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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에도 마음에는 봄이 오게 하는 시詩.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범한 생명의 새로운 경지를 발견해내는 고영민 시인의 신작. "봄이 오는 걸 보면 /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봄이 온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 생각이 든다" 읽고 나면 무엇이든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좋은 시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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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철심 적막 나이 든 개 딸기 봄의 정치 시인 앞 편육 밀밭 속의 개 내가 보는 네가 나를 보고 있다면 흰 토끼 일곱마리는 연안 네트 저녁의 눈빛 내가 어렸을 적에 망(望) 만두꽃 제2부 아지랑이 무화과 폐문 목련 두부 밖 꽃눈 은행나무 사거리 어제보다 나은 사육제 긴 호스 닭의 입구 조약돌 입속의 물고기 슈퍼문 여름비 한단 고독 제3부 아무도 없는 현관에 불이 켜지는 이유 웃으면서 이별을 매화꽃 둘레 옥상 느시 복숭아와 사귀다 밤의 기억 베고니아 송편 톱밥 꽃게 어항 얼굴에 남은 베개 자국 복자기나무에 물이 들다 소녀 엉겅퀴 제4부 깊이 가난의 증명 지퍼 저녁으로 목단 풀을 벨 때 두엄 붉은 입술 상류 튜브 순한 개 액자 조숙 불 냄새 꽃의 얼굴을 하고 자두 국도변 옥수수밭 물의 목수 해설|안지영 시인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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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걸 보면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온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밤은 짧아지고 낮은 길어졌다 얼음이 풀린다 나는 몸을 움츠리지 않고 떨지도 않고 걷는다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만으로도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의 정치」 중에서 꽃은 시인 앞에 와서 핀다 꿀벌은 시인 앞에 와서 날갯짓한다 잎새는 시인 앞에 와서 지고 군인은 시인 앞에 와서 담배를 꺼내 문다 흰 고양이는 죽는다 시인 앞에 와서 연인들은 시인 앞에 와서 입을 맞춘다 아이들은 시인 앞에 와서 뛰놀며 노인은 시인 앞에 와서 운다 ---「시인 앞」 중에서 뒤에서 누가 당신을 부른다면 당신은 어느 쪽으로 돌아보나요 왼쪽인가요 오른쪽인가요 당신이 돌아본 왼쪽은 어느 쪽인가요 당신이 돌아본 오른쪽은 어느 쪽인가요 그 둘 사이는 얼마나 먼가요 ---「은행나무 사거리」 중에서 누가 나에게 먼저 와 있는 것 같다 서로 보지 않으려 해도 서로가 보이는 미리 구덩이를 파놓고 뭔가를 넣는 소리 흙을 덮는 소리 심장이 멎을 듯 멎을 듯 뱀눈 뜨는 소리 입이 트이고 귀가 트이는 ---「밤의 기억」 중에서 우리는 다 알면서도 묻지 그냥 대답이 듣고 싶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는 복자기나무에게 묻고 복자기나무는 물이 든다 원치 않았으나 피할 수 없었던 일 알고 있던, 그러나 영영 몰랐던 일 ---「복자기나무에 물이 들다」 중에서 누가 올 것만 같다 어두워져가는 저 길 끝 누가 올 것만 같다 조금만 기다리면 조금, 조금만 더 기다리면 (…) 지워지고 있다 기다리는 내가 지워지고 있다 누가 올 것만 같아 기다린 내가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게 지워지고 있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다 누가 올 것만 같아 ---「저녁으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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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세로, 공손한 마음으로 사소한 일상을 품어안는 시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범한 생명의 새로운 경지를 발견해내는 시인은 “어떤 속삭임도/들을 수 있는 귀”와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는 눈”(「내가 어렸을 적에」)으로 사물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간다. 일상의 소재들을 마음껏 부리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의미와 무의미의 내밀한 관계를 안과 밖으로 변주하면서 “안에서/밖을 만드는”(「밀밭 속의 개」) 시적 사건들을 포착해낸다. 더불어 시인은 “액자를 떼어내고 나서야 액자가 걸렸었다는 것이 더 뚜렷해지는”(「액자」) 이치를 깨달으며, 부재로 인해 존재가 드러나는 삶의 역설적인 풍경을 깊은 통찰력으로 응시한다. 시인은 생명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사소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소멸되어가는 존재들에게 온기를 불어넣는다. 마치 “입속에 새끼를 넣어 키우는/물고기”(「입속의 물고기」)같이. 낮은 자세로 다가가 사물에 눈을 맞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끝내 아무것도/움켜쥐지 못한”(「조약돌」) 존재들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공손한 마음으로 사물의 본성을 일깨우며, 쓸쓸하게 저물어가는 생의 뒷면을 따듯하게 품어안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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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달에 머무는 시인이 떠오른다. 낮달과의 대화도 한뼘이겠다.
고영민의 시공간에서는 일상과 온기가 서로 살고 있다. 서로의 계절이기도 하다. 현실의 상상력이면서 현실의 반대 혹은 기억들인 온기는 일상을 울울하고 헐렁하게 포옹한다. 울울할 때 시인의 말은 겸손해지고, 헐렁하다면 시인은 말을 줄인다. 예컨대 “봄 오는 일이/결국은 꽃 한송이 머리에 이고 와/한 열흘 누군가 앞에/말없이 서 있다 가는 것임을” 자각하는 꽃의 제의/온기는 “왔던 길 되짚어갔을/꽃의 긴 그림자”(「적막」)라는 떨림/일상과 같은 감정이다. 일상과 온기는 서로의 몸에 스며들기 위하여 서슴없이 너를 꽃이라 하는 곡진함을 발명했다. 그럴 때 고영민의 두 손은 드라이플라워의 형상이다. 그것은 바짝 말랐지만 생의 여러 지층에서 돋아나서 지금 도착했다. 이미 눈물을 헌정했기에 시인은 꽃의 의미를 다정하게 나열한다. 고영민의 시가 애틋한 소이연이 저러하다. 오래도록 시인은 날짜들에게 죄다 공손했다. 윤달이 필요할 때마다 고영민의 시집을 뒤적거려야만 했다. - 송재학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