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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신들을 위한 여름
트라우마 라이브 연착 몬순 폭서 상도동 신들을 위한 여름 아프리카 커피 자루 여름의 사실 하경(夏景) 잔서(殘暑) 여름잠 제2부·돌이키지 않아도 온 마음인 것으로 회복기 도벽 결심 남아 있는 나날 너의 낮잠 미아리 유기 월동 조명 가게 은하수비디오 컷트 올무 망정 제3부·에스키모의 나라 삭제 장면 리얼리티 팩트 체크 열린 결말 뜬눈으로 와사비 휴일 에스키모의 나라 소금과 빛 안식년 측량 경주 간절기 제4부·시절은 이제 상관도 안 하고 입춘 입춘소묘 사랑 단둘 창원 안양 내담 기도하고 있어요 춘분 희우 제주 삼천포 곡우 무렵 주문 해설|임지훈 시인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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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그머니 볕이 그늘로 들어온다
팔월 목전에는 볕도 버거운가보다 그늘은 기꺼이 자리를 내주고 처지와 사정을 서로 묻고 답하며 처음 만난 사이에도 알록달록한데 지나가던 바람이 어디 길을 묻길래 책을 덮고 내가 먼저 가르쳐준다 ---「폭서」중에서 초여름도 모자 벗고 인사를 다 했다 날마다 내가 오늘 본 가장 아름다운 나를 두고 그대라고 부르는 사람을 나 또한 그대라고 부르면서 그대의 그대가 되는 일은 이 세상의 좋은 일이고 여름 한철로부터 결국에 위임장을 받은 그대는 수개월 뉘엿대는 마음 이제 없이 낮곁을 늘려 여러 꽃말을 수소문한다 밤이 오면 흰 비를 데워 가져다준다 그때 나는 보채지 않고 말곁도 없이 연해지는 방법을 하릴없이 배우는데 전에는 스스로 괴롭히며 얻었던 것들이다 조용히 그러모아 그대는 녹지를 조성한다 그런 다음 군데군데 새소리를 마련하고 누구나 쓸 수 있게 해놓지만 가장 작고 촘촘한 새장은 내 몫이라 한여름에 사랑이 주인 노릇을 한다 ---「여름의 사실」 전문 오전에 부탁한 바람이었다 제시간에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즈음 매일 예쁜 금잔화를 바라보며 그것의 어두운 꽃말을 입으로 외면서 해안선을 정돈하며 바로잡는 중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 되어가는 중 (…) 내가 믿어지기를 바라는 사람 눈동자를 에워싸고 핀 꽃에 물 주며 하느님의 피로를 느낀 적이 있다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하는 일은 그만하고 싶습니다 지금 제가 무슨 말 하는지 다 아시죠 ---「회복기」 부분 휘청거리다 넘어지려다 그래 무너지자, 하고 마음먹은 나를 옆에서 꼭 붙잡는 사람은 마치 곁에 있는 사람처럼 그리워하지도 잊지도 않은 채 마음의 눈으로 보았다 절대로 지지 말라는 듯 무너지는 마음 정도는 괜찮다는 듯 ---「결심」 전문 어쩌다 겨울을 내처 지내버린 이파리는 버석대며 떨어져서 비로소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른 봄의 맵고 스산한 바람 이런 바람을 소소리바람이라고 일러준 사람 곁에 아직 매달려 바래도 앙상해도 봄의 한창으로 계속 가는 일은 내가 자주 하는 사랑 녹색이 보이면 혼자서 하고 싶은 오해를 하기 위해 아름다움을 다시 믿는 내가 나를 보러 오곤 할 것입니다 ---「사랑」중에서 톡톡 물 떨어진다 쌓인 눈이 녹아 높은 데서 물 떨어져 내린다 길게 뾰족이 얼어 매달리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거기 아직도 볕바를 자리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이제 눈뜨고 일어나 얼굴 씻고 나와서 빗자루로 눈 치우면 느리게 나타나는 볕에 나의 응달쪽 내줄 일이다 제비도 고양이도 무당벌레도 와서 그 눈석임물 먹을 것이다 ---「희우」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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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사실』은 기쁨도 슬픔도 무성하고 열렬했던 ‘여름’에 관한 기록이다. 시인은 “그게 여름이었다”(「트라우마」)라는 한마디로는 요약될 수 없는 시절이 남긴 아름답고 애틋한 풍경들을 담담하면서도 감미로운 문장으로 한겹씩 풀어놓는다. “그대의/그대가 되는 일은 이 세상의 좋은 일”(「여름의 사실」)이라고 속삭였던 사랑의 순간을 또렷이 재현한다. 불화와 이별의 장면조차 빛나는 기억처럼 재생되는 시편들을 읽어나가며 독자 또한 삶에서 ‘여름’이라고 할 만한 시절을 곰곰이 떠올려보게 된다. 동시에 날카로운 통증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시인이 “물론 다 지난 일입니다”(「열린 결말」)라고 덧붙이며 그가 서 있는 곳이 이미 한 시절이 끝난 황량한 자리임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 되어가는 중”(「회복기」)과 같은 구절에서도 과거를 향한 그리움이 짙게 묻어나지만, “과거를 다시 돌보아/현재를 돕고 싶”(「리얼리티」)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이 여름의 기록이 지난날에 관한 것임에도 결국 앞으로의 날들에 바쳐지는 것임을 일러준다.
“거기 있는 것들이 너한테 상냥하길” 지나간 계절과 당신에게 건네는 다정한 진심 시인에게 지난날을 받아 적는 일은 스러지는 것들을 그저 스러지게만 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자 남은 삶에 “아직도 볕바를 자리 있는 것”(「희우」)을 믿기 위한 노력이다. 그것은 또한 찬란했던 관계도 언젠간 저물고 끝까지 팽팽할 것 같던 마음도 느슨해지는 세상에서 쉽게 허무와 비의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한 실천이다. 시집 곳곳에 “모든 일은 과거가 되어”(「리얼리티」)갈 뿐인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스미어 있지만, “바래도 앙상해도 봄의 한창으로/계속 가는 일은 내가 자주 하는 사랑”(「사랑」)이라고 되뇌며 슬퍼하지만은 않는 것이 전욱진의 시 쓰기이다. 그렇게 감상에 치우치지 않고 과거를 적어 내려갈 때 지나간 모든 순간을 향해 “거기 있는 것들이 너한테 상냥하길”(「남아 있는 나날」)이라고 산뜻하고 의연하게 끝인사를 할 수 있게 되고, 한 시절이 닫힌 자리가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곳”(「간절기」)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때에 이르면 과거의 잔해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누구든 시 속에서 작지만 선명한 희망을 마주하게 된다. 시인은 시 쓰기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쓸쓸함으로부터 구원할 뿐 아니라 속절없는 세상을 함께 슬퍼하는 다른 존재들에게도 관심과 연민을 기울인다. “혼자 주저앉아/우는 거 같은 사람”(「삭제 장면」)의 사정을 궁금해하고 세상의 ‘비탈’에 “간신히 붙박이며”(「상도동」) 살아가는 존재들의 일상을 유심히 살핀다. 또한 “생활이 무거워 종일 울고 싶다는 사람”과 “지금 죽을 만큼 아프다는 사람”(「컷트」)들의 소식을 듣고 안녕을 바란다. 나아가 그런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에//그래도 한번은 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팩트 체크」)고 말하며 무너져가는 풍경에 희망과 사랑을 새로이 새겨나간다. 이 시집이 끝내 세상을 감싸 안으려는 시도로 와닿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여전히 세상사에 어둡고/언제나 사람이 어렵다”(시인의 말)라고 말하는 전욱진 시인은 그렇기에 늘 세상과 사람의 가까이에서 오래도록 시를 써왔다. 『여름의 사실』은 그간 “가슴에 이를 만큼 쌓이고 쌓여/깊어진 말들”(「창원」)이 처음 빛을 보는 자리이다. 이 자리에서 독자는 무엇도 영원하지 않은 세상의 쓸쓸함을 위로하기로 결심한 한 사람의 담담한 용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말 마음과 기억은 대개 같은 말이고 자주 내 편이 아니었다 다만 나를 뚫고서 지나간 것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여전히 세상사에 어둡고 언제나 사람이 어렵다 사랑하지만 용서는 하지 않은 그 모두에게 이 책을 건넨다 2022년 여름 전욱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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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뜻을 받은 이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사랑이 어려웠던 사람은 시인이 되었다. “깊고 넓은 시름들이 전부/기담으로 전해지는”(「라이브」) 세상에, 부모와 누나가 있다. 더러는 미열처럼 앓던 사랑도 조용히 왔다 간다. 시인은 허전하고 쓸쓸한 세상에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미신처럼 “겪어본 적 없는 아름다운 기억”(「신들을 위한 여름」)을 함께 좇는다. 그 여정이 뜬눈으로 꾸는 잠 같고, 흉사가 드나드는 폐가 같았으리라. 시집을 읽는 내내, 폭서가 계속되던 여름을 떠올렸다. 그가 살아온 절기마다 불에 덴 자국이 화창하게 펼쳐지기를 바랐다. 지난날을 아물린 시인의 손에 얼음 한알 쥐여주고 싶다. 여름의 화기가 식고 나면, 다음 계절이 온다고. 그러니 “누추한 이 세상에 그래도 누군가는 사랑한다는 소문”(「잔서(殘暑)」)을 믿으며, 우리도 간신히 아름다워지자고. - 신미나(싱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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