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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딱 한줄 하나의 사람과 예순한편의 슬픔 삼분간 다시 올 웃음에게 수상한 시절 기린 예찬 새와 종소리 뒤척이다 바람역 비를 보는 죄 뜻밖의 질문 달의 모서리 몸 사용 설명서 지극히 지루한 나는 낯설다 생의 한가운데 제2부 꽃 피는 시집 또 하나의 신 사이 치유의 시작 사람 이름 짓기 종이 한장의 기억 모를 것이다 일월에서 사월까지 물의 완창 거침없는 시도 추분의 시 뜻밖이었다 뒷날의 기록 그 겨울의 끝 제3부 아름다운 진보 아침에 생각하다 미래(未來)라는 이름 바람은 몇살이야 빈자리가 필요하다 들국 푸른 봄의 기록 벌써 9월 10일 우리 같은 사람들 둘도 없다 연애는 애연이다 시인 지망생에게 산은 오랜 침묵 덩어리 반성문 제4부 한 소식 나의 절경 낱말이 나를 깨운다 책가을 절벽 가끔은 머리로 걸어 다녔다 풀에 대한 생각 성직(聖職) 이름은 같은 얼굴이 없다 목표 쓸데없는 쓸모 내가 떠나는 이유 발자취 시인 해설|유성호 시인의 말 |
千良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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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인이
슬픔은 어깨로 운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은 모서리가 닳아 둥글어졌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오래된 슬픔은 향기를 품고 있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을 팔아서 자그만 꽃밭을 사야겠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이 택배로 왔다고 합니다 어디서 왔는지 나이 먹은 슬픔이 오늘은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합니다 ---「하나의 사람과 예순한편의 슬픔」중에서 허공을 향해 몸을 던지는 거미처럼 쓰러진 고목 위에 앉아 지저귀는 붉은가슴울새처럼 울부짖음으로 위험을 경고하는 울음원숭이처럼 바람 불 때마다 으악 소리를 내는 으악새처럼 불에 타면서 꽝꽝 소리를 내는 꽝꽝나무처럼 남은 할 말이 있기라도 한 듯 나는 평생을 천천히 서둘렀다 ---「뒤척이다」중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시를 쓰지 않고는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는 릴케가 생각나고 나는 시작(詩作)의 출발부터 시인을 포기했다 나에게서 시인이 없어졌을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김수영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은 깊게 생활은 단순하게 하라는 워즈워스가 생각나고 오늘 나는 아름다움에 인사할 줄 안다는 랭보가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문학에서의 정치는 연주회장에 울리는 총소리와 같다는 스탕달이 생각나고 우리의 열망이 우리의 가능성이라는 새뮤얼 존슨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는 움베르토 에코가 생각나고 나는 정의를 믿는다 그러나 정의에 앞서 어머니를 옹호한다는 카뮈가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마지막으로 돈! 천국 외에는 다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신문 배달 소년의 응모 시 한 구절이 아프게 생각난다 어둠은 빛보다 어둡지 않다고 생각하는 아침이다 ---「아침에 생각하다」중에서 여러번 생각하고 한번 말할 때 침묵이 가장 큰 비명이라는 생각이 들 때 작은 돌이 수면에 파문을 일으킬 때 맹세를 물에 적어놓을 때 한계와 경계가 풍향계와 다를 때 몸에 안 좋은 해충이 대충일 때 편견과 선입견이 무서운 견(犬)처럼 느껴질 때 먼 길이라도 갈 때는 가야 할 때 가는 길이 다르고 꿈이 다를 때 누구나 조금씩 우울의 저금통을 가지고 있을 때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라는 게 시일 때 시 쓰다가 날 선 종이에 손을 벨 때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가끔씩 울 때 삶이란 학교에서 영원한 학생일 때 그늘이 아름다운 빈자리가 필요하다 ---「빈자리가 필요하다」중에서 내가 시를 쓰는 것은 목숨에 대한 반성문입니다 쓰고 또 써도 이 글은 내 의지가 나의 길을 결정한 본래의 나일 것입니다 이제야 할 수 있는 말은 인생아, 고맙다입니다 ---「반성문」중에서 바람은 얼굴이 없단다 그래서 다른 모습으로 자기를 보여주지 우는 꽃이란 없단다 그러니 꽃 쪽으로 가서 살거라 꽃은 늘 환한 모습이지 낮에 우는 새는 노래하는 것이고 밤에 노래하는 새는 우는 것이란다 그것이 새들의 모습이지 시를 쓰는 너는 세상에 진 빚을 갚는 것이란다 가끔이라도 사람 마음에 다녀가는 너는 시인 아니냐 ---「한 소식」중에서 속에서 불꽃을 피우나 겉으론 한줌 연기를 날리는 굴뚝 같은 세찬 물살에도 굽히지 않고 거슬러 오르는 연어 같은 속을 텅 비우고도 꼿꼿하게 푸른 잎을 피우는 대나무 같은 폭풍이 몰아쳐도 눈바람 맞아도 홀로 푸르게 서 있는 소나무 같은 붉은 꽃을 피우고도 질 때는 모가지째 툭, 떨어지는 동백 같은 불굴의 정신으로 자신에게 스스로 유배를 내리고 황무지를 찾아가는 사람 ---「시인」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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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세상의 진실을 말하는 시,
올곧은 나무 같은 ‘시인의 존재론’ 천양희의 시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옷깃을 여미게 된다. 시편마다 고통과 슬픔으로 단련했을 고귀한 시어들이 어둠 속의 별빛처럼 형형한 덕분이다. 시인은 “물음표 같은 세월”(「바람역」) 속에서 “시를 쓰는 것은/목숨에 대한 반성문”(「반성문」)이라는 굳은 심지로 시를 써나간다. “운명에 만약이란 없”다고 믿으며, 신과 타인에게서 구원을 바라지도 않는다. 지독하게 고독한 세계에서 시인은 “끝 모를 간절함밖에 남은 것이 없는”(「삼분간」) 삶을 겸허하게 품어 안을 뿐이다. 지난 60년간, 시인이 세계를 품는 방식은 시를 쓰고 또 쓰는 것이었다. 마치 구도자와 같은 그러한 자세는 이 시집에도 우뚝하게 새겨져 있다. 그는 “시 쓰기란/진창에서 절창으로 나아가는 도정”(「추분의 시」)이자 “세상에 진 빚을 갚는 것”(「한 소식」)이며, 삶과 세상의 진실을 말하는 데 “시보다 더 충분한 것은 없다”(「추분의 시」)고 역설한다. 그러한 시를 향한 자세가 어느 한가지에 몰두해본 적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어느샌가 스며들어온다. 자신을 “수직으로 선 나무”의 “곧은 언어”(「치유의 시작」)를 빌려 “자연을 쓰는 서기(書記)”(「내가 떠나는 이유」)에 비유하는 시인은 시집 말미에 이르러 ‘시인의 존재론’을 더욱 선명하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세찬 물살에 굽히지 않고/거슬러 오르는 연어 같은” 존재, “속을 텅 비우고도 꼿꼿하게/푸른 잎을 피우는 대나무 같은” 존재, “폭풍이 몰아쳐도 눈바람 맞아도/홀로 푸르게 서 있는 소나무 같은” 존재, 그리하여 “불굴의 정신으로//자신에게 스스로 유배를 내리고/황무지를 찾아가는 사람”(「시인」)이 곧 ‘시인’이다. 이러한 올곧음 덕분에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에는 단정하지만 단순하지 않고, 맑지만 묽지 않은 언어의 향연이 가득하다. 오랜 고통 끝에 이룩한 득음의 경지 한국 시에 내려진 찬연한 축복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먼 길,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시의 길”(시인의 말)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 여기까지 왔다. 오랜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을 마음의 밑바닥에서 삭인 끝에 마침내 득음의 세계에 이르렀다.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보여준 미학적 성취는 “한국 시의 찬연한 축복이요, 우리가 그의 시를 읽는 커다란 기쁨의 원천”(해설)일 터, “스스로 빛나는 별자리”(「아름다운 진보」)에 아로새긴 순결한 “정신의 지문(指紋)”(「낱말이 나를 깨운다」)이 돌올하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길목에서 시인은 “이제부터 나에게는/시작이 필요하다”고, 그것이 “살아야 할 이유”(「치유의 시작」)라고 힘주어 말한다. “길이보다 깊이를 생각하는 새 아침”(「발자취」), 오늘도 한편의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은 가지런한 빈 종이 위에 펜촉을 올릴 것이다. 그리고는 “마음 깊이 새긴 물음표”(「시인 지망생에게」)를 조용히 훑으면서, “가진 것이 시밖에 없을 때 웃는다”(「딱 한줄」)고 여전히 답할 것이다. 시인의 말 머리에서 가슴까지 걸어온 60년 시의 길이 나에게는 가장 먼 길이었다 그 먼 길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돌아보니 그동안 나는 사람이 그리운 사람이었고 질문이 많은 사람이었다 마음자리를 잃고 밥처럼 먹은 슬픔을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단 한편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살릴 수 있다면 이것이 시인의 말이 될 것이다 2024년 9월 천양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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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는 내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마지막 시 마지막 행까지 읽고 나니 ‘바람’은 어느덧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이라는 말은 꼭 바람 같다. 천양희라는 한 사람이 바람처럼 이리저리 날리다 이곳에 낙엽처럼 내린 것만 같다.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무사하기 위해 시와 한몸이 된 시인은 “철도 없이 제멋대로인” 바람에 온몸을 내맡긴 채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낸 싸움과 사랑의 기록이 바람에 날린 낙엽처럼 여기까지 왔다. 나는 시인이 바람의 갈피 속에 한장 한장 끼워 넣은 종이들이 풍기는 바람 냄새를 다 맡아본다. - 황유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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