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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아궁이 신발장
대화 저녁의 감촉 조문객을 받다 작은 미나리 밭을 생각했다 녹두밥 아궁이 신발장 노래자의 가을 둠벙배미전 고저무 홈런왕 느티나무의 유래 슬픔이 슬픔이지 않게 과객 데드볼 어떤 안부 낱말 찾기 2부 내곡, 싸리꽃 피다 숲을 거닐다 청춘수필 내곡, 싸리꽃 피다 검객을 위하여 수다 우산전 파묘 감각의 제국 12월 나무로 잠들다 새벽 산행 다른 언어를 사용하다 간진 바위 어떤 귀향 지렁이 3부 밥 한번 먹자는 말 사천오백 원 그들의 생존법 복수초 연대기 봄 바다는 전설로 남는다 희망의 다른 말들 조롱이의 추억 봄눈 잘못 든 길 오 불쌍한 것들 그 황홀한 피폐함에 대하여 퇴근길에 길을 잃다 목숨 우문현답 살아야 하는 부끄러움이여 4부 웃어 주고 그랬어 폐광지 해탈 돈키호테를 읽는 새벽 열하일기 청평역에서 강진을 꿈꾸며 저어새 도시를 걷다 안부를 묻거든 철없는 것들 궁여지책을 위하여 눈 자화상 의자 참 늦은 사랑 피장파장 시골 버스 정류장 해설 불연속성에서 연속성으로 가는 다른 언어 - 이병철 시인,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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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문 저만치 뒤로 하고 가시곤 하셨다
위암이다 위궤양이다 큰 수술을 받으시고는 술 마시면 돌아가신다고 모두 득달했지만 어머니의 술 따르기는 계속되었다 십수 년 후에도 벽장의 소주병은 지금 외할아버지가 마신 술병처럼 그대로였다 --- 「대화」 중에서 파리한 새벽 자리끼마저 얼어붙고 문풍지 따라 올라오던 매캐한 연기 똑똑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어느새 방이 다시 뜨뜻해지면 새벽잠이 스르르 밀려올 때 툭툭툭 아버지의 옷 터는 소리 헛기침이 깊게 울리면 알 수 없는 신호음이 되어 가슴 누르다 --- 「저녁의 감촉」 중에서 작은 미나리 밭을 생각했다 약속은 내내 돌고 돌아 기억이 먼 곳으로부터 돌아와 온몸이 더욱 아득해질 때 고향 집에서 봄비를 맞다가 문득 작년 장마에 떠내려간 작은 미나리 밭 봄비는 계속 이유를 묻지 않았고 하릴없이 찾아드는 통증 --- 「작은 미나리밭을 생각했다」 중에서 새벽 군불을 때신 아버지는 온 가족의 신발을 아궁이에 가지런히 넣으시곤 했다 점점이 피어오르는 연기가 고즈넉한 새벽하늘을 가르면 아궁이는 점점 성전을 닮아 가고 있었다 --- 「아궁이 신발장」 중에서 어두운 새벽에 논으로 덤벙 들어가 논일을 하면 지나던 동네 사람 이런 꼭두새벽에 일하는 사람 있을까 싶어 ‘둠벙배미에 귀신이 있다’ 아담한 둔덕을 끼고 돌아 움쑥한 둠벙배미 이젠 우리 논이 아니다 --- 「둠벙배미전傳」 중에서 이슬방울 지난밤을 애태워 지새우더니 뚝뚝 떨어지는 아침을 보아라 호흡 한 점에도 저리 쉽게 굴복하는 것을 저 물방울이 얼마나 많은 사연을 쌓아야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룰까 --- 「다른 언어를 사용하다」 중에서 천년의 속도로 지나던 벌레는 오랜만에 인기척에 놀라 시간을 껍질처럼 버리고 떠났다 기다리던 버스나 기다렸던 손님들은 하나둘 사소한 통증처럼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익숙하게 멈춰 있었다 천년이 지나도 벌레의 껍질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 「시골 버스 정류장」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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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고향집 상수리나무 연둣빛이 유난히 지루하고 서러운 봄날이다 항상 더디고 서툴기만 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간다 당신에게 소소한 안부와 다정한 위로 한마디 건넬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혹시 내가 알지 못한 미안함 고마움이 남아 있다면 이 시집 한 권 건네고 싶다 그리고 묵묵히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다 2025년 봄날 김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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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질료로 농경문화의 기억을 사용하는 것은 자칫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모더니즘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춘기 시인은 과거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세태와 상관없이 “늙어 가는 냇가”를 고집스럽게 오래오래 바라본다. 거기에는 가마니 짜고 아궁이에 군불 때던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를 거역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이가 생전에 모아 놓은 각양각색의 ‘끈’ 때문이다. 끈은 “아직도 미덥지 못해 여기저기를/ 자꾸 서성이듯 다시 부탁하듯” 시인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다. 끈은 꼬이고 엉켜 관계를 형성하고 길게 늘어져서 시간을 이어가게 해 준다. “종이 위에서 스멀스멀 내 몸을 핥고/ 내 혀와 발가락에도 스며드는 풍경들”은 오늘날까지 내내 이어진다. AI 인공지능 시대에도 과거를 소환하거나 과거의 거울로 오늘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시인의 안간힘은 그래서 먹먹한 바가 있다. -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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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집을 좋아하고 읽는 이유는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된다는 점이다. 어느 책보다 시간이 안 걸리기도 하고 한 편 읽는데 어디에서 읽든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은 내가 알고 있는 단어를 다르게 사용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시를 읽는 재미이기도 하다. 김춘기 시인은 “내 청춘 한 조각 탈탈 털어서 그때의 폐허라도 불러 보자” 청춘의 한 조각을 탈탈 털다니? 내가 한 번도 털어 본 적이 없는 청춘을 털다니 그것도 한 조각을 탈탈 털어서? 먼지나 털었지 빗물이나 털었지, “사천오백 원 하는 백반이 시립도서관 어떤 책보다 철학적이고 어떤 우주보다 더 커 보일 때가 있다” 싸구려 백반을 먹으면서도 백반 한 그릇이 우주로 이어지리란 상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얼마든지 또 있다. 내가 알면서 안 쓰던 단어를 어찌 그리 잘 꿰맞추는지 검객 자리끼 절박하다, 등등 알던 단어지만 일찍이 써먹은 적이 없던 단어들이 나올 때 그 단어를 처음 알았던 때로 다시 돌아가게 만든다는 거다. 단어들의 새로운 쓰임과 이미지들 새로운 재미 찾기를 마음껏 즐기시길 바란다. - 전유성 (코미디언, 공연기획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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