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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1부 그리고 침묵제조업입니다팔자인상영업사원빤다고객님과 보낸 한 철소금 인형뼈의 맛돈의 맛영구기관시(詩)써칭 포 캔디맨出, 사표정언명령2부 잘 먹고 잘 자기 위해천 원인 것죽자 살자 먹자사인멍그곳에 가고 싶다물의 모서리낙망문턱형(刑)몽당온통 벚꽃배트맨1인 3역저리구나33번지 명사들재귀 호출사물의 통각3부밝히는 사람거울정치하게아내가 필요해검찰을 찾아라a를 기다리며한 점 의혹도 없이층간딱한 사람깐다벽자기유지회로(自己維持回路)빤다2수영 입문기물의 방추천의 글 _김언 박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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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우화의 시인 송기영이 신작 시집 『써칭 포 캔디맨』을 출간했다. 민음의 시 282번. 첫 시집 『.zip』출간 당시 김언 시인은 송기영의 시를 일컬어 “필생의 이미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편의 우화” 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오은 시인은 “결정적인 순간에 까르르 웃는 것”을 송기영의 시가 지닌 비장의 무기라고 했다. 200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줄곧 그가 세공한 ‘웃픈’ 장면들은 “정면에서 바라보고 측면에서 교란하”며 “엉뚱하면서도 이상한 시적 효과”를 발생시켜 시인 특유의 에너지를 만들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슬픈 웃음이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삶의 표정. 8년 만에 출간되는 그의 두 번째 시집이 각별히 반가운 이유다. 『.zip』에서 시인은 수치화된 세계의 일상성을 통해 자본의 논리를 인식하면서도 허망하게 미래를 응시하는 대신 삶의 근원과 존재의 뿌리를 향해 항로를 돌렸다. 그로부터 8년. 점점 더 생존하기 힘들어지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인식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대기 안에 있는 것들은 결국// ‘아달달 녹아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까 저마다 한 철”이라고 말하던 시 「철 추파춥스」는 지금의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첫 시집이 자본주의라는 세계를 항해하는 배의 이미지였다면 두 번째 시집 『써칭 포 캔디맨』은 물길 위에서 자기만의 수로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선원의 안간힘을 닮았다. 첫 시집이 옆구리를 교란했다면 이번 시집에는 옆구리가 없다. 찔러 볼 옆구리조차 없는 세상에서의 안간힘이란 결국 소용없는 노력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가하는 노력만이 쓸모에 잠식당하지 않는 가능한 주체성이자 삶의 유일한 회로라는 사실이 한층 높은 밀도로 세계의 쓴맛을 증명한다. ■ 캔디맨이 울지 않는 이유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처럼 우리의 ‘캔디맨’도 울지 않는다. 캔디맨에게는 울 시간도, 울 기회도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캔디맨은 지금 울 처지가 못된다.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캔디맨을 빨아먹기 위한 눈초리가 사방에서 그를 에워싸고 있다. 그 뜨거운 눈길에 캔디맨의 몸은 지금 이 시간에도 꼬박꼬박 녹고 있는 중이다. 캔디맨으로서 우리는 자본의 쓰임에 따라 가진 것을 모두 내어 주고 가지지 않은 것까지 다 내어 주느라 삶의 당도를 잃고 일상이 싱거워진 지 오래되었다. 표제작이기도 한 「써칭 포 캔디맨」의 모티프가 된 것은 영화 「써칭 포 캔디맨」이다. 슈가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이라면 캔디는 쓰임이 결정된 상품이다. 이 시집은 슈가로 살아가고 싶었으나 이미 캔디로 결정된 삶이 당도를 잃어 가는 감정을 서글프게 포착한다. ■ 비자기들의 향연‘자기’라는 말의 쓰임은 광범위하다. 때로 그것은 연인을 부르는 말이고 때로 그것은 직장 동료를 부르는 말이다. 친밀한 사적인 언어일 수도 있지만 거리를 지키는 공적인 언어로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自己)’는 무엇보다 스스로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의 음성 안에 너무 다른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처럼 ‘자기(自己)’는 쉽게 타인으로부터 침범당한다. 자기로 살아가고 싶으나 ‘비자기(非自己)로 살아가는 것이 자기들의 운명. 시집은 비자기들의 기록으로 빼곡하다. 비자기는 자기가 아닌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자기다. 자기가 아닌 자기란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자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때 자신을 지배하는 것은 물론 자본의 논리다. 끝없이 반복되는 비자기들의 향연은 과연 자기유지회로를 찾을 수 있을까? 이 시집은 자기유지회로를 찾기 위한 도전 그 자체이기도 하다. ■ 쌓이는 공포, 녹는 슬픔 『써칭 포 캔디맨』에서 송기영은 상품으로서의 인간을 바라보는 애처롭고 안쓰러운 시선을 자조와 유머가 뒤섞인 광대의 언어로 표현한다. 쓸모를 잃고 재고가 되어 창고 구석에 쌓여 가는 모멸적 삶이 환기하는 공포가 이 시대를 대변하는 정서라면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맨’은 차라리 녹을지언정 쌓여 가고 싶지 않은 이 시대의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삶이 계속되듯 영업은 계속된다. 영업이 계속되는 한 삶도 계속된다. 단물을 빨아들이는 입들이 더 이상 우리를 쳐다보지 않을 때 비로소 캔디맨으로서 우리의 임무는 끝날 것이나 그때 우리의 삶도 함께 끝난다는 점이 캔디맨의 종말을 기뻐할 수 없게 한다.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는 막다른 길 위에 선 우리 슬픈 캔디맨의 초상. 송기영의 유머는 이번에도 비극의 옆구리를 찔러 슬픈 웃음을 유발한다. 쓴웃음이란 말은 송기영의 시 앞에 선 우리의 표정을 이르기 위해 태어난 말이 아닐까. ■ 시인의 말나의 말이 나의 고삐이기도 한데그 누구도 이 말에 박차를 가할 순 없지왜냐하면 이 말에는 옆구리가 없으니까말했다나는 말한 것말만 한 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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