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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
손병걸
걷는사람 202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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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부 기쁘게 외로워져야겠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맛있는 악수
3월
음각
실면증
자가면역결핍증
자화상
빗방울 점자
소란
면-시각장애인용 컴퓨터 화면 속 이야기
송화
코스모스
조락
이름 없는 꽃

2부 막 개봉된 아침

등잔
그들의 하늘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서
승화원에서
참신
구월동 모래내시장
오래된 골목
조등
싸락비
푸른 나뭇잎
주먹
당신의 허벅지
절정

3부 긴 어둠을 삼키고 삭혀
살구나무 선산에 살구
봄이 오는 소리

저녁놀
딱딱한 소리
방석
대보름달
목침
대숲
댓거리
밥상
문자메시지 한 통
왕곱빼기 짜장면집
성년식
성혼식

4부 빛이 오면 어둠이 머물렀던 자리를
빛에게 내어주듯
나무숟가락
부석사 뒤란
입춘
스미다

베췌증후군
광부

국지성 호우
롤러코스터
녹차나무 한 그루
소나기
수목장
보성고사우르스

해설
우리의 이름을 만지는 꽃잎들은 모두 눈부신 어둠에서 왔다 · 김학중(시인)

저자 소개 1

강원도 동해에서 태어나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푸른신호등』,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통증을 켜다』,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 산문집 『어둠의 감시자』 등을 냈다. 2006년 구상솟대문학상, 2007년 민들레문학상, 2008년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2009년 전국장애인근로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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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3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170g | 125*200*9mm
ISBN13
9791191262292

책 속으로

순식간에 내 안으로 스며들어 와
어둠을 밝혀 준 당신

나는 행여나 당신이 떠날까 봐
긴 시간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나
당신은 굳게 닫힌 시건을 풀고
행선 모를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허공만 더듬는 오늘 아침 문득
서로 어루만져 온 희로애락의 문양이
손끝마다 새겨진 등고선 같아서
높은 산, 바람이 소용돌이를 치듯
내 몸을 통째로 흔든다

시리고 뜨겁고 크고 작고 가볍고 무거운 바람
저 숱한 바람은 누구에게나 보이지 않듯
시력이 없는 내 눈앞에서도 멀쩡히 불고
사방이 막힌 공허에도 당신이
거푸 분다 뜨겁게 분다

끌어안은 심장, 언어의 마음, 그리고 나부끼는 머리칼
차분한 눈길, 손목, 그 체온, 부드러운 목소리
해맑은 표정, 발목, 하얀 목덜미, 달콤한 키스
이제야 온전히 알겠다 한 몸이란
시간이 엉켜 온 체위가 아니다

소리 소문 없이 내 몸을 빠져나간 당신이
산 너머 먹구름 속으로 스민다 해도
텅 비어 버린 내 몸속을 휘도는 바람은
분다 열 손가락 끝에 음각된 순간
내 안으로 불어닥친 그 환한 태풍은
--- 「음각」
――――――――――――――――――――――――

우르르 쾅쾅, 천둥 소리에
깜짝 놀라 떨어뜨린 점자책

책갈피마다 알알이 박힌
무수한 점자들이
와르르 쏟아진 걸까

으깨진 머리를 감싸 쥐며
방바닥을 뒹구는
점자들의 비명이 들려오고

땅바닥을 치는 빗방울 소리 따라
가빠 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반지하 방바닥을 더듬을 때

내 생각과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두두두두, 빗소리는
꽉 닫힌 창문을 자유로이 넘나들고

다시 펼친 책갈피마다
하얀 여백을 딛고 오뚝한
점자들의 목소리 들려온다

--- 「빗방울 점자」 중에서
――――――――――――――――――――――――

하루의 노동을 마친

비알밭에서

굽은 몸 일으켜

남은 힘을 다해

산등성이 너머

흰 구름 속으로

핏물을 수혈하는

엄마
--- 「저녁놀」
――――――――――――――――――――――――

피돌이가 멈춘 듯 어둠이 밀려온다 몸속에 수분이 말라 간다 손끝이 아파져 온다 발끝이 저려온다 뼈마디가 쑤셔 온다 안압이 솟구친다 눈동자가 뜨거워진다 두통이 밀려온다 입술이 타들어 간다 혓바닥이 갈라진다 사타구니가 쓰려진다 근육이 뒤틀린다 안면이 일그러진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해야 할 말도 없어야 한다는 듯
골방에 갇힌 투병 앞에
행복과 불행은 선택의 문제라고
삶의 고통을 극복하라고 새로운 환경을 구축하라고
희망도서들이 말을 한다 그러나
지극히 당연한 문장들이 몸속에서 끓어오를 때마다
나는 한 움큼의 알약을 삼켜야 한다
--- 「베췌증후군」 중에서
――――――――――――――――――――――――

뒤척이던 어느 날 새벽이었다 수백 미터 탄광 속에서 짐승처럼 두 눈을 부릅뜬 채 곡괭이질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햇빛이 사라지고 얼어 버린 식물질이 땅속에 묻혀 열과 압력을 받아 광물질이 된 태백산 갱도 속으로 매일 밤 걸어 들어간 시커먼 얼굴이었다 따지고 보면, 시력 잃은 두 눈에 터질 듯한 통증과 고열에 시달리는 내 몸이 석탄계 아닐까 싶었다 (…중략…) 그때였다 머리맡 창 너머에서 어제의 사건 사고를 안고 뛰는 신문 배달부, 밤샘 근무 마치고 돌아오는 위층 아저씨, 우유 아줌마, 새벽 출근 발소리들이 가파른 골목길을 한바탕 흔들며 팽창하는 거였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어제도 오늘도 부산한 저 소리들이 지질시대 광부 같아서 나도 암흑기를 받아들이고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가 발소리 높여야겠다 갖은 다짐이 장딴지에 불끈불끈 솟구칠 때 벌떡 일어나 이부자리를 개고 얼굴을 어루만져 보았다 고스란히 닮아 있었다 갱 속에서 차가운 도시락 비워 가며 삶의 암층이 켜켜이 쌓인 암벽을 깨고 간신히 빛을 발굴해 온 우리 아버지 얼굴을
--- 「광부」 중에서
――――――――――――――――――――――――

오랜만에 마신 술 탓인지. 두 눈동자에 안압이 치솟고요. 밀려오는 두통 때문에 주머니 속에 가득한 진통제를 물과 함께 삼켰는데요. 여전히 빗소리는 멈출 생각이 없고요. 약 기운이 번지듯 지난날들의 통증이 무뎌지는 것 같았는데요. 착각이라 해도 좋고 용기라 해도 좋고 무엇이든 다 좋은 취기가 제일 좋아서요. 국밥집 문 활짝, 열고 쏟아지는 빗줄기 골고루 헤아리며 가파른 골목길을 저벅저벅 올라가는데요.

시커멓게 찌든 내 생활도
빗속으로 뛰어들면
꾹꾹 주무르다 탈수하여
무지개로 턱 널어 줄 것 같은

오늘은 나를 통째로 빨래하는 날

--- 「국지성 호우」 중에서

출판사 리뷰

이정록 시인은 손병걸의 시 작업을 “칠흑의 감옥 속으로 비류직하飛流直下하여 빛의 언어를 캔다”고 표현하며 “시력을 잃고, 그 불행 속에서 시의 뿌리돌기를 얻었다”고 평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인 손병걸이 “별똥별을 캐는 광부”가 되어 우리에게 “찬란燦爛한 불꽃과 처연凄然한 얼음이 한통속”인 시를 선사하고 있다고 찬사를 보낸다.

"헤아릴 수 없는 기억들이 모여드는 곳

신경세포와 신경세포 사이의 작은 공간

원자, 분자, 고체, 액체, 기체도 아닌
성분을 모를 기억들이 쌓인 저장고

죽는 날까지 가득히 채울 수 없는
고작 타원의 공간 속 한편을 차지한
설렘, 희열, 슬픔, 분노, 그 긴장과 전율

그래서 다시 그러나 그리고 그러므로
멈춤 없이 접속사를 생성할 때마다
다음 문장들을 아예 툭, 툭, 끊어 버리는

투명한 허공 속 가득 찬 사랑아"

2021년 봄, 소래포구에서
손병걸

추천평

감옥에 십 년 있으면 담 너머를 생각하지 못한다고 한다. 눈을 잃고 어둠에 갇힌 어느 날, 그는 스스로 ‘광부’가 된다. 칠흑의 감옥 속으로 비류직하飛流直下하여 빛의 언어를 캔다. 안팎마저 사라진 검은 허공을 갱도 밖으로 밀어 올린다. 허공에 꽉 차 있던 물바람 소리가 시인에게 스민다. 바람의 물무늬는 어디에서 오는가. 봉황새의 날개깃에서 온다. 풍風이란 한자는 봉황새를 그려 놓은 것이다. 아무도 본 적 없는 바람의 시작점이 상상의 겨드랑이인 거다.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바람처럼 소리가 탄생한다. 소리에는 빛의 지문이 있고 마을로 가는 길이 감돈다. 갱도에서 마을까지가 시인의 길이다. 시력을 잃고, 그 불행 속에서 시의 뿌리돌기를 얻었다. 부평초 뿌리는 물속에 갇혀 있기에 뿌리돌기라는 눈과 감각의 수뇌부가 생겨난다. 깜깜한 덩굴손이 허공을 읽는다. 별자리만 한 책이 어디 있으랴. 별똥별을 캐는 광부가 되어, 그가 천문도를 펼친다. 찬란燦爛한 불꽃과 처연凄然한 얼음이 한통속이다. - 이정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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