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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칼집 하여간, 무거운 도화지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왕고들빼기 붉은 수수밭 뻘밭 운석 바로크가구 불면 복사꽃은 슬프다 대숲 항아리 원천리 파밭 묵정밭 고등어 아버지의 문신 개골산 바위 봄불 검버섯 강을 보고도 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막 모래여자 자궁 속의 사막 모래산 안압지 폐경 무렵 폐가 냉장고 후끈거리는 단풍나무 나무 눈 내리는 얼음식탁 구름바지 상처의 힘 먹구름 고양이 경전 고독의 뼈 푸른 늑대의 시간 고요한 저녁 아스피린 거울 속의 거울 장바구니를 던지다 김치를 쏟다 3월의 전화 너무 넓은 창 귀-1 귀-2 나는 날마다 나를 반죽한다 윷에 대한 관찰 11월 달팽이 뿌리에 잠들다 초경 해 설 상처와 관능, 혹은 운명의 형식 | 이숭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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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관능, 혹은 운명의 형식
2002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한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안명옥의 시는 상처로 얼룩져 있다. 상처의 개관 없이는 안명옥의 시를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상처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안명옥 시의 장기인 비유의 특성을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비유는 시의 문맥은 물론이고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밀착되어 독특한 여성성의 형질을 펼쳐내기 때문이다. 사람이 칼의 속성을 지니고 남을 베거나 자신을 베는 상처의 세월을 살면서도 욕망을 키우고 자신의 터전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칼집이 있기 때문이다. “위험한 너를 온힘으로 떠받드는” 아랫목이 칼집이고 존재를 “칼로 보전해 주는 유일한 집”이 칼집인 것이다. 칼집이 있기에 칼이 존재할 수 있다. 칼집은 칼이 만들어낸 수많은 상처의 궤적을 “부드러운 혀로 핥아”주기까지 한다. 이것은 아픔과 상처를 쓰다듬고 보듬어 견고한 표피의 안쪽으로 쟁여 넣는 방법이다. 많은 상처를 외피 안으로 끌어들인 묵중한 고목처럼 칼집은 그 안에 칼의 날카로움을 감싸며 안식의 시간을 마련해 준다. 시인이 이 안식의 상징을 발견한 것은 여성적 동일성의 인식 때문이다. 고등어의 푸른 멍을 보고 등 굽은 어머니를 자신의 등에 업을 때, 새로운 삶의 식욕이 돋고, 칼이 새 길을 뚫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기고, 칼집에 스며들어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여유가 형성된다. 이러한 인식과 예지가 그의 줄기찬 시작 과정에서 생성된 것이니 그의 시 쓰기는 미래의 지평을 향해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오랜 시간을 버틴 교목의 몸짓처럼 은은한 미풍에 흔들리며 상처의 세월을 감싸 안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시는 인고의 회랑을 넘어 생명의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