돌아왔다. 관동을 소재로 창작한 현존 시문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선비들의 관동유람이 성행한 것도 있었지만, 관동에는 시문의 소재가 될 만한 수려한 경관이 여느 곳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 p.106 선비들의 유람에서는 술과 음악, 놀이 등이 수반되었다. 유람은 일상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가 공존하였으므로, 관동과 같은 지상의 신선 세계에서 술을 마시며 멋들어진 풍류를 즐기는 것은 유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유람에서의 멋과 운치가 있는 호방한 놀이는 풍류이자 낭만이었고, 이것이 볼썽사나워지면 유흥이었다. 유람 중 풍류를 즐기는 것은 노소(老少) 불문이었다. 당대 명망이 자자했던 대유학자들도 유람 중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들떠 나이를 잊은 채 덩실덩실 춤을 추며 유흥을 벌였고, 산중의 승려들과 술을 마시는 것도 다반사였다. --- p.117~178 우리나라 명승지로 꼽히는 곳에 가면 누정이나 바위 곳곳에 인명이나 시 등의 한문 문구가 새겨져 있는 것을 쉬이 볼 수 있다. 특히 인명이 많은데, 대부분 조선 선비들이 유람을 왔다가 새겨 놓은 것들이다. 새겨진 이름들은 유명 인사부터 무명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예로부터 이름났던 명승지의 바위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이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딘가에 자신의 이름과 행적을 남겨 기념하길 좋아한다. 조선 선비들이 유람 장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서 남기는 것은 현재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 행위와 흡사할 정도로 보편화된 관행이었다. --- p.153~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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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에게 ‘조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보통 양반이나 선비의 모습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양반과 선비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니까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양반들의 삶뿐만 아니라, 상인과 농민들의 삶도 함께 바라봐야만 한다. 그런데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처럼 국가 기록에서는 이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행히도 개인의 일기나 서간집 등 다양한 사적 기록이 발굴됨에 따라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일기나 서간집을 남긴 사람들이 주로 식자층에 속하기 때문에 일정 부분 한계는 있지만, 상인이 남긴 일기도 있는가 하면, 마을 사람들이 남긴 마을의 이야기도 있어 그동안 알기 어려웠던 주변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통생활사총서는 이처럼 조선의 변두리를 살아간 사람들의 일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들을 따라서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가 몰랐던 조선 사람들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람? 여행? 조선시대와 오늘날의 이심전심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벗어나 생각과 마음을 새롭게 하고자 여행을 한다. 작은 일탈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이를 통해 활력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과거에 다녀왔던 여행을 생각하며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언젠가 다시 떠날 여행을 생각하며 새로운 활력을 얻기도 한다. 다만 여행에 얼마나 ‘진심’인가의 문제일 듯하다. 여행에 대한 ‘진심’을 논하자면 조선시대의 선비들 또한 못지않았던 것 같다. 조선의 선비들 또한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소요했고, 다녀와서는 그 기억을 간직하고자 그림으로 그 정취를 다시 감상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기록으로 남겨 상상으로 유람을 다녀오기도 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보드게임을 만들어 유람을 떠나기도 했다. 오죽하면 유람을 떠나 안목을 넓히는 것이 선비로서의 의무라는 이해를 넘어 신하의 의무로 여길 정도였으니 여행에 대한 ‘진심’으로 말하자면 결코 현대인 못지않았던 것이다. 본 책은 이처럼 선비들의 유람 문화와 더불어 유람에 대한 간절한 염원, 유람의 폐혜, 대표적인 유람지 등 실제적인 역사와 문화를 다양한 에피소드와 결합하여 면밀하게 소개해 준다. 어떤 일을 깊이 이해하는 데 가장 탁월한 도움을 주는 방법이 있다면 단연 ‘공감’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선비들의 문화와 역사를 단지 지적인 차원을 넘어서 공감의 영역으로 이끌어 준다는 점에서 조선 선비들의 유람 문화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선사해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