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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게 부친 여름
이호석
걷는사람 202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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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부 지금은 체리가 익어 가는 계절

무제
공원에서
밑바닥에는
여름에게 부친 여름
곶자왈
새의 무덤
은여울초등학교
방역
소실점
철새들이 내려앉는곳
논두렁길만 남아
어떤 여행

2부 빗소리에 붙인 주석

남쪽
신년 계획
근황
어느 편집자의 마지막 페이지
옛날 영화가 어떻게 끝나더라
빗소리에 붙인 주석
소멸
유토피아 47번 우주정거장에서의 도킹
응시
안개의 계절
겨울 전령사
지구의 지배자
겨울 장마는 퍼붓지 않는다
땅끝에 서다

3부 여름 한철 그의 이름을 짓기 위해

블랙
동백꽃
차이 2
먼바다를 바라보는 일
네 이름은 뭐니?
연못의 한잠을 깨우는 것은
숨이 숨을 만나
그 끝자리를 어쩌지 못하고
봄 한철 견딜 수 있는 것은
떨어진다는 말은 얼마나 많은 중력을 가지고 있는가
문장의 독
교정지 위에서는
흰 돌
막걸리

4부 슬픔보다 먼 곳에 그리움을 세워 두고

은에게
염소는 힘이 세다
개종
개나리꽃에 부쳐
파초 잎에 시를 쓰고 싶군요
갯벌 드러나듯
노형오거리에서
Re: Hello
나른함에 대하여
간접 인용
우리의 연산
혹시
고양이 제사
편지를 돌려보내며

해설

‘밑’과 ‘끝’으로 이루어진 세계
─고봉준(문학평론가)

저자 소개 1

충남 아산에서 나고 자랐다. 2018년 《문예바다》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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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8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140쪽 | 160g | 125*200*20mm
ISBN13
9791192333984

책 속으로

아이가 던진 장난감
소파 밑으로 사라진다
무릎 꿇고 귀를 바닥에 붙여
밑바닥 어둠을 본다

불이 밝지 않아도
어둠은 밑으로 흐르게 마련이고
모여 흘러드는 것들은
다시 가슴에 고이게 된다

아이 성화에 못 이겨
소파를 힘껏 밀어젖히자
알게 모르게 조금씩 흘려 두었던
무언가가 먼지 더미에 엉켜 있다

찾다가 포기했던 안경
이미 버린 양말의 다른 짝
한 쌍이라 부를 수 없는 젓가락
아이는 냉큼 장난감을 집어 간다

밑바닥에 남겨진 것은
오래 지키지 못한 약속이거나
신년 계획들의 다짐이거나
숨겨 오던 애인의 버릇이거나

세상 공연한 것들은 오늘도
먼지처럼 참으로 연하고 부드러워
새털처럼 가볍게 장롱 밑으로
냉장고 밑으로도 흘러든다
---「밑바닥에는」중에서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우듯 서로의 저녁을 핥으며, 사랑보다 뜨거운 초록을 만들어요. 조용히 진저리 치던 여름의 잔허리를 베고 눕자 저녁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와요. 고양이 울음소리가 대문 없는 마당에 들어서서 여름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저녁이라면 사랑할 수 없는 당신을 만나도 조금은 괜찮을까요. 지금은 체리가 익어 가는 계절이니까. 여름에게 부친 여름이 돌아오면 당신을 볼 수 있을까요. 고요한 뒤뜰에서 웃자란 사과나무는 어쩌자고 혼자서도 저리 많은 열매를 매달고 있을까요. 어제의 고양이는 열리지 않을 대문처럼 떠나갔어요. 이제 마당에는 여름만 남아 그날의 저녁을 기억해요.
---「여름에게 부친 여름」중에서

송년회가 파하자 허세와 불안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그들은 돌아갈 빙판길을 두고도 눈꽃처럼 웃거나 구세군 종소리처럼 떠들었다. 결국 모두 구겨진 지폐처럼 택시에 담겨 사라졌다.

오지 않을 미래가 모의되고 그것을 사람들은 계획이라고 불렀다. 신년과 계획은 마지막까지도 어울리지 않았다. 오늘 밤도 어디서, 누군가는, 눈사람처럼 앉아 다이어리에 실존적 의지를 기록할 것이다. 밤새 소복이 내리는 눈처럼, 가련한 애도의 몸짓으로 세상을 덮을 것이다.
---「신년 계획」중에서

반성하는 마음으로 삼십 대를 편집자로 살아냈으나
나의 인생은 수정되지 않았고, 자꾸만 오탈자가 목에 걸렸다
읽히는 삶을 궁극으로 두었으나 나는 읽는 사람에 가까웠고
쓰는 일은 사치가 아니면 노역과도 같아
(중략)
서점에 깔린 책들에는 나와 같은 이름들이
명멸하는 불빛보다 희미하게 널렸지만
우리는 애써 서로의 존재를 외면하고 살았다
책 대신 빵으로, 커피로 도망치는 편집자들을 바라보며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곱씹어 보지만
소나무재선충처럼 퍼진 출판계의 고질적 증상은
노동자를 대신해 독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차라리 간서치가 되어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나는 늘 마지막 페이지가 궁금하여 책을 덮지 못하고 있다
---「어느 편집자의 마지막 페이지」중에서

걷다가 문득 꿈이 깨었을 때
슬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알았다
죽음도 없이 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걸
---「소멸」중에서

철새들이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간다

지게차가 부지런히 달걀을 싣는 동안
이국의 사내는 웃는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한겨울 햇살이 한가득 양계장을 비췄다

들판 저 멀리서 장난감 같은 방역차가 안개를 뿌리며 지나간다
---「지구의 지배자」중에서

더 이상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나를 놓아주어야 하는가
떨어지는 모든 것은
제 몸에 허공의 무늬를 만들고
조금씩 어둠을 게워내었네
핏빛으로 노을 너머로 사라져 갔네

---「떨어진다는 말은 얼마나 많은 중력을 가지고 있는가」중에서

출판사 리뷰

“세상 공연한 것들은 오늘도
먼지처럼 참으로 연하고 부드러워”

낙하하는 별빛과 한밤의 울음빛-
상실의 슬픔을 그리움 쪽으로 저만큼 데려가는 시


2018년 《문예바다》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호석 시인의 첫 시집 『여름에게 부친 여름』이 걷는사람 시인선 89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과연 우리 삶의 밑바닥에는, 마음의 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 떠올리는 지점에서 이호석의 시는 시작된다. 공연한 것들, 그러니까 그닥 실속 없는 것들, 짝 잃은 양말이나 젓가락 같은 것, 어쩌면 시(詩) 같은 것. 그렇게 먼지처럼 연하고 부드러운 것들이 우리 삶의 밑바닥에 새털처럼 내려앉아 있다는 발견. 비록 실속은 없을지라도 삶의 냄새와 추억을 고스란히 덧입은 채 그것들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이호석은 끊임없이 증언한다.

장이지 시인이 추천사를 통해서도 밝힌 것처럼 이호석의 시는 잃어버린 ‘고막’이나 ‘그림자’, 우주의 고혼이 된 ‘스푸트니크’에 그 기원을 둔다. 그 상실은 돌이킬 수 없이 영원한 것이어서 그는 다만 끝이 기억나지 않는 옛날 영화를 거듭 떠올리듯이 되풀이하여 그 잃어버린 것이 있던 지점에 눈을 둔다. 이런 그의 습성이 “밤새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봅니다 여전히 막차를 기다리는 모습으로/한 번도 답장하지 못한 채 우체통을 기웃거리기도 합니다”(「근황」) 같은 문장으로, 때로는 “모든 게 끝나면 어두워지는데 영화는 환해지지/환해지는 기억만큼 부끄러운 일도 없지”(「옛날 영화가 어떻게 끝나더라」)라는 후회로 찾아오곤 한다. 하지만 시인은 또 알고 있다. “열매를 매단 자리는/태연하게 상처가 아문 자리”(「여름에게 부친 여름」)라는 것을. 상처 없이는 현재도 미래도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어느 자리에서 이호석 시인은 “나의 시는 전부 편지입니다.”라고 고백한 바 있는데, 그만큼 그의 시는 그리움의 대상을 향해 있는 동시에 외로운 한 존재자가 타인과의 소통을 갈구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따라서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시’라는 장르의 목적지향적으로 쓰여졌다기보다는 한 인간의 내면을 토로하는 서신과 같은 방편으로 쓰여졌다. 외로우나 다감한 그의 성정이 시 속에 투명하게 비치는 것은 그 때문이며, 이것이 이호석의 시가 가진 미덕이다.

한편, 이 시집에는 편집 노동자로서 겪는 욕망과 비애 또한 솔직하게 담겨 있다. “읽히는 삶을 궁극적으로 두었으나 나는 읽는 사람에 가까웠고”(「어느 편집자의 마지막 페이지」)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읽히는 삶’, 즉 시인을 꿈꾸었으나 꽤 오랫동안 ‘읽는 사람’ 즉 편집자로서 살아왔다. 그러니 어쩌면 그의 청춘은 꿈과 생활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고독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고봉준 평론가가 언급한 것처럼, “원고를 ‘수정’하는 일과 자신의 인생을 ‘수정’하는 일은 상관이 없었고, ‘원고’의 오탈자는 찾아서 수정할 수 있었으나 자기 삶에 존재하는 ‘오탈자’는 손을 댈 수가 없었던” 시간들이 한 권의 시집으로 부려진 것이다.

꿈과 생활의 크나큰 틈 사이에서 방황한 한 사람의 고뇌와 사랑이 여기 담겨 있다. 다행히 ‘시인의 말’에서 이호석은 “숫눈처럼 공백만이 나를 기다린다”고 고백한다. 아직 더 쓸 편지가 남아 있다는 얘기다. 그리움이 그치지 않는 한 그의 시는 계속 쓰여질 것이다.

시인의 말

오래 미뤄 왔던 마침표를 하나 찍는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쉼표를 찍어 왔나
뒤따르던 문장들은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지고
대신 겨울밤 창밖으로 내리는 함박눈
숫눈처럼 공백만이 나를 기다린다
세상의 모든 발자국은 곧 지워지겠지만
그래도 나는 설산 너머로 걸어가겠다

2023년 어느 여름날
이호석

추천평

이호석의 시는 잃어버린 ‘고막’(「근황」)이나 ‘그림자’(「소멸」), 우주의 고혼이 된 ‘스푸트니크’(「유토피아 47번 우주정거장에서의 도킹」)에 그 기원을 둔다. 그 상실은 돌이킬 수 없이 영원한 것이어서 그는 다만 끝이 기억나지 않는 옛날 영화를 거듭 떠올리듯이(「옛날 영화가 어떻게 끝나더라」) 되풀이하여 그 잃어버린 것이 있던 ‘허공’으로 돌아간다. 그곳에는 분명히 상처가 있을 터인데 그 상처는 어느새 아물고 열매가 농익은 향기를 뿜어낸다. 그는 “밑바닥 어둠”(「밑바닥에는」)이나 “마음속 불모지”(「곶자왈」)에서 어떤 ‘소실점’을 찾아 헤맨다. 그가 찾은 것은 모두 “먼지처럼 참으로 연하고” 부드럽다. 그의 이 탐구는 “발목을 간질이던 등지느러미”(「은여울초등학교」)와 같이 감각적인 표현에서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룬다. “시골집 마루에서/아버지와 겸상하며 바라본/초여름의 시퍼런 텃밭”은 그대로 ‘먼바다’가 된다(「먼바다를 바라보는 일」). 이토록 그리움이 청신한 빛을 띨 수 있다니! 그의 시에는 이 초록의 텃밭과 먼바다 사이의 아름다운 낙차가 언제나 있다. 그는 우선 이 낙차를 ‘첨벙!’ 하는 소리로 메우려 한다. ‘쓰르라미의 울음’(「그 끝자리를 어쩌지 못하고」), “자유 낙하하는 별빛”이나 “한밤의 울음빛”(「떨어진다는 말은 얼마나 많은 중력을 가지고 있는가」)으로 수놓으려 한다. 기어이 그는 상실의 슬픔을 그리움 쪽으로 저만큼 데려간다. 그가 내디딘 이 어려운 첫걸음이 언 하늘에 흰 발바닥으로 정하게 찍히는 것을 본다. - 장이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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