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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해설 ㅣ 표류, 혹은 근원에로의 항해 르 클레지오 연보 |
Jean-Marie-Gustave Le Clez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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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 그때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너무 어렸던데다가 그 후에 살아온 모든 나날이 그 기억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 일은 차라리 꿈이랄까, 아득하면서도 끔찍한 악몽처럼 밤마다 되살아나고 때로는 낮에도 나를 괴롭힌다. 햇살에 눈이 부시고 먼지가 날리는 텅 빈 거리, 푸른 하늘, 검은 새의 고통스런 울음소리, 그때 갑자기 한 남자의 손이 나를 잡아 커다란 자루 속에 던져넣고, 나는 숨이 막혀 버둥거린다. --- p.9
처음으로 나는 멀리 떠나고 싶었다. 저 산들을 넘어 힐랄의 나라로 가 내 엄마와 내 부족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고, 나 자신이 귀고리를 들여다보며 지어낸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84 우리가 떠나려 할 때, 그는 다시 나의 얼굴을 마지고 내 눈과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라일라야, 너는 아직 어리니까 조금씩 세상을 알아나가기 시작할 거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는 도처에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될 테고, 멀리까지 그것들을 찾아 나서게 될 거야.” 마치 그가 내게 축복을 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 대한 경의와 사랑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 p.147 어느 날 아침 나는 그 중 한 마리가 깃털이 엉망이 된 채 창틀 위에서 기진맥진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 참새에게 해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고는 벽장에서 구두가 들었던 판지 상자를 꺼내어 안에 솜을 깔아 포근한 둥지를 만들었고, 아기의 방으로 가져다가 요람 옆에 놓았다. 나는 따뜻하고 다정한 마음으로 충만해 있었다. 이 세상에 비열한 것도, 건달들도, 형사들도, 얻어맞는 여자들도, 겉창이 닫힌 누추한 방에서 굶어죽는 노인들도 없다고 믿고 싶은 심정이었다. --- p.194 더 이상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이제 나는 마침내 내 여행의 끝에 다다랐음을 안다. 어느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다. 말라붙은 소금처럼 새하얀 거리, 부동의 벽들, 까마귀 울음소리, 십오 년 전에, 영겁의 시간 전에, 물 때문에 생긴 분쟁, 우물을 놓고 벌인 싸움, 복수를 위하여 힐랄 부족의 적인 크리우이가 부족의 누군가가 나를 유괴해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바닷물에 손을 담그면 물살을 거슬러올라가 어느 강의 물을 만지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사막 먼지에 손을 올려놓으며, 나는 내가 태어난 땅을 만진다, 내 어머니의 손을 만진다. --- pp.275~276 |
새로운 출발, 시적 모험, 관능적인 희열이 넘치는 작품, 지배적인 문명 너머 또 그 아래에서 인간을 탐사한 작가. - 2008 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
‘현대 프랑스 문단의 살아 있는 신화’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로 불리며 200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르 클레지오의 작품으로, 현대 문명의 난폭함과 현대인의 정신적 공황을 다뤘던 초기 작품과 달리 서양 문명을 탈출하여 자연으로 회귀함으로써 인간의 강인한 생명력과 원시의 힘을 그려낸 후기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나고 자랐는지도 모른 채 예닐곱 살에 인신매매단에 납치되어 숱한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세상을 표류하던 한 어린 소녀의 ‘근원 찾기’를 작가 특유의 서정적 언어로 아름답게 그려낸 이 작품은 1997년 프랑스에서 출간되자마자 순수문학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장기간 베스트셀러 1위의 자리를 지켰다. 2008년 노벨 문학상 수상 1997년 장 지오노상 수상 프랑스 현대 문단의 살아 있는 신화로 불리는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는 1997년 프랑스 갈리마르 사에서 출간되자마자 순수문학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장기간 베스트셀러 1위의 자리를 지킨 작품으로, 예닐곱 살 때 유아 인신매매단에 납치돼 팔려간 한 소녀의 인생역정을 다루고 있다. 물화되고 기능화된 현대 도시문명의 공격적인 현실 앞에서 인간의 자리와 삶의 의미에 대한 전면적인 회의를 수행하는 과정을 다룬 초기 작품들에서, 파나마 등지에서 인디언들과의 생활을 통과제의처럼 치르고 난 뒤 기계문명의 부정적인 그림자를 뒤로하고 인간의 본원적인 감성과 자연의 매혹이 영원한 침묵 속에 배어 있는 시원의 땅으로 찾아들어간, 필력 30년을 넘어선 작가 르 클레지오의 사상적 변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왜 언젠가는 달아나지 않을 수 없는가” “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밤'이라는 뜻의 라일라라는 이름의 이 소녀에게 남은 어린 시절의 기억, 그러니까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밝혀주는 유일한 기억은 햇살이 내리쪼이는 눈부시게 하얀 거리, 비명처럼 고통스레 내지르는 까마귀 울음소리, 그리고 어린 그녀를 잡아 검은 자루 속에 집어넣는 커다란 손뿐이다. 그녀는 랄라 아스마라는 노파의 집으로 팔려가 그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지만, 그녀에게는 세상 전부인 그곳에서의 삶도 언제나 그녀의 여린 육체를 탐하는 노파의 아들이 있고 그녀를 학대하는 며느리가 있기에 그리 녹록치 않다. 노파가 죽고 나자 오갈 데 없어진 라일라는 우연히 알게 된 거리의 여자들이 살고 있는 수상한 여인숙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 아름다운 ‘공주님’들(라일라는 창녀들을 그렇게 부른다)과 살면서 세상에 눈떠간다. 숱한 역경과 고난을 거쳐 프랑스로 밀입국한 라일라의 삶에, 그때부터 자기를 찾기 위한 기나긴 항해가 시작된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언젠가는 달아나지 않을 수 없는가?” 표류가 끝나는 곳, 그곳에서 그녀는 황금의 물고기로 다시 태어났다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언제나 다른 사람, 다른 사물들 사이를 누비며 살아가고 싶어하는 그녀. 그러나 그녀는 발 딛는 곳 어디에서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방인임을 절감하며 끊임없이 표류한다. 프랑스를 전전하다 미국으로 그곳에서 다시 프랑스로, 그리고 아프리카로. 마침내 아프리카의 모래 먼지 자욱한 땅, 그녀의 조상이 수천 년 전부터 간단없는 삶을 살아왔던 그 땅에 발디딘 순간, 그녀는 본디 자기가 서 있어야 할 곳, 나고 자란 그곳에 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제까지의 기나긴 표류가 결국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한 오랜 항해였음을 깨닫게 된다. 세상이라는 탁류에 휘말린 물고기이지만 그녀에게는 원래부터 황금 비늘이 달려 있었고, 아프리카 모래사막 위에서 그녀는 드디어 그 황금 비늘을 번뜩이는 황금 물고기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녀의 기억은 그녀가 유괴되었던 15년 전을 뛰어넘어 영겁의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말라붙은 소금처럼 새하얀 거리, 부동의 벽들, 까마귀 울음소리 가득한 사막에서 그녀는 자신의 흑진주처럼 까만 속살 아래 메아리치는 심장 박동 같은 북소리, 그녀 부족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유럽인들이 짐승 굴이나 진배없는 지하동굴 속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을 무렵에 이미 문명화된 삶을 누렸던 이들이 부르는 시원(始原)의 노래, 우리 시대의 랭보 르 클레지오가 들려주는 것은 바로 이 생생한 태고의 노랫소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