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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시간의 빛
섬 안개의 시간 구름의 시간 기울어지는 시간 바람의 시간 열매가 나는 시간 시간의 힘 기다림의 안쪽에 피는 꽃 이팝나무 사철나무 파도의 속말 마음의 경계 조응 안개 2부 저물 때만 잠시 아름다운 가을강 방사선 치료실을 나오며 청동물고기 아침은 느리게 오고 암 병동에서1 암 병동에서2 녹색 목도리를 뜨며 촛불 어떤 전언 병상 일기1 병상 일기2 시시포스의 하루 히말라야 핑크소금 목인박물관에서 일몰에 기대다 3부 빛이 없는 밤에도 별은 흐르고 흙도 없이 꽃이, 물이 되고 싶은 날 유월의 비망록 매미 미루나무 빗자루 샤콘느 가을의 무게 목련차 자작나무 새벽의 시 유목의 바람 메타세쿼이아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다 분리 녹턴 4부 흐르는 구름의 주름들 몽돌 바람의 귀 닥나무 개심사에서 진흙 속의 소가 저도 모르게 목어 꽃살문 목백일홍의 전설 구인사에서 옷이 멀다 되새 섬 속의 섬 얼음새꽃 별똥별 해설 수평선에 그려 넣은 바람의 악보 -박남희(시인·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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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의 욕망이 아니어서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오르지 않았다 내 몸속엔 어미 같은 화산도 있고 아비 같은 나무도 있어 그저 꿈꾸고 싶어서 나는 항상 바람과 같이 있었다 나는 수많은 새들이 지저귀지 않아도 저 먼 수평선에 바람의 악보를 그려 넣을 수 있다 --- 「섬」 중에서 동지 전 짧아진 길 마로니에 공원을 서성거리다 서울대병원 오랜 수령의 은행나무 위로 붉어지는 일몰의 하늘을 바라본다 저물 때만 잠시 아름다운 착시에 몸을 기대는 시간 꽃이 피었다 진 수척한 꽃대도 지는 해를 바라보던 나도 한순간 바람에 귀를 비우고 우두커니 서 있다 --- 「일몰에 기대다」 중에서 춥고 피곤한 날 서 푼어치밖에 남지 않은 눈빛으로 섬으로의 망명을 꿈꾸며 카프카를 읽는 오후 11월도 중순 응달진 자작나무 아래 낮게 씨를 달고 있는 시들어버린 꽃을 보다 문득 뜨거움이 울컥 치민다 시들어도 꽃은 우주의 중량을 품고 있구나 짧은 가을을 보내는 마른 꽃의 튼실한 무게 --- 「가을의 무게」 중에서 해운대 미포 앞바다에서 주운 검은 몽돌 한 개 눈물 같은 바닷물이 묻은 돌의 표면에 내 얼굴이 비친다 바닷물보다 짠 삶 쪼그라든 가슴으로 갯바람이 감겨오고 우주의 무게로 심장 안까지 들어오는 바다 천연덕스러운 물결 위로 익명의 갈매기들은 흔들리고 떼울음으로 다가오는 파도 바다의 푸른 이마 위로 흔들리는 흰 시간들 --- 「몽돌」 중에서 꽃 진 능소화 사이로 흐르는 구름의 주름들은 낮달의 자국이 선명한 왼쪽 가슴 푸르게 돋을 별을 기다린다 별자리 옆으로 흐르는 바람은 서로 어깨를 스치며 가고 흐드러지는 별 바람이 지나는 자리마다 우주의 부호가 되어 지상으로 내려온다 어둠에 선명히 새길 마지막 문장이 되기 위해 --- 「별똥별」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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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문학과 경계』로 등단한 이후 바람에 출렁이는 물결 같은 시인의 삶이나 내면세계를 직관적으로 암시하는 시편을 써온 배교윤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일몰에 기대다』(걷는사람)가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심상은 바람과 물이다. “그저/꿈꾸고 싶어서/나는 항상 바람과 같이 있었”(「섬」)다고 말하는 시인은, “이루지 못한/몽유로 서성이”(「파도의 속말」)는 유년의 푸른빛을 바다 위에 펼친다. 이는 자유롭게 세상을 유영하는 유목민적 시세계를 표상한다.
박남희 시인은 해설을 통해 “그의 시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주체와 대상에 대한 인식이 새롭고 중층적이라는 점이다. 이런 중층적 사유를 바탕으로 이번 시집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구름’ 이미지는 ‘바다’나 ‘섬’ 이미지와 결합되어 노마드적 사유에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이처럼 배교윤의 시는 노마드적 사유를 체험이나 상상력을 통해서 응축된 언어로 풀어내는 진경을 보여준다. 그동안 지난한 삶 속에서도 시라는 “먼 수평선에/바람의 악보를 그려 넣”어온 시인의 열정이 앞으로 어떤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갈지 기대가 크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묻고 생각하고 또 물으며 몸을 일으켜 세우지만 주사위처럼 던져진 짧은 생의 화두 (중략) 귀를 열고 바람 속으로 마음을 흘려보낸다 ―「방사선 치료실을 나오며」 부분 시인은 투병 이후 스스로에게 답 없는 질문을 던진다. 삶과 죽음의 경계 앞에 놓인 시인은 “버리고 떠나온 덜컹거리던 시간들을 헤아린다”(「구름의 시간」). 하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에 방전된 몸”(「암 병동에서 1」)은 해답을 내려주지 못하고, 대신 “아직 끝나지 않은 계절”에 “푸른 그림자와 서 있”는 형상으로 자연으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자연이야말로 죽음과 탄생을 반복하는 순환구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날마다 바람은 무던히도”(「열매가 나는 시간」) 부는 것처럼 시인도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감을 시집 전체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시인의 말 암과 싸운 시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이겨내기 위해 썼던 글들을 묶는다. 유목민의 영혼을 위해 살았던 생애를 위해. 이겨내라 무한 힘주신 분들께 이 시집을 바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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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을 겪고 난 시인이 이른 곳은 어디일까. 몸의 시간일까. 우주의 시간일까. 몸의 시간이 유한함에 대한 떨림이라면 우주의 시간은 무한함에 대한 울림일 것이다. “시들어도 꽃은 우주의 중량을 품고 있”(「가을의 무게」)음을 포착하는 걸 보면 그는 몸의 시간인 떨림과 우주의 시간인 울림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 그의 시를 읽고 있자니 삶의 진의를 느낀 자의 독백 같은, 여기와 저기의 경계를 넘어선 자의 깨달음 같은 통각들이 나지막이 깔린다. 나는 이 통각에 주목한다. 그는 아픔이라는 통각痛覺을 통해 마음속 우주가 열리는 통각通覺으로 나아갔음에 분명하다. 나는 새삼 놀라는 중이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사람의 숨결이 이렇듯 정결하고 가지런하다니. 정심淨心의 밑바닥에 고여 흐르는 여유로움을 보라. 그는 이 여유로움 속에 물과 바람과 별과 나무들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우주를 발견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적어 내려가는 시는 “우주의 부호가 되어/지상으로 내려”(「별똥별」)오는 별일 수밖에는 없다. 아마도 그의 시는 저 별이 소멸될 때까지 계속해서 쓰일 것이다. 아니, 저 별이 사라진다 해도 그의 시는 발화될 것이다. 그의 순정함이 기록한 시의 역사는 또다시 누군가의 입김으로 지상에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저 우주의 부호인 별자리가 모든 시인에게 허용되는 것은 아님을. 별이 되어 내리려는 자는 마땅히 스스로, “어둠에 선명히 새길/마지막 문장”(「별똥별」)을 각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정우영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