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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부 나는 잠깐 사람

텐션
비현실
공원에서의 대화
정서와 서정
안전제일
이 모든 것이 사랑에서 비롯된 미래는 아니길 바랐다
버드 오브 파라다이스
카니발리즘
엑소더스 클럽
데자뷔
플라스틱 아일랜드
송구영신

2부 무단투기 금지

Walking in the rain
에덴에게
희귀종
불면증
장례
오늘의 운세
기일
식물일기
핸들링
트리거
스테레오 타입
자정의 숲, 벌거벗은 소년들
Vertigo
소각장

3부 부드러운 악과 조용한 선

터닝 포인트
지그재그일 거라고
철로를 베고 누우면
다큐멘터리
지키의 농구
머그샷
동심원
총을 뽑아 들기 직전의 카우보이와 뒤돌기 직전의 나 사이에는 무엇이
윈터 블루스
요리사 사티
신앙
주사위의 일곱 번째 면
리사이클
팬데믹

4부 마음은 플랑크톤

슬픔은 화분의 자세로
평화와 평화
라온빌
제이에게
더 로스트 드라이브
렌트
우리의 오해는 영원히
앙팡 테리블
블랙아웃
생태계
5년
신기루
편성
세실리아

해설

ㅁㅗㅁ
-홍성희(문학평론가)

저자 소개 1

시인, 극본가, 타로마스터, 전략기획팀장+@.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고, 스무 살 때부터 다시 서울살이 중.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필연적으로 상처를 받지만, 다시금 사람을 사랑하고 믿는다. 언어로 세계를 담아내는 것에 순수한 기쁨을 느껴 시의 옷을 입고 작업하는 것을 가장 즐긴다. 시집으로 『앙팡 테리블』이 있다. 한없이 게으르고 싶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병이 나는 체질이라 끊임없이 일하고 논다. 지난 과거들이 나의 오늘을 만들었기에, 내일을 위해 오늘을 치열하게 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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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2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184쪽 | 204g | 125*200*11mm
ISBN13
9791192333656

책 속으로

가늠할 수 없이 긴 식탁 위에
잔 접시 나 나이프 포크 너
늘어져 있다

나와 나이프는 조금 가깝고
너와 잔은 아주 멀다 그리고
우리는 마주 보고 있다
서로 알고 있는 서로를 매 순간 흘려보내면서
아주 오래된 친구라는 확신을 가진 채로
그사이

돼지가 지나간다

지나는 게 중요해, 간다는 게 중요해?
질문할 수 있다는 건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식탁보 대신 나의 일생을 깔아 놓고
그 위에서 만찬 혹은 손가락을 빨자 비로소

정물로서의 나와 생물로서의 나이프
그렇다면

돼지가 지나가고 있다
---「텐션」중에서

우리는 앞을 보며 걷는다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는 줄도 모르고
옆을 잊은 채

오늘 저녁은 무얼 먹을까
서로가 떠올리는 식탁에는 의자가 하나뿐이고

어느덧 너는 저만치 앞에 서서 걷고 있다

기묘한 고요

뒷모습을 바라보는 건 지겨운 일이야
불현듯 희미하게 네 허밍이 들려오고

지긋지긋한 사랑을 하는 연인의 모습을 위해서
우리는 많은 시간과 상상이 필요했지

색이 바랜 벽돌도 벽돌이듯이
아주 오래된 연인인 우리는

공원에서 만난다

공원에는 혼자 걷는 사람들이 많다
---「공원에서의 대화」중에서

애인이 집으로 왔다
나갈 땐 죽을 것처럼 울더니 살아서 돌아왔구나

네가 없는 빈방에서 소리가 났는데

몸살이 났다
몸에 살이 나면 원래 아픈 건가

우리는 하나의 소파를 나눠 쓰고
나는 자꾸만 등 쪽이 서늘해진다
가 닿을 수 없는

애인의 손과
어제 없는 미래

우리는 소파의 끝에 각각 앉는다
이쯤에서 애인은 꽃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해를 바라보면 해바라기고 달을 맞이하면 달맞이라고
나는 그런 꽃의 충성심이 무섭고

살이 자꾸만 난다
살이 몸이 된다는 건
소리에 목메는 것과 같고

애인은 소리 없이 웃는다

한쪽이 정서면 다른 한쪽은 서정이다
둘은 한집에 살고

소파는 이 집 중심에 있다
---「정서와 서정」중에서

당신이 없는 곳으로부터 당신이 태어난다
간단하다,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해 시작되고
나는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배고프다, 중얼거리면
불투명한 얼굴로 식탁 위에 솟아나는 당신, 당신들

침 속에 고여 있는 투명한 시간
차가운 접시 위
연기처럼 새어 나오는 불가능이란 말이 좋아

당신에겐 사랑이 불가능해서 나는 꿀 수 있는 꿈들만을 꾸고
잠들 수 없는 밤이 계속돼서 나는 사랑하는 척을 했다

잊었어? 우리에겐 약속이 있잖아
개의 꼬리같이 쉽게 흔들리는
---「카니발리즘」중에서

두 사람이 내게 방향을 물었다 나는 등을 돌렸다
그들은 나를 등지고 걸어갔다

나는 양을 치고 있었다 양 한 마리 두 마리… 열 마리까지 세다 그만두었다 내가 가진 손가락이 그게 전부여서

가진 것 이상을 탐내지 않기로 했다 덕분에 울타리는 견고했다

열 마리의 양이 내 앞을 왔다 갔다 했다 그중 한 마리가 유독 어리고 하얘서 시선을 사로잡았다 흰 양은 내 앞에 가만히 엎드렸다 미동도 없이

눈을 뜨고 있었는데 잠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다른 양들을 울타리 쪽으로 몰았다 새하얀 양은 홀로 빛났다
---「터닝 포인트」중에서

지도에는 숲의 샛길만이 그려져 있다. 여기는 반듯한 도시고 매끄러운 도로뿐이다. 너는 능숙하게 차를 몬다.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은 이쪽이 아닌 것 같은데…….

백미러를 흘끗 쳐다본다. 우리가 지나온 길 위로 많은 것들이 떨어져 있다. 트렁크가 다 안 닫혔나 봐. 너는 말이 없다. 도로가 갑자기 울퉁불퉁해진다.

차 좀 세워 봐. 너는 액셀을 밟는다. 유리창에 돌이 튄다. 창밖의 풍경이 직선으로 번진다. 어지러워……. 네가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몸이 앞으로 쏠린다. 땅엔 우리의 짐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다. 하늘은 청명하다. 나는 차에서 내려 흘린 짐을 하나씩 줍는다.

차와 점점 멀어진다.

풍경은 천천히 흐른다. 떨어진 짐을 다 줍고 다시 차로 향한다. 걸어도 걸어도 차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짐을 들고 길을 잃는다. 정처 없이 걷다가 짐을 내려놓고 숨을 돌린다. 황무지 저 멀리 너의 차가 보인다.

나는 짐을 두고 차로 향한다. 조수석에 올라탄다.

운전석에 네가 없다.
---「더 로스트 드라이브」중에서

눈이 내렸다 우리는 사막에서 하염없이 걷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쌓였다 허리께까지

정도를 모르는 것 같아 네가 주저앉으며 말했고

나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모른다는 것의 확실함과 아는 것의 희미함 사이에서

그만 가 모래알처럼 버석거리는 목소리로 너는 내 발목을 잡았고 나는

무엇이든 혹사시켰다 잘 알려면 그래야 했다 나는 좀더 가 볼게 눈을 헤치며 걷는데

눈은 녹지 않고 너는 자꾸만 가라앉고 내 발목은 닳아 갔다
---「우리의 오해는 영원히」중에서

나와 너라고 하자, 우리라는 죽은 단위는 버리고
깨진 사탕 파편으로 이를 닦자, 썩은 이로 좀 더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자, 질문해 보자
왜 먼 훗날만을 생각하며 가까이에 두려고 하는지?

중요한 것은 방아쇠를 누가 당기느냐가 아니라
방아쇠는 당겨지게 되어 있다는 거야

썩은 과일을 만져 보자, 그 감각은
과거의 것? 현재의 것?

확실한 건 오직 외운 것들
살생부에 적힌 것
나와 너, 나와 너, 나, 너, 나, 너, 나너나너나너나너

---「앙팡 테리블」중에서

출판사 리뷰

“당신에겐 사랑이 불가능해서 나는 꿀 수 있는 꿈들만을 꾸고
잠들 수 없는 밤이 계속돼서 나는 사랑하는 척을 했다”

끈덕진 사랑을 표현하는 부드러운 언어
“우리”를 구원하는 오래도록 집요한 상상


201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안지은 시인의 첫 시집 『앙팡 테리블』이 걷는사람 시인선 83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지옥에는 다 자란 내가 있다고 믿으며 매일을 버텼다”(신춘문예 당선소감)라던 시인은 “두 손을 모으고 천사의 마음으로 다 괜찮다고 말(「안전제일」)”할 수 있는 성숙함을 갖춘 채로 돌아왔다. 무서운 아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인 “앙팡 테리블”답게 뛰어난 감각을 선보이는 신예 안지은이 벼려낸 54편의 시가 『앙팡 테리블』이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시인은 사랑이 할퀴고 간 통증의 잔흔을 안지은만의 탄성 있는 언어로 형상화한다. 시인이 그려낸 시세계에서 사랑은 비단 아름답기만 한 물성이 아니다. 사랑이 휩쓸고 간 자리엔 고통과 흉터라는 잔재가 남으며, 이 과정에서 인물들은 온전한 “우리”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하듯이 “나”와 “너”로 분리되어 끝내 “제자리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렌트」)라는 이름을 가로막는 벽 앞에서 주저앉는 대신, 부서지고 허물어진 마음을 끌어안은 채로 다시 사랑에 뛰어들기를 선택한다. 안지은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집요함이 사랑의 의미를 재창조한다.

이 세계에서 화자와 대상은 관계의 균열과 단절을 마주하지만, 부딪치고 깨어지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성장한다. 가령, 인물들은 “시간은 관계를 잘도 훔쳐 가고/어느덧 너는 무럭무럭 자라서 우리가 된다”(「다큐멘터리」)라는 낭만적 사실뿐만 아니라, “대상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마음은 대상이 될 수가 없다”(「Walking in the rain」)라는 서글픈 진실까지도 깨닫는다. 따라서 사랑의 양면을 체감한 연인들은 “진심을 불태워 불행을 만들”(「데자뷔」)기도 하고, “바깥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우리를 얼룩으로 볼까”(「라온빌」) 궁금해하며, “모든 짐작은 소용이 없고” “눈앞이 흐려져도 슬픔은 도리어 선명해”(「비현실」)지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손깍지를 낀 채로/조금씩 멀어지는 것”(「신앙」)이 유달리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나는 벽을 더듬으며 조금씩 걸었다//그게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라 믿었다”(「이 모든 것이 사랑에서 비롯된 미래는 아니길 바랐다」)라는 마음이다.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무언가를 믿는 마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시인은 이미 아는 것 같다. 안지은이 그리는 인물들은 사랑이 내포한 무한함을 믿음으로써 더욱 온전해지며, “너는 생각만으로 나를 나아가게 해”(「제이에게」)라는 속삭임은 그 자체로 진실이 된다.

홍성희 문학평론가는 해설을 통해 “질서를 만드는 공간과 그로부터 배제되는 공간을 모두 알고 있는 자의 위치에서 안지은의 시는 상호 배제적으로 서로를 지탱하는 이 분리된 공간감을 ‘처리’하기 위한 방법을 마음 다해 찾는다.”라고 진단한다. 또한 “안지은의 시는 진심 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삶의 공간은 여전히 구획화되어 있으며, 그 구획이 사람을 특정한 공간감에 강박처럼 결박되게 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 일에 몰두한다.”라는 점을 예리하게 포착하며 시집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

추천사를 쓴 정다연 시인은 안지은이 펼쳐 보이는 “끈덕진 사랑의 장면”의 면면을 살피며 감탄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우박이 비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남는 것은 자세뿐일지라도 기꺼이 정물의 자세를 기르며 한 뼘 나아가는 것. 그 풍경 속에 있노라면 어느덧 깊은 어둠 속에서도 밝은 시야를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자라게 된다.”라고 짚으며 안지은의 첫 시집에 찬사를 보낸다. 이 시집을 펼친다면, “조금 더 잘 실패하기 위해서”(「신앙」) 기꺼이 달려드는 눈부신 마음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말

지옥엔 다 자란 내가 있는데
너는 천사의 마음으로 다 괜찮다고 말한다

2023년 2월
안지은

추천평

안지은의 시를 열고 들어간다. 분명히 웅덩이에는 물이 없는데 이상하게 온몸이 젖고, 상상만으로도 비가 내리고, 품은 적 없는 씨앗이 희망처럼 내 뺨을 열고 자라난다. 순식간에 무성한 숲. 숲이 만들어내는 그늘 아래 가만히 눈을 감으면 어디선가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의 눈감음을 사랑한다”(「제이에게」)고. 지금 목이 너무 마른 것은 더 자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뜻하는 말이라고. 그 목소리를 따라가면 안지은은 내게 끈덕진 사랑의 장면을 펼쳐 보인다. 그것은 이를테면 우박이 비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남는 것은 자세뿐일지라도 기꺼이 정물의 자세를 기르며 한 뼘 나아가는 것. 그 풍경 속에 있노라면 어느덧 깊은 어둠 속에서도 밝은 시야를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자라게 된다. “나는 모두를 사랑한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라온빌」)이라는 그녀의 말이 진실로 다가오는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 정다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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