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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들어가는 말 1. 혼인과 이혼에 관한 정책 혼인, 부부 관계의 성립 혼인 의식의 하이라이트, 친영례의 도입 배우자에 대한 의무 이혼 방식과 기처(棄妻) 규제 정책 2. 부부 생활의 실제 존중과 신뢰의 부부 관계 부부 사이의 갈등과 가정 폭력, 이혼 3.조선 전기 이혼의 실제와 이혼 판결 처를 버린 남편의 처벌 실행한 처와의 이혼 시부모에 불효한 처와의 이혼 기처 규제의 효과와 한계 4. 조선 후기 사회 변화와 이혼 판결 속환(贖還)되어 온 여성과의 이혼 역가(逆家) 이혼 유정기, 신태영 부부의 이혼 소송 5. 부부 관계와 이혼 판결에 반영된 개인, 사회, 국가 주석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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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종 대에 사대부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재가 규제법이 제정되면서 수절만으로는 포상 대상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양란 이후 처의 절의가 더욱 강조되어 극단적 형태의 절의도 칭송의 대상이 되면서 조선 후기에는 남편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성들이 포상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여성들은 남편이 사망하면 남편을 따라 자결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게 되었다.
--- p.34 남편에게 절의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처에게는 재가를 규제했지만 남편에게는 중혼을 금지했을 뿐 처가 사망하면 다시 혼인할 수 있었다. 1413년(태종 13) 사헌부에서는 고려 말에 예(禮)와 의(義)의 교화가 행해지지 못하고 부부의 의가 문란해져 욕심만을 좇고 사랑하는 마음에 혹하여 처가 있는데 처를 맞이하고 첩을 처로 삼는 자가 생겨났다고 했다. 이로 인해 소송이 일어나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고 변고가 발생하는 데 이르렀다며, 처가 있는데 다시 처를 맞이한 자는 『대명률』에 의해 장 90에 처하고 뒤에 맞이한 처를 이이(離異), 즉 관에서 이혼시키기를 청했다. 이는 왕의 윤허를 받아 법제화되었다. 이에 따라 처가 있는데 다시 혼인을 하면 처벌되었을 뿐 아니라 두 번째 혼인은 무효가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맞이한 처와의 사이에 자식이 있으면 그 자식은 첩자녀로 취급되었다. 이 중혼 금지법 제정으로 조선에서는 일부일처제가 정립되었다. 그러나 이는 처가 있는데 처를 맞이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었을 뿐 첩을 두는 것은 제한하지 않았다. --- p.40~41 그렇다면 처가 고소와 이혼을 통해 남편의 폭행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 p.72 조선 정부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처를 승인해 주지 않고 처를 버린 자를 처벌했고, 버린 처와 다시 합하여 살도록 처분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행정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다시 함께 사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다만 관직을 제수받을 때 처를 버린 행적과 재결합의 명을 받고서도 함께 살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또한 구영안의 사례에서처럼 재결합 처분을 받았는데 다른 여성과 혼인한 경우, 적발되면 처벌되었다. --- p.97 한편, 남편에게 심한 말을 하거나 욕을 했다고 하는 ‘패악한 여성’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남성들은 첩을 얼마든지 둘 수 있었던 반면 처는 아무리 남편과 관계가 나빠도 이혼을 요구할 수 없었고, 혹 이혼이 성립되었다 하더라도 재가 규제법 제정 이후 양반층 여성은 재가할 수 없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악화된 부부 관계를 지속하면서 처의 불만이나 스트레스가 표출되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부덕을 지키는 처, 시부모나 남편에게 순종하는 처를 바라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처의 단순한 불만 표출이 과장된 채 소문난다면 그 여성은 처의 도리를 지키지 않으며 남편이나 시부모에게 욕하는 여성으로 낙인찍히게 되는 것이다. --- p.1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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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에게 ‘조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보통 양반이나 선비의 모습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양반과 선비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니까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양반들의 삶뿐만 아니라, 상인과 농민들의 삶도 함께 바라봐야만 한다. 그런데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처럼 국가 기록에서는 이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행히도 개인의 일기나 서간집 등 다양한 사적 기록이 발굴됨에 따라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일기나 서간집을 남긴 사람들이 주로 식자층에 속하기 때문에 일정 부분 한계는 있지만, 상인이 남긴 일기도 있는가 하면, 마을 사람들이 남긴 마을의 이야기도 있어 그동안 알기 어려웠던 주변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통생활사총서는 이처럼 조선의 변두리를 살아간 사람들의 일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들을 따라서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가 몰랐던 조선 사람들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혼이란 부부가 합의 또는 재판에 의하여 혼인 관계를 인위적으로 소멸시키는 일이다. 서로 간에 사랑이며 믿음으로 백년해로를 약속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바뀌고 마음이 변하면 혼인관계의 해소는 피할 수 없다. 오늘날에는 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만으로 그 절차가 마무리될 만큼 이혼이 손쉬워졌고, 주변 사람들의 냉랭한 눈초리가 갈수록 누그러지고 있다고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일반 사람들은 처를 버려 혼인관계를 끝내기도 했으나 관원들이나 관원이 되려는 사람들은 함부로 처를 버릴 수 없었다. “사헌부에서 이유 없이 처를 버렸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 처벌받을 수 있었고, 관직 진출에 장애가 될 수도 있었다.” 부부 생활이라는 게 두 당사자만의 일이지만 그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과 이혼에 대해서는 사법기관과 행정기관을 거쳐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는 관에서 남편 측과 처 측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혼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하면 잠재해 있던 각종 문제들이 드러나게 된다. 또한 분쟁을 조정하고 판결하면서 부부 관꼐에 대한 정부기관과 지배층의 입장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저자 박경 교수는 이혼이 쉽지 않았던 배경과 그 실상, 이혼 정책의 시기별 운용 방식의 변화, 이혼을 둘러싼 분쟁과 판결에 드러난 부부 관계에 대해 이 책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