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부 다목적 박력분 슬픔
저녁의 감촉 생활의 발견 발코니 여름의 입맛 물소뿔을 불다 인디언 서머 산책의 내면사 소소한 운세 언어와의 작별 전입신고서 몽돌해변 돌에 물을 새기다 2부 물방울 기도 네일아트 에피쿠로스의 정원 고드름 아이스아메리카노 머그잔에도 얼굴이 있다 이월 세이렌 순간들 악수의 뒷맛 다국적 한국현대문학수업 겨울 저물녘 일생 나의 부장품 우주의 형편 3부 등을 줍는 사람이 있다 안부 의자 여기의 슬픔 감자의 맛 캠페인 부스러기를 위한 노래 손 없는 날 보금자리주택지구 친구의 운세 논에 물드는 풍경 너머의 풍경 구독자 귀뚜라미 평화 구름의 누설 4부 다르고도 같은 어둠을 베고 첫눈 밤의 가족어 사전 자매들 운우지정 고인 대기실에서 개꿈 헛제삿밥을 먹으며 꽃빛의 내력 동창회 명부 만들기 골안사 박두성 생각 자매를 위한 시 안목안경점 우동국물에 대하여 물의 극장에서 물든다는 것 해설 유리에 맺힌 슬픔 - 김나영(문학평론가) |
|
반쯤 먹다 남겨 둔 곰표 밀가루
봉지 열고 들어가 반죽을 개는 이 있으신지? (중략) 보관기간 지나고도 찾아가는 이 없는 분실물처럼 싱크대 옆 서랍에 처박혀 마늘도 쑥도 없이 어떻게 허기를 견디시는지? 생활의 여분은 기억 저편에 모셔 두고 짐짓 모른 체하느라 가정용 다목적 박력분 슬픔을 버무려 곰돌이 푸를 만들고 계시는지? ---「생활의 발견」중에서 마당가 엊그제 입주한 감나무 허공만 바라고 서서 가난한 집 아기 젖 빠는 소리를 내며 꽃망울 밀어 올린다 달빛은 전입계 직원처럼 무심히 도장 찍고 가고 (중략) 참사(慘事)에 아이 잃고 이민 간 친구에게 죽은 아이가 여기 감꽃으로 피었다고 꽃 피니 이별도 견딜 만하다고 차마 쓰지 못하고 일찍 떨어진 열매가 남기고 간 햇빛이며 달빛 받아 시퍼런 멍들 온몸으로 열매 되어 가리라고 썼다 지우는 애기 감꽃 속 흰 무덤 하나 ---「전입신고서」중에서 누군가 소리를 쟁여 두었다 한들 듣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이들이 낙엽을 밟으며 놀고 있다 공원은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팽팽하게 포장해도 절반은 으스러지는 비애를 꺼내 먹기 좋은 곳 바사삭바사삭 출출한 시간의 허기 달래라고 가을이 우리를 공원으로 불러들이면 아이들은 마른 낙엽 찾아다니며 잎맥을 끊어 놓고 우리는 입술 앙다문 봉지를 열어 싹을 지키려 독을 품는 감자의 시간을 만지는데 심야배송 나갔다 쓰러진 채 지상의 마지막 송장(送狀)에 제 이름을 적었다는 그 손을 생각한다 꽃을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제 주검을 배송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정원을 만들고 싶었던 사람 바삭바삭 낙엽은 쟁여 둔 소리를 깨우느라 바스러지고 사방으로 퍼지는 소리의 비수들 공원의 심장을 찌르는데 감자칩 속에는 반송되지 않는 작은 정원이 산다 ---「감자의 맛」중에서 내 몸에서 유독 귀만이 문 닫을 줄 모르는 24시간 편의점 밤낮없이 기도가 자라야 할 그곳이려니 국수처럼 순하고 버섯처럼 무른 무심을 버무려 도대체 무엇에 쓸까 이것은 들리지 않는 비명을 모으는 소리 채집가거나 내 나쁜 청력을 염려하는 난청 감별사일지도 모를 일 내 귀가 아직 열려 있다면 순순히 사라지는 것은 없다고 가볍게 말하지 말아야 하리 ---「부스러기를 위한 노래」중에서 비인 엘리베이터 오르내린다 슬그머니 열리고 가만히 닫힌다 옥상에서 난간까지 착한 사마리아인들의 입주가 시작되었다 ---「첫눈」중에서 3음절로 된 단어를 고르는 중이다 아버지 어머니 그래서 카르마 셋이 되었을 때 느끼는 어설픈 안정감 편안한 순간 끼어드는 초조함은 각자의 것 (중략) 담장 밑 자운영도 채송화도 봄을 다 치르고서야 건네받는 물 많은 복숭아도 단정할 수 없는 빛깔과 향기로 3음절을 고수하고 있지만 아버지 어머니 그러나 다르마 셋이 모여도 일인용 베개 위에서 다르고도 같은 어둠을 베고 눕는다 이 사전에는 감정어가 지워져 있다 ---「밤의 가족어 사전」중에서 누구의 삶에나 누수는 있다고 긴 암전 속 무대로 달려 나오는 발자국 소리 막이 오르면 강 저편에서 얼어붙은 심장 녹여 줄 전령이 오리라고 가시 많은 바람은 음향을 높이는데 리허설만 하다 막 내린 죽은 오라버니 무른 발소리에 귀가 시리고 남의 대사 잘도 훔치더니 서둘러 이번 생에서 퇴장해 버린 연극반 동기 녀석 날쌘 발소리에 눈이 아려 와 자취 잃은 물녘 ---「물의 극장에서」중에서 |
|
시인의 말
초대받은 바 없지만 나 여기 왔듯이 이 시편들 또한 그러할 뿐. 2024년 가을 초입 이선이 |
|
우리는 왜 시를 찾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모르는 것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시를 곁에 두려 하는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이 역전이 실존적 삶의 안쪽에서 발생할 때 우리는 이전과 달라진다. 좋은 시는 우리 안으로 들어와 ‘이전과 이후의 경계’를 긋게 한다.
이선이의 시에서 공유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감수성과 감정 이입의 ‘경계’이다. 우리는 흔히 자아(마음)가 우주 저 너머까지 달려 나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피부 안에 갇혀 있다. 서구의 한 명민한 사회학자가 지적했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부 안’에 갇힌 감수성이 아니라 ‘피부 밖’으로 나아가는 감정 이입이다. 감수성이 ‘내 안’에서 타자를 이해하려는 수동적 상상이라면, 감정 이입은 ‘나의 밖’으로 나가 타자와 하나 되려는 능동적 의지이다. 존재와 삶의 비의(?意)를 포착하는 가장 탁월한 능력이 감정 이입이다. “절 받는 마음이 절하는 마음에게 다녀오느라”(「의자」), “노인을 무릎에 앉히”는 “벤치”(「인디언 서머」), “살 오르는 한탄강”(「논에 물드는 풍경 너머의 풍경」), “돌에 심은 연꽃에서 씨앗을 얻을 운”(「친구의 운세」)… 이 같은 절창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이제 우리가 이선이의 시에 감정을 이입할 시간이다. “무너진 자리”를 “일어서는 자리”(「몽돌해변」)로 만들어야 할 각자의 절박한 시간이자, 우리 모두의 간절한 시절이다. - 이문재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