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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의 소리로 여기까지
김학중
걷는사람 202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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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부 빈 채로 모여 있을 물통들

어제는 이름이 없는
나의 밤은 오랫동안 불면이라
밤은 누군가의 역
지나간 시간이 돌아오라고 하니
처음의 노래로 돌아가려 하네
누가 처음 어린 연인이 되었을까
보이는 것은 뜨거워지지 않는다
누구나의 혀
우편의 눈
게스트 하우스
여행지에 두고 온 가방이 있다
치타공


2부 아무도 읽지 않는 글자의 빛깔

암점
리듬
계시
시간의 현수막
테레시아스
몸이 곧 예언이니
사막의 시
세기
세기 2
세기 3
세기 4
세기 5

3부 모두가 떠난 곳을 살아내는

페이퍼 컴퍼니
회전초
집비둘기
어떤 명절
손톱에 톱니가 생겼다
먼지
케이블
빌라
가맹점
오늘의 기상 예보
스트리트 북
공중도시
상자도시
마트
반집

4부 텍스트

무력의 텍스트
그날의 텍스트
수의 텍스트
레시피
신의 텍스트
해부의 텍스트
부록의 텍스트
필사자
번역가
물고기 텍스트
스물은 욥
교환과 교환수
주주를 찾아서
모두의 텍스트
바깥의 시작

해설

바깥의 길목에서
-정재훈(문학평론가)

저자 소개 1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선천적 저시력 장애인이다. 저시력 장애인이란 말이 낯선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장애인이면 장애인들이 하는 일을 하며 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말이 몹시 아프게 들렸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미래가 제한된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한 인간으로서 나 자신의 삶을 오롯이 살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스스로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고 있다. 2009년 [문학사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2017년 첫 시집 『창세』를 냈고 같은 해 제18회 박인환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경희대와 안양예고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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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8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172쪽 | 214g | 125*200*20mm
ISBN13
9791192333236

책 속으로

나의 밤은 오랫동안 불면이라
그대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네
다만 음성으로 오는 순례의 신호들이여
소리는 견뎌 온 세계로 삶의 무게를 견디는 것이니
밤이여 우리가 서로를 일으키는 무게였구나
그때에는 밤의 길을 따라 걸으며 모르고 있었구나
우리 스스로 깃들었네 길들의 바닥이여
이렇게 밤은 우리의 몸을 얻었구나
---「나의 밤은 오랫동안 불면이라」중에서

게스트 하우스에서 내 얘기를 들은 여행자들은 도대체 누가 물통 같은 걸 훔쳐 가냐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는 대답들을 들을 때마다 어떤 목마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게스트 하우스」중에서

늦여름 새벽, 새벽마저 첫차를 기다리는 정거장에 서서 뒤돌아보니 그늘막 속 희미하게 밝아 오는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이 보였다 시간은 침묵하고 있었다 아니 침묵이 시간을 펼쳐 두고 있었다 그사이 마스크를 올려 쓴 몇몇 사람들이 정거장에 왔다 그들은 익숙하다는 듯 침묵에 귀를 기울이며 점멸하는 정거장의 안내판에만 가끔씩 눈길을 주었다 그늘막 뒤편 포도밭에는 줄지어 영그는 포도송이가 무심하게 가지런했다 농익은 포도 향이 시간의 침묵으로 스며들었다 포도알처럼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지만 하려는 말이 무언지 알아채기 전에, 환하게, 아침은 오고 버스는 승객들을 태우고 떠났다 정거장에는 현수막만이, 아침 햇살 속에 색이 바랜 글자들을 펼쳐 두고 남겨졌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자의 빛깔을 더듬으며 여전히 시간은 그 자리에 있었다
---「시간의 현수막」 전문

그는 종이를 꺼내고 잠시 이름을 고민한다. 그가 회사라고 이름을 쓰면 그것은 회사가 된다. 그가 시작한 이 일은 관찰자에 따르면 매우 병적인 모습으로 보였지만 놀랍게도 현실이 되곤 했다. 처음에는 출근할 곳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 놀이였다고, 그는 주장했다. 관찰자들은 그에게 거리를 두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그의 숭배자가 되었다. 그는 『페이퍼 컴퍼니-회사의 기원』 이라는 유작을 관찰자들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페이퍼 컴퍼니」중에서

그들은 시가 발굴한 유적이 다만 언어라고 했다
그들에 따르면 공중유적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언어일 뿐이라고 했다
(…)
언어가 지나간다
지나가며 그들은 시민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닦아 주었다
지나가는 일이 끝나면 추방자들은
그들의 언어인 공중에 도착할 것이다
오래전 그들처럼 추방된 자들이
공중에 먼저 세운 나라들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공중도시」중에서

나는 한 문장도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쓴 문장을 벗어난 문장들이 페이지를 채우고 있었다. 물론 그 문장들은 분명 언어였다. 언어라서 문장인 문장들은 거기 놓인 채 페이지를 흘러가듯 이어지고 있었다.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 그가 내게 말하고자 했던 바로 그 계곡이 펼쳐져 있었다. 그 계곡 사이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나는, 아마 그도 그럴 것이겠지만 서로 다른 언어로 부드럽게 웃었다.
---「번역가」중에서

물고기들의 정거장이 있다
누구도 정거장이라 생각하지 않는
여름의 빛이 도착하는 파도
물결 위에 잠깐 정거장이 선다
(…)
어떤 언어도 수확하지 않는 것이 세계라니
누구도 먹이지 못하고 잠시 멈추었다 떠나는
떠나기에 풍성한 살의 신호들
거기에서 모든 언어는 헤엄쳐 이별한다

---「물고기 텍스트」중에서

출판사 리뷰

우리는 살아서 먼지가 되었다. 그 사실을 우리는 거부하고 싶다.
-「먼지」 중에서

“그들은 여기 바닥의 소리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미안하지만 이것은 현실이다”라는 ‘시인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시집은 바닥이라는 현실에 발 디딘 고뇌와 의문으로 가득 차 있다. 시인은 특유의 무미건조한 태도로, 블랙유머 깃든 텍스트로써 독자로 하여금 ‘바닥의 소리’에 집중하게 만든다. 해설에 이러한 대목이 있다. “당신은 제가 봤던 사람들 중에서 행실이 가장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질문을 갈구하는 표정을 했었으니까요. 평소 저는 질문을 하려는 자세야말로 진정 인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정재훈 문학평론가) 이 시집을 읽고 나면 질문하는 삶의 태도가 순례자로서의 재목이 되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비록 현재는 서늘하고 냉혈한 도시의 이미지로 그려지지만, 이 시집을 덮는 마지막엔 “떠나간 이를 기억하는 울먹임”(「무력의 텍스트」)이 우리를 위로한다.

시인 자신은 비록 점점 시력을 잃어 가고 있지만, 그의 저항 정신은 자유로운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이어져 ‘의미 있는’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을 보여 준다. “언제까지나 어릴 것 같은 시간이 아마도 그 자리를 지나갔을 것이다. 어디든 역인 여기에서.”(「누가 처음 어린 연인이 되었을까」)처럼 사랑스런 연인이 되기도 하고 “거기에는 어떤 비밀도 간직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숟가락질이 남긴 흔적들이 똑같은 모양의 텍스트로 남아 있었다.”(「레시피」)와 같이 그리움을 마주하는 시간 속으로 가기도 한다. 시인이 연주하는 음역을 따라가다 보면 여행자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김학중 시인은 텍스트에 담긴 힘을 아는 사람이다. 가벼운 유머처럼 보이는 장면에도 반성하는 자세와 비판적인 시선을 담아냈다.

추천사를 쓴 전형철 시인은 시인의 숙명이 “밝음과 어둠의 경계를 지우고 세상의 기원과 이치를 탐구하는 일”이라고 말하며 “지금 시인의 밤은 깊다. (…) 김학중은 그렇게 경전을 적고 있다.”라며 시집 속의 텍스트들이 신의 언어 같은 예언이라고 표현한다.

시인의 말

그들은 여기 바닥의 소리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미안하지만 이것은 현실이다

어떤 삶은 파편화되고 부서진 텍스트를 거쳐서만 겨우 현재에 도착할 수 있다
그것이 시가 텍스트에게 몸을 허락한 이유다

시에서 텍스트로 다시 텍스트에서 시로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시간을 견디고서 자신이라는 타자로 온다
누군지 모를 존재들의 이름들까지 품고서

시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온다

2022년 7월
김학중

추천평

김학중은 소리를 본다. 시인에게 “소리는 견뎌 온 세계로 삶의 무게를 견디는”(「나의 밤은 오랫동안 불면이라」) 일이며, 밝음과 어둠의 경계를 지우고 세상의 기원과 이치를 탐구하는 일이다. 지금 시인의 밤은 깊다. 소리는 깊은 밤을 무연히 횡단하며 노래가 되기도 하고 서로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목소리가 되기도 한다. “흘러가면서 녹는” 시간을 두고 “잠시 안이자 바깥”(「암점」)인 여기를 두고 시인은 순례한다. “한 손에는 지팡이 다른 손에는 가죽의 책”(「테레시아스」)을 들었기에 그는 순례자이며 동시에 예언자이다. 그리고 처음의 노래와 어제의 없는 이름이 만드는 “대답이 없는 시간을 견뎌 온 자들”(같은 시)의 텍스트들을 기록한다. 완성된 적 없는 “기원을 잃어버린”(「빌라」) 우주宇宙와 “언어의 끝”(「사막의 시」)과 “언어의 물가”(「번역가」)에서 만난 신성神聖과 “아무 일 없이 가도 시간인 시간 속에서”(「세기 4」) 바로 이 세기에 표류하고 있는 우리라는 “빈 여백”(「레시피」)에 자신만의 문장을 남긴다. 이 “텍스트 가장자리에 구원자가 올 자리”(「필사자」)를 마련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김학중은 그렇게 경전을 적고 있다. ‘세기’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 세상의 ‘모든 텍스트’들이 “바깥의 안”(「바깥의 시작」)으로 “탈출하는 우리의 노래”(「모두의 텍스트」)를 완성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테레시아스이며 시온이며 재곤이자 K인, 비밀스런 레시피를 기록하는 시인 김학중이 풀어 둔 판에 ‘잠시 몸을 맡길’(「판」) 차례이다. - 전형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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