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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있다 없다 있다 없다
경각심 누구나 다 하는 생각 캠핑 오전의 아이는 한밤중에 문장이 되고 최댓값 공중 산책 기분 탓 낫 반짝반짝 비슷한 말 불 드 쉬프 침대 중심주의적 생활 단 한 번, 영원히 2부 미간에 잠깐 나타나는 난폭함 변명 녹는점 숲은 간지러운 걸 어떻게 참지 얼룩, 얼굴 사물의 방향 맹견과 애완견 붉은, 겨울, 나무, 눈동자, 혁명의 원리 구체적인 의자 전선들이 엉켜 있는 방에서 엉켜 있는 생각들을 풀어 가며 쓴 글 칫솔의 자세 건너편 바이얼레이션 3부 우울한 구름 색의 얼굴 단지, 분수만 있었던 오후 검은 밤의 운동성과 물질성 오늘 아침 나는 한 장씩 넘기다 보면 끝내 다 넘어가는 이야기 그런 사이 높이 치솟는 위로 길 위에서 만난 유령과 아직 죽지 않은 시체들의 밤 꼭꼭, 숨어라 감정과 검정 현기증 생각보다 쉬운 이별 나의 폐 쉽게 깨지는 물건 국어사전 4부 깊이 숨겨 놓고 가끔씩 꺼내 읽는 파도 사유지 파란 대문 인터뷰 갑자기 찾아오는 느낌 러시아 소설 같은 밤 공정한 마음 다행스러운 결론 돌멩이 목련꽃이 별처럼 부서져 내리는 밤이었다 삔이 그랬다 버섯수프를 대접받고 까닭 없이 기분이 좋아진 연출가의 마지막 무대 해파리 Hello World!!! 해설 겹쳐 쓴 고백 - 남승원(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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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사람들은 나태해질까
최선을 다해서 살까 이름을 바꾸면 한 번 더 사는 일이 된다는 말을 일단 믿어 보기로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여러 번 죽어서 죽음을 여러 번 기념하며 다시 태어난다면 슬픈 감정은 생기지도 않았을까 사랑도 지금처럼 아찔하지 않았겠지 영원은 아니지만 오직 단 한 번, 왜 매일 밤 일기를 찢었는지 손톱을 물어뜯었는지 나는 왜 그랬는지 알고 있지만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목적지를 말하고 요금을 지불하듯 이름을 바꾸고 택시에서 내렸다 ---「누구나 다 하는 생각」중에서 낫을 하나 주문했다 낫의 단호한 어감이 매력적이었다 기다리는 내내 결의문을 쓰고 읽었다 둥근 곡선을 밖으로 보이며 속으로 칼을 가는 낫의 자세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하여 낫을 사이에 두고 당신과 맹세할 것이다 그러나 내려칠 목도 당신도 없구나 사랑은 더더욱 나의 것이 아니구나 내가 아니면 너이고 너가 아니면 나라고밖에 할 수 없는 우리 (중략) 나는 너의 뒷모습이고 너는 여전히 나의 얼굴, 우리의 적의는 늘 무엇인가를 향해서 움직인다 ---「낫」중에서 한 번도 닫힌 적이 없었던 나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던 나 이렇게 멀리까지 가도 되는 것일까?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는 저녁처럼 점진적으로 다가가는 마음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옮겨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단 한 번, 영원히」중에서 머리를 깎는다고 집을 나왔다 담배 한 갑과 아이스커피를 한 잔 사서 나무 그늘에 섰다 먼저 머리를 깎고 관악산을 오를까 목욕을 하고 업체 사람들을 만날까 이력서가 안주머니에 있으니 안도하며 담배를 하나 물었다 일단 얼음이 녹을 수 있으니 커피를 먼저 마시자 아니 관악산은 언제든 오를 수 있으니 목욕을 하고 업체 사람들을 먼저 만나자 그늘을 따라 자리를 옮기는 동안 관악산이 푸르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얼음은 녹고 있었다 원을 그리며 나무를 돌고 있는 발걸음이 불규칙적이다 계약은 성사될 것이니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관악산으로 가자 이력서는 녹는 일이 없으니 커피를 먼저 마시자 집에는 다림질을 하는 아내가 있고 나는 조용히 현관을 열고 들어가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우면 된다 머리는 단정하게 빗겨져 있을 것이다 업체 사람들은 나를 기다리며 시시덕거리다 퇴근했을 것이다 그러니 먼저 관악산을 오르는 것이 좋겠다 그림자를 따라 돌면서 하루 종일 관악산을 바라보다 이발을 하고 귀가했다 ---「변명」중에서 십자가의 뒤편은 얼마나 어두울까 모든 성상에는 방향이 명확하다 십자가 뒤에서 어두운 얼굴로 포도주를 마신다 오늘은 정식으로 고아가 되는 날 (중략) 바람에 날리는 상복과 흰 붕대, 건널목을 건너는 부러진 목, 발 삶과 죽음을 넘어설 만한 상상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돌멩이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죽거나 돌멩이로 태어나서 돌멩이로 죽는다 나무만 방향이 없어서 조금 더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사물의 방향」중에서 밤이 쇼케이스에 칸칸이 진열되고 내가 평생 속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죽기 직전에만 깨달으면 되는 일 지금부터 눈치챈다면 남은 생이 너무 불행할 거야 ---「검은 밤의 운동성과 물질성」중에서 두려움은 믿음이 약한 자들의 것이었기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셰퍼드의 목덜미를 쓸어내리곤 했다 그렇게 하기까지 나는 셰퍼드를 만질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수없이 기도했다 어쩌면 내가 신부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미국에서 온 셰퍼드를 길들이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산 밑 저수지에서 친구 몇이 빠져 죽었다 얼음이 깨지면서 저수지는 사나워졌다 얼음 밑으로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는 친구는 며칠 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았다 누구도 날뛰는 저수지를 길들이지 못했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연애를 시작한 형과 누나 들은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지만 나에게 그럴 만한 용기가 없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다행스러운 결론」중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고아가 된다 사랑과 이별에도 무기력한 나이가 된다 보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죽은 사람들이지만 꽃은 꽃밭에 대한 기억만으로 만개하지 않는다고 삔이 내게 그랬다 우리는 서로에게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 조금 더 멀리까지 사랑하는 일은 달빛 아래에서만 가능한 일 호수 위로 밤이 새하얗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삔이 그랬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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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목소리는 바람에 마르지 않는다. 유령처럼 떠돌다가 지구에 쌓인다. 그것이 말인지 생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백 년쯤 후면 내 목소리도 지금보다 더 둥글어지거나 평탄해져 있겠지. 방향과 질감만으로 묵독 속에 남아 있기를…… 2024년 가을 정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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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시’를 찾아가는 동방 박사가 있다면, ‘시’와 동방 박사의 발걸음 사이 어디쯤 정은기의 시는 있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물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피는 ‘적막 관찰자’의 시선으로 그의 시는 존재한다. 르네 샤르와 프랑시스 퐁주 사이 어디쯤.
드러냄을 통해 감추고 감춤을 통해 드러내는 시인의 발성법은, “그림자, 구름, 기도, 아내, 개” 등 강력하게 반복되는 시어들을 통해 현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감춘다. 그러나 어쩌면 행간의 세계, 감춤의 세계에 잠복하고 있는, 현재 그의 시에 등장조차 하지 않은, ‘도래할 말’ 속에 정은기의 시는 있을 것이다. 시인의 은밀하고 무한한 상상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이미 출발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삔이 그랬다」), 그럴까? “그러니 우리/새로운 말을 하나씩 배우면서/천천히 헤어지는 것이 어떨까?(「Hello World!!!」), 그럴까? 그럴까? 정말? 그러자! 만약에 ‘시’를 찾아가는 동방 박사가 있다면, ‘시’는 그 어디에도 없고 동방 박사가 ‘시’였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으니! 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 아니, 적이 되기 전부터 적이 된 이후로도,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사랑을 한다. 정은기가 그러하듯이, 그의 시가 그러하듯이. 시인이여, 무한을 향해 걷자. 이 세계는 시가 적힌 한 장의 종이에 지나지 않는다. - 박정대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