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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광
채길우
창비 20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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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책소개

목차

간병/보청기/첼로/껍질/도공/구두/일출/승진/비닐봉투/왼손/병원/목련/잎망울/측정/철봉/겨드랑이/소원/걸음마/산수국/은행/월경/수정/운명/신발/독서/해바라기/발아/움/숨/배추밭/별똥별/백발/치매/계부/용접/성냥/음악/분홍달/분재/자유/첫사랑/미역국/맥박/하품

시인의 말

저자 소개 1

2013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매듭법』 『측광』이 있다. 김만중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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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8월 23일
쪽수, 무게, 크기
104쪽 | 152g | 125*200*20mm
ISBN13
9788936424923

책 속으로

새하얗고 너른 침상 위로
너무 일찍 떨어진 감꽃에
어린 벌이 찾아와 있다.

싱그러운 초록과 비린 향기가
미처 식지 못한 꽃잎들을
벌이 허리 굽혀 어르고 매만진다.

창백한 꽃의 얼굴에 더 가까이 벌은
설익은 꿀이 말라붙은 입술을 핥고
푸석해진 화분을 살결에 펴 발라준다.

꽃은 작고 벌은 서툴다. 하지만
꽃은 다 시들지 않았고
벌은 좀처럼 날아가지 않는다.
---「간병」중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이는 병자다.
확실하고 부재하는 장면들이 더 많이 보이는 이곳에서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하지만 환자들은 내가 건강하다고 말한다.
강자들은 내가 미쳤다고 말한다.
눈에 어른거리던 유령들은
긴 복도를 관통해 사라져가면서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

어느 날은 아무도 없는 뜰로 나간다.
커다란 나무가 올려다보이는 그늘에 쪼그려 앉아서
빛이 보여, 빛이 보여, 발작을 해가며
어둠 속에서조차 부신 눈을 뜨지 않은 채
나는 없는 것만 믿는다.
---「병원」중에서

비구는 읊조리던 불경을 거두고 목탁을 놓는다.
테두리가 갈변한 두 손을 합장해 반배를 올린 뒤
목 꺾어 연기로 살 내음 사리는 향불과 함께
천천히 무릎부터 무너지며 엎드리기 시작할 때
창백하고 표정 없는 뒤통수 곁에서
구겨져 떠오르는 손바닥은 이미 모든
소리를 다 들은 귀처럼 고요하고
팔꿈치를 괸 삭은 뿌리 아래
텅 빈 두 발을 뒤집어 서로를 포개면
시들도록 저문 겹겹한 묵언들과
미처 떨구지 못한 한잎의 입술이
깊게 파인 이마 짚고 오래 기다렸던 자리로
새하얀 빛이 고여 한참을 늙어가는 동안에도
그는 한그루의 품이 너른 잿그늘을 두른 채
바닥에서 웅크린 몸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다
---「목련」중에서

우리의 수명이 평생
말할 단어의 개수로
정해져서 우리가 태어나고
삶이 시작된다면

우리는 겨우 할당된
단어만큼만을 말하다가
더이상 할 말이 없을 때나
너무 많은 말을 했을 때

죽게 된다면, 그러나
우리에게 제한된
단어의 수를 모른 채
살아가야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고요해질까
욕과 정치 공방과 거짓말 들이 사라질까 혹은
생은 헛소리와 뜬소문과 쓰레기에 불과할까
가사가 있는 노래는 보다 소중할까
---「운명」중에서

한산한 오후의 지하철
휘어진 소나무 한그루가
노약자석에 앉아 있다.
새파랗고 드셌던 침엽의 숱은
서리가 내려 듬성하고
고목이 된 얼굴과 손등에서도
껍질 터진 틈새가 거칠다.
해풍에 맞서 절벽의 바위틈까지
저 홀로 나아갔던 튼튼한 허리와 뿌리도 곱아
해안 같은 그림자 위로
부드럽고 아름다운 순환선을 드리운다.
철컹철컹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도
더이상 먼바다는 보이지 않는
어두운 지하의 통로와 규범을 따라
발 벗고 조그만 화분 속에 심긴 나무는
언젠간 모두가 소유하게 될 예언처럼
당연하고 불가능한 자세로
고개 꺾어 졸고 있다
---「분재」중에서

그가 평생을 사용한
일인용 흔들의자에 기대어
깜박 잠이 들고 나면
몸을 뒤척이지 않아도
발 구르지 않아도 의자는
그의 옅은 호흡에 맞춰
조그만 긍정의 속도로
삐걱대는 어깨를 가누고
고개를 내밀며 다가가
그에게 속삭인다. 다만
두려워 말라, 멈추지
않는 기울기와 끄덕이는 황혼에
관한 그의 낡고 비낀
꿈에게도 절룩여 말한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맥박」중에서

출판사 리뷰

“빛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닌 깜빡임”
깊고 어두운 현실에서 길어 올린 작고 여린 빛 한조각


채길우의 시는 고독과 슬픔, 병과 죽음 같은 삶의 어둔 자리를 짚어나간다. 시인이 “기약 없는 천국보다 낮은 자리”에 만연한 “적막과 어둠과 공포”(「구두」)에 주목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런 그늘과 같은 시간을 시야의 사각지대에 접어두기 때문일 것이다. 불편하고 두려워서 많은 이들이 멀리하는 이야기에 시인은 바짝 다가서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미세한 기척까지도 놓치지 않고 묘사한다. 그래서 언뜻 쓸쓸하고 음울한 흑백사진 같기도 한 그의 시에서는 “스스로 내쉬는 호흡에도 온몸이 흔들리”는 육체의 “구겨진 피부”(「비닐봉투」)에 깊게 박힌 잔주름까지 자세히 보이고 “스무살이 지나도록 말을 배우지 못”한 아이의 입에 “새로 고이는 침 줄기”(「숨」)도 선명하게 빛난다. 피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한 현실에서도 어떻게든 스스로 “살아 있음을 확인”(「측정」)하며 살아가는 가녀린 존재들의 삶에 진심으로 감응하는 시인의 언어는 별다른 수사나 감정을 내세우지 않음에도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외롭고 허름한 삶 속에서 흔들리는 존재들을 담담히 들여다보는 시들을 하나씩 읽어나가다보면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지금의 세상이 “제정신으로는 좀처럼 믿을 수 없는/뼈아픈 허구”(시인의 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무언가를 참고 견디는 것처럼 꽉 오므려져 있던 주먹이 풀어져 “푸르고 자그마한 조약돌/하나”(「잎망울」)를 보여주듯 시인의 집요한 응시가 결국에 가닿는 곳은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사랑과 희망의 기미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그의 시 속에서 누군가는 오직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하여”(「구두」) 따스한 손길로 다른 이의 “찢기고 바스러진 몸을 껴안”(「소원」)고 “파이고 금이 간 자국을/닦아주어야”(「도공」)겠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더 깊은 아픔과 수고로움에도 불구하고”(「산수국」) 기어이 타인을 위하는 장면 앞에서 우리는 “아무도 없는/현관이 저절로 점등되는”(「구두」) 것처럼 잠시 반짝 켜지는 희망을 실감한다. 현실의 무게에 조금은 일그러지고 구겨지더라도 인간답게 살아가려고 묵묵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채길우의 시는 언제나 그곳에 가장 먼저 도착해 가장 오래 머물며 그들의 고독과 희망을 계속해서 기록해나갈 것이다.

시인의 말

타인들을, 심지어 자신조차 완벽히
속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만 진실을 실토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강렬하고 사무치도록 충격적이어서
제정신으로는 좀처럼 믿을 수 없는
뼈아픈 허구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말, 역시
그러하다.

2023년 8월
채길우

추천평

이 시집은 지켜내는 일로 가득합니다. 전철 바닥에 떨어진 할머니의 “분홍빛 자두”를 지켜주기 위해 “앉아 있던 이들 모두가/일어나 멀리 굴러가는/자두를 허리 굽혀 줍고”(「분홍달」),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는 흔들리면서도 “갸우뚱거리는 중심”을 지키기 위해 “열심을 다”(「걸음마」)하는 중입니다. 한 어머니는 “오토바이 사고로 의식을 잃은”(「껍질」) 자식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소중한 대상을 지켜내는 일은 아름답고 숭고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허름하고 외로운 차림의 소년”은 “푸르고 자그마한 조약돌”(「잎망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입 앙다물고 주먹질을 견뎌야 하고, “물방울만큼 가볍고 연약한” 여자는 “스무살이 지나도록 말을 배우지 못”(「숨」)한 아이를 보살피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합니다. 지켜내는 일은 때로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합니다. 그러나 끝내 실패에 도달하리라는 예감 속에서도 지켜내는 일은 계속됩니다. 지켜내고자 하는 마음이야말로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의지”(「숨」)일 테니까요. 그래서 그 마음을 지켜보는 채길우 시인의 노력도 계속됩니다. 아름답고 숭고한 노력은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 유병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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