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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빈틈 도시락 소풍 남겨두고 싶은 순간 백련 백년 청보라 어떤 대답 안부 피아노 오후 세시 녹색어머니회 방문 어떤 예의 목소리 예술 구절초 피는 마을 관계 정읍 칠보우체국 우체부 셋 제2부 어떤 아침 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주말 연극 깨우고 가 살 만한가 보리나방 부안 계화도 쌀 쌀나방 여름휴가 굉장한 광장 걸어서 집으로 지갑 박콩 리본 고양이 필통 감자 은행나무 길목 제3부 아침의 일 아라미용실 가을, 상리천 노전암에 다녀오다 메밀꽃밭 장생포 맛집 산호자나물 산양유 초겨울 초저녁 참 말하지 않고도 많은 말을 배내골과 석남고개와 광대수염 풍선 아트 합장바우 힘을 보태 힘을 연밭 경전 질그릇 조각 제4부 매우 중요한 참견 입동 유년의 거울 두 김정자씨 폭설 머위 겨울밤에 오신 손님 물까치떼 바쁜 여름 단짝 백중, 소나기맹키로 행복한 답장 걱정 드키는 소리 돌미나리 해설|오연경 시인의 말 |
朴城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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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빈틈이 없었다면
나는 그대와 먼 길 함께 가지 않았을 것이네 내 그대에게 채워줄 게 없었을 것이므로 물 한모금 나눠 마시며 싱겁게 웃을 일도 없었을 것이네 그대에게 빈틈이 없었다면 ---「빈틈」중에서 거실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뜨고 보니 티브이는 꺼져 있고 내 몸에는 이불이 덮여 있다 아내는 연수받으러 가고 없는데 누구지? 유정란을 휴지에 싸서 부화시키려다 깨뜨리고 말던 유치원생 딸애는 그새 중학생이 되었다, 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중에서 어머니 뒤를 따라 걷던 아들이 어머니 등에 대고 부채를 부치며 걷고 있었다 그 아들 뒤에서는 아버지가 아들 등에 대고 부채를 부치며 걷고 있었다 가히 굉장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딸애와 아내에게 저걸 보라고 손짓했다 아내와 나는 굳이 딸애에게 자금성과 만리장성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 엄마 아빠 잠깐만, 어때 시원하지? ---「굉장한 광장」중에서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늙은 개의 목줄을 잡고 걷던 어르신이 문득 걸음을 멈추는가 싶더니 남의 집 고구마밭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시지? 개를 세워두고 밭 안쪽으로 몇걸음 옮겼다 나온 어르신의 손에는 환삼덩굴이 들려 있었다 그냥 놔두면 무성한 가시 줄기를 거침없이 키워나갈 덩굴풀, 남의 집 밭고랑에 들어가 풀 한포기 뽑아 나오는 마음이 내 마음으로 들어오는 아침이었다 ---「아침의 일」중에서 호박 줄기가 길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있다 느릿느릿 길을 밀고 나온 송앵순 할매가 호박 줄기 머리를 들어 길 바깥으로 놓아주고는 짱짱한 초가을 볕 앞세우고 깐닥깐닥 가던 길 간다 ---「매우 중요한 참견」중에서 상강에 날아왔던 물오리들이 물결을 당겨 펴며 물그물을 쳤다 텃밭에서 몸집을 키우던 배추 두포기가 뿌랭이만 남기고 갔다 포플러 가지 끝에 올라 흔들흔들 울던 까치가 겅중겅중 뛰었다 고춧대 뽑아낸 자리로 들어가 기지개를 켜는 겨울초가 푸르렀다 무시래기 삶는다던 팽나무집 할머니가 마당가 화덕에 불을 넣고 물오리같이, 배추 뿌랭이같이, 까치 꽁지깃같이, 겨울초같이 서 있었다 ---「입동」중에서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 노모도 나도 제각기 방에 든다 불을 끄고 누워 잠을 청하는데 난데없이 글 읽는 소리 들려온다 곧 주무시겠지, 떠듬떠듬 또박또박 노모의 책 읽는 소리는 점점 또랑또랑해진다 엄니, 안 주무시고 뭐 허신다요? 물으려던 물음을 삼키고 엄마 어린이가 글 읽는 소리 오래오래 듣는다 쪼맨허게 읽었는디 드키더냐? ---「드키는 소리」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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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채집한 마음들
아직 이 세상이 살 만하다는 증거 박성우의 시는 언제나 쉽고 편안하다. 시를 처음 접하는 이들도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사람살이의 온기가 흐르고 언젠가 살아본 것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특히 시인이 펼쳐놓는 선한 마음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문득 그런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마음이 과거 사회에 대한 향수나 지금은 사라진 따뜻한 정(情)에 대한 동경이 아닌지. 그러나 시인이 이끄는 손길을 따라가다보면 그러한 의심은 불식된다. 가령 이러한 장면들을 살펴보자. 이 시집 안에는 “혹시라도 내릴지 모를 비”를 걱정하여 “택배 상자를 방수지에 꼼꼼하게도 싸서 처마 밑에 모셔두고”(「정읍 칠보우체국 우체부 셋」) 가는 세심한 마음이 있다. 십여년 동안 일하다 그만두게 된 아파트 경비 어르신을 “한번 안아봐도 돼요?”(「방문」) 묻고 안아드리는 시인의 마음도 있다. 이는 시인이 직접 경험한 다음 시로 옮겨놓은 마음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시집 곳곳에 펼쳐진 아름다운 마음은 시인이 여기저기서 채집한 것이자, 아직 이 세상이 살 만하다는 증거들이다. 이러한 마음은 관계로 이어진다. 이 시집 안에 등장하는 다양한 관계를 살펴보는 일은 그 자체로 흐뭇하다. “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어느새 “유치원생”에서 “중학생”이 되어버린 “딸애”(「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와의 일화들을 살펴보는 일은 잔잔하게 가슴을 데운다. 늦은 밤 노모가 책 읽는 소리를 듣는 장면(「드키는 소리」)이나, “얼떨결에” 받은 연극 “초대권 두장”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바쁜 시간을 쪼개 아내와 뜻밖의 데이트를 나서는 장면(「연극」) 등을 보다보면 독자들도 어느새 나의 가족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가족 안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웃, 길 가다 스친 사람, 심지어 “먹을 걸 내놓으라” 조르는 고양이(「오후 세시」)까지 시인은 정성을 다해 마음을 나눈다. 이러한 관계가 박성우 시 특유의 자연스러운 입말과 어우러져 시 한편 한편은 마치 드라마처럼 독자들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우리가 이 시집에서 마주하는 것은 “지금 이곳에 깃들어 있지만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삶의 방식, 드물지만 엄연히 실재하는 다른 삶의 가능성”(해설, 오연경)이다. 외로움, 억울함, 분노가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곁에 누군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 힘들다. 『남겨두고 싶은 순간들』은 그런 아픈 등을 도닥이며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고,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과 기쁨”(시인의 말)이 된다고, 그러니 주위를 둘러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박성우의 시는 시종일관 공동체를 지향한다. 그 따뜻함이 “더 나은 삶의 씨앗”(해설)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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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두고 싶은 순간들』에 담긴 박성우의 시들은 더 쉽고 편안하고 낮아졌다. 그 흔한 상징도 비유도 찾기 어렵다. 애써 새로움과 낯섦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사코 그런 것들을 피한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시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한 순간을 시로 만든다. 그것은 시적인 순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시인 순간이다. 말이 아니라 마음이고, 말을 넘어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의 시다. 그의 시를 읽으면 절로 마음이 환해지고 미소가 떠오른다. 읽다보면 누군들 시를 못 쓰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시는 쓰거나 읽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준다. 『도덕경』의 첫머리에 있는 문장을 흉내 내어 말하면, “시가시(詩可詩) 비상시(非常詩)”이다. 시라고 하는 순간 이미 시가 아니니, 내 마음이 곧 시인 것이다. - 이창동 (각본가, 감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