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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나는 은유된다
고수 나무의자 눈사람 접는다는 것 꽃문 숨은그림찾기 술값은 내가 냈으니 뉘엿한 말 김수영을 읽는 저녁 풍등 완행 검은 사람 도형들 실직 흠이라는 집 2부 죽음을 빙 둘러선 사람들 꽃지랄 당신이 먼 집에 있어 배웅 보름달이 뜨는 식탁 백색왜성 환승역 가족이라서 그렇습니다 교차로 디스코 팡팡 생일 축하합니다 주름 한 권 늦봄 효문동 행간 당신의 바깥 3부 방파제 위에 떨어진 별 몇 개 불가사리 그냥 테트리스 나무날개 고사목 겉절이 별의 입구 달방 발아래 어느 상가 장편 오후 대책 이모 견딜 만한 일 꽃 틈에서 누가 퇴고 4부 밑장 없는 계절 그 말 애도 골목의 완성 빈방이라는 악몽 카톡 뒷맛 타조 증후군 어느 낭만적 고양이의 죽음 모르는 척 밑장 햄릿 증후군 신의 한 수 먼지 그녀가 피어나는 유일한 방법 해설 청록의 모서리에 걸터앉으면 불어 보는 휘, 파랑에 관한 보고서 -정 훈(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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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한 입을 다물기로 했어
예와 아니오만으로 이루어진 대답이 변질을 지나 창조에 닿았다면 그건 대답이 아니라 질문의 문제 골목은 사계절 내내 눈이 내렸지 걸어 들어간 사람들마다 눈사람이 되어 나왔지 더러,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눈사람」중에서 잠시 접어 두라는 말은 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 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 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 주는 일 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접는다는 것」중에서 나는 은유된다 빛의 뒤편에서 혹은 너의 시선 너머에서 ---「숨은그림찾기」중에서 지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장검처럼 김수영을 뽑아 들었지만 비어 가는 쌀독, 그 빌어먹을 먹이 때문에 끝없이 김수영을 오독하는 밤 끝내 돌아눕지 않는 나를 기다리던 네루다와 체 게바라가 지루한 표정으로 서로에 기대어 졸고 있다 ---「김수영을 읽는 저녁」중에서 길가 쉼터에 차를 세우자 코스모스 화단에 걸터앉던 엄마 온통 붉은 서쪽을 바라본다 노을 쪽에서 온 사람처럼 노을 쪽으로 가는 이처럼 노을처럼 사위어 가는 당신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그러쥔 옷섶에서 구름의 멍울들이 잡히고 눈 뜨면 그 속에 가득한 별들 하늘 하나를 통째로 품고 사는 사람이 있었다 몸속 먹구름이 어느 기억을 지나고 있는지 내 눈동자 속으로 뚝뚝 떨어지던 별 ---「배웅」중에서 보폭이 같은 사람들과 웃고 울다가 누가 걸음을 멈추면 그이를 땅에 심게 되는데 거기가 바로 별의 입구 일생 딱 한 번 축복처럼 열리는 작은 문 함께 걷던 이들이 눈망울에 비친 기억들을 문 앞에 떨궈 놓고 이내 총총 흩어진다 그런 밤은 먼 하늘에서 배를 한 척 보내와 무덤과 별들 사이에 환하게 정박해 있다가 그믐이 되면 그 달 무덤까지 내려와 멈춘 걸음들을 서쪽 하늘로 데려간다 그리운 눈을 하고 가만히 보면 은하수까지 가득 찍힌 발자국들 ---「별의 입구」중에서 평생 모아 놓은 웃음 몇 개를 밀어내며 내 손은 자꾸만 눈물을 만지작거린다 어때 거긴? 빈 곳을 향해 물었을 때 국화꽃 틈에서 누가 씨익 웃는다 눈이 마주친 나는, 꺼내려던 눈물을 도로 집어넣으며 예의처럼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린다 ---「꽃 틈에서 누가」중에서 집주인에게 미안하다 펼쳐진 노트에 눌러쓴 마지막 줄은 종일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의 전생을 몇 장의 종량제 봉투에 나눠 담고 오존 살균기의 전원을 끄자 고독의 냄새까지 말끔히 지워진 빈방이 완성된다 ---「빈방이라는 악몽」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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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접어 두라는 말은
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 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관계’를 다루는 섬세한 시선 대상과 나, 대상과 세상, 대상과 타인을 위로하는 관계의 미학 2013년 ‘전태일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권상진 시인의 시집 『노을 쪽에서 온 사람』이 걷는사람 시인선 87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권상진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자연과 사람 사이의 관계 등 ‘관계’를 섬세히 살펴볼 줄 아는 시인이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 주는 일/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접는다는 것」)라며 남을 기어이 접게 만들려는 태도가 아닌 스스로를 먼저 접는 것이 옳았다는 것을 ‘책을 접는 행위’에 비유해 보여 주고 있으며, 자연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는 시안도 깊다. “보폭이 같은 사람들과 웃고 울다가 누가 걸음을 멈추면 그이를 땅에 심게 되는데 거기가 바로 별의 입구/(중략)/그리운 눈을 하고 가만히 보면 은하수까지 가득 찍힌 발자국들”이라며 사람 사이의 그리운 마음과 그 거리를 자연을 통해 비유하며 아름다운 언어로 권상진만의 시적 세계관을 펼쳐 보인다. 또한 이 시집의 표제작인 「배웅」에서는 “진료 소견서를 받아 들고 가는/4번 국도는 어느 행성으로 가는 긴 활주로 같았다”라고 표현하며 “온통 붉은 서쪽을 바라본다//노을 쪽에서 온 사람처럼/노을 쪽으로 가는 이처럼”이라고 말한다. 아픔 속에서도 피어나는 절경의 순간을 포착하며, 삶의 숭고함을, 신비로움을 담아낸다. 추천사를 쓴 성윤석 시인은 “문장으로 세상을 샅샅이 들춰 보고 그곳의 시적 인식과 사람의 태도를 찍어 올리는 데 고수인 이 시인의 시집을 읽어 보라”며 “걸어 들어간 사람들마다/눈사람이 되어 나왔지/더러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조차도”(「눈사람」)라는 대목처럼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면서 대상과 나, 대상과 세상, 대상과 타인을 대할 때 어떤 인간의 태도가 아름다워질 수 있는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정훈 문학평론가는 권상진의 작품을 “사람과 말의 표면에서 어른거리는 아지랑이 같은 사태들의 문을 열고 기꺼이 바라다보고자” 하는 시라며, 이런 그의 시작법은 “윤리나 이념의 자장(磁場) 밖에서 이루어지는 순정한 실천”이며 “생명의 가장자리에서 복판으로 뛰어들려는 장엄한 의식”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의식은 딱딱하거나 형식적이지 않고 부드럽고 내향적이며, 안으로 제 몸과 마음을 접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향해 섬세하게 기울어지려는 방식”이라고 한다. “느닷없이 눈을 부시게 하는 형광등이 아니라 구석진 자리 은은하게 덥히는 백열등의 누런빛처럼 천천히 스며들고자” 하는, 그런 시인의 시를 읽었다며 이 책을 권한다. 시인의 말 돌이켜 보니 가장 진절머리 나는 것도 눈물 나게 그리운 것도 결국엔 사람이었다 2023년 4월 가짜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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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진의 시에는 문장으로 대상을 선명하게 파악하려는 시선이 있다. 그 시선은 인간의 삶에 대한 사유와 결부되어 있어, 언제나 신선한 인식을 선보인다. 이 시집을 다 읽고 덮으면, 역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감성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장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나는 조목조목 아프다”(「고수」)라는 표현처럼 그는 타인을 경이롭게 보려는 시선을 매 편마다 유지하고 있다. 새로운 문장을 발명하는 것, 또 그 문장을 확장하는 시도가 시라는 걸 그는 숨기지 않는다. 시와 시인이 일치하는 지점을 그는 갖고 있는데, 사람과 시가 이리 동일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겸손하지만 예리하고 비범한 사람이고 게다가 유머까지 지닌 시인이다. 그의 시도 마찬가지. “그는 술만 마시면 시를 뱉는다” “술값은 내가 냈으니 표절은 아니다”(「술값은 내가 냈으니」)라고 하듯 그는 일상에서 사람에게서 문장을 얻는다. 사실 문장을 얻으러 골목으로 시장으로 바다로 산 속으로 들어가는 자가 시인 아닌가. 그곳들에는 언제나 장소성이 있고 삶이 있으니, 마땅히 잘 표현된 시가 시인에게 포착될 수밖에. 문장으로 세상을 샅샅이 들춰 보고 그곳의 시적 인식과 사람의 태도를 찍어 올리는 데 고수인 이 시인의 시집을 읽어 보라. “걸어 들어간 사람들마다/눈사람이 되어 나왔지/더러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조차도”(「눈사람」)라는 대목처럼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면서 대상과 나, 대상과 세상, 대상과 타인을 대할 때 어떤 인간의 태도가 아름다워질 수 있는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성윤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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