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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가방 손잡이는 웃고 있는 내 입을 닮았죠
선물 생긴 대로 중고나라 뜨개질을 해요 장마 렛츠 깊은잠꽃 꽃무릎 별일 없니? 아마존에 사는 조에라는 원시 부족은 로하는 항상 옳다 그렇게 많은 말들이 필요할까 귓속말은 생각보다 평범해 안녕, 기린 2부 하루를 살고 우리는 광안리에서 죽었다 과일가게 앞 버스정류장 한동안 매일메일 아픈 연애 다시, 겨울밤 광안리·1 광안리·2 키스 얼마예요? 그로부터 일 년 후 세로가 가로에게 샌프란시스코는 지금 몇 시입니까? 매화나무를 감고 기다릴게요 누군가 뒤로 다가와 당신 눈을 가릴 때 떠오를 이야기 3부 씹을 수도 없이 한 번에 꿀꺽, 떨어지는 꿈을 꾸면 문득 한 뼘이 자랐다 살구비누 당신을 보고 오는 길 흑백 무지개 선짓국 판다가 벽을 보고 앉아 있다 CPR 관계없이 삼백 일이 흐르고 밤의 여행자 고백 행남자기 번지는 실금도 포장되나요? 잘 비비는 게 비법이야 바다에게 묻는 날도 있습니다 4부 눈을 감아도 밤이 환했다 집에 없는 시 튜링 테스트 더티 마리아 장벽 고난주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 시방 아프리카 톰슨가젤 혀 짧은 여자 순정 씨 오늘과 동전 국만 있으면 돼 긴 문장을 읽고 나니 아흔 살이 됐어요 엔딩 크레딧 해설 마음이 마음대로 기울어질 때 ―하혁진(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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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과 달리 꼬불꼬불 엉켜 있어요
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괜찮아요 사슬뜨기의 콧수를 세다 보면 다른 생각이 안 나요 비구름 속에 숨은 하늘색 실을 뽑아 네트 가방을 떠요 숭숭 뚫린 구멍들 속으로 팔딱거리는 물고기들을 잡았다가 놓아준다고 상상해요 빠져나가는 물고기 지느러미에 당신의 기억을 달아 놓아요 가방 손잡이는 웃고 있는 내 입을 닮았죠 ---「뜨개질을 해요」중에서 오래 골몰하느라 뒤늦게 나온 별들이 가득하고 잘 가, 인사가 잘 자, 인사로 바뀌는 만큼의 거리를 지나왔어요 이별의 말은 목이 길어요 이제 긴 목을 접고 누운 꿈속이에요 따닥따닥 발굽 소리를 내며 날개 아픈 새를 태우고 하늘을 달릴 거예요 ---「안녕, 기린」중에서 그는 영화를 보다가 소파 밑에서 혼자 잠들었다 갑자기 늙어 버린 얼굴에 오래전 퇴화한 입의 흔적이 옅게 보였다 저녁 바다에 수만 개의 검은 보자기들이 출렁였다 나는 날이 환해질 때까지 보자기 하나하나를 집어서 우리가 가 보기로 한 산책길과 헌책방, 카페와 밥집 들을 덮었다 할 말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꼭 할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루를 살고 우리는 광안리에서 죽었다 ---「광안리·1」중에서 거꾸로 되감기 어때요? 장면이 느리게 바뀌는 건 이제 평화롭다는 얘기예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삼 초 동안 머물다 간 성급한 결말이 싫어요 뜨겁고 치열했던 우리 이야기를 단숨에 그럭저럭하고 미지근한 안심에 맡기지 말아요 겨울 가을 여름 봄 순서로 다시 가 봐요 그로부터 일 년 전 (중략) 그로부터 지금까지 그로부터 나까지 시간과 공간은 한 번에 넘기는 수십 페이지의 책장처럼 ---「그로부터 일 년 후」중에서 진짜 같기도 가짜 같기도 했다 모난 데 없는 너 뚝딱뚝딱 사랑을 짓느라 손에 못 자국이 나기도 했지만 연한 씨앗에서 몽글몽글 거품으로 피는 살구꽃이 더 아려 너는 내 등 뒤에서 자주 눈물을 훔쳤다 옷 솔기에 매달린 실 같은 기억을 자르려 다가서면 손사래 치며 큰 소리로 웃었고 슬픔 많은 네가 주는 사랑이 참말 같기도 거짓말 같기도 해서 나는 오랜 세월 고개를 갸우뚱했다 ---「살구비누」중에서 종이에 그은 검은 줄처럼 슬픔이 선명하다 등 뒤에 그어진 쇠창살들이 울창하다 넌 혼자가 아니야 이 말이 간절해서 모두가 혼자 돌아앉는다 ---「판다가 벽을 보고 앉아 있다」중에서 호주머니를 뒤집으면 에누리 없이 보낸 시간이 수북했다 때 묻은 하루가 은빛으로 잠깐 빛나기도 했지만 구릿빛이 더 많았다 보름달이 창틀에 땡그랑 떨어지면 눈을 감아도 밤이 환했다 호주머니에서 미처 꺼내지 못한 것들이 세탁기 속에서 덜그럭덜그럭 돌아갔다 ---「오늘과 동전」중에서 책 한 권을 아무 데나 펼쳐서 누가 글밥이 많은 쪽을 가졌는지 겨루는 게임을 해요.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수명을 조금씩 뺏기로 해요. 그러다 한 사람의 수명이 다하면 책을 덮고 완독한 책의 명단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요. 만수무강이 축복인가요. 긴 문장을 읽고 나니 아흔 살이 됐어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괄호 안에 들어갈 시간이 아직 무성해요. ---「긴 문장을 읽고 나니 아흔 살이 됐어요」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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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사람 시인선 91
강나무 『긴 문장을 읽고 나니 아흔 살이 됐어요』 출간 “이별의 말은 목이 길어요 이제 긴 목을 접고 누운 꿈속이에요” 메아리치는 다정한 속삭임의 물결 서정의 가장 큰 함정, 사랑에게로 달려드는 시(詩)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2020년 ‘김유정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강나무 시인의 첫 시집 『긴 문장을 읽고 나니 아흔 살이 됐어요』가 걷는사람 시인선 91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서정의 가장 큰 함정은 사랑”(해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시인 강나무의 온기 어린 시선이 담긴 54편의 시가 한 권의 책으로 묶인 것이다. 새로이 태어난 하나의 세계, 이곳은 서정을 메아리치는 다정한 속삭임의 물결로 가득하다. 강나무 시인이 그려내는 서정의 세계는 가히 아름답다. 가령, 이 세계에는 “나무 이름, 들꽃 이름 같은 건 모릅니다//이런 내가 시를 씁니다”(「생긴 대로」)라고 고백하는 화자가 있다. 이토록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을 간직한 주체는 생애의 감정이 가닿는 가장자리를 보듬는다. 세계의 아름다움을 살피며 끊임없이 골몰하고, 삶을 할퀴어내는 사랑과 비애의 정서를 마침내 서정으로 환원하는 시인의 모습이 “쓸 만한 기억들을 찾느라 오랫동안 머물지도 몰라요”(「중고나라」)라고 이야기하는 화자와 어렴풋이 겹쳐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까. 잔잔하지만 명랑하게, 때로는 용감한 목소리로 부드러운 노래를 이어 가는 시인의 태도는 곡선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시의 메타포와 닮아 있다. 예컨대 “나는 처음과 달리 꼬불꼬불 엉켜 있어요/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괜찮아요”라는 다짐이 “가방 손잡이는 웃고 있는 내 입을 닮았죠”(「뜨개질을 해요」)라는 결말로 이어지는가 하면, “머리는 차갑고 심장은 뜨거워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기린으로부터 포착해낸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생각에 잠긴 사람을 보곤 해요/그들도 아주 긴 목을 가지고 있어요”라는 표현이 “이별의 말은 목이 길어요”(「안녕, 기린」)라는 궤적으로 미끄러지는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물성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곡선의 통로는 삶을 살아내는 이들을 열원하는 마음과 무관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시인 강나무가 그려내는 시 세계 속 주체들은 타자와 감정을 나누는 일에 기꺼이 뛰어든다는 점에서 찬란하다. 슬픔을 느끼는 이의 등을 바라보며 “넌 혼자가 아니야”(「판다가 벽을 보고 앉아 있다」)라고, 또 “네가 보고 싶다”(「샌프란시스코는 지금 몇 시입니까?」)고 가만히 속삭이는가 하면, “한낮의 파편들에 쓸린 상처를 서로 살피는”(「밤의 여행자」) 일에 품을 아끼지 않는다. 상처받을지언정 다시금 사랑으로 달려들고야 마는 아름다운 망각으로 가득한 시편이 모여 “뜨겁고 말랑한”(「선짓국」) 생에 최선을 다하는 모두에게 전하는 눈부신 안부로 귀결된다. 해설을 쓴 하혁진 문학평론가는 오늘날 “서정이 처한 곤경”의 맥락을 포착하는 것을 시작으로 강나무 시인의 작업이 가지는 의의를 예리하게 분석한다. 또한 “강나무의 담백한 언어는 마주한 세계를 자아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욕심이 없어서 투명하”다는 특성을 짚어 나가며 시집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 박지웅 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그림자와 키스와 나쁜 꿈과 그리움 들은 부재함으로써 현존하는 ‘우리’인데, 이는 시인 자신이 실체적으로 또 비유적으로 관통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분절된 이름들”이라고 명명한다. 또한, “비장보다는 순정에 가깝”고, “맹세보다는 그리움에” 가까운 강나무 시인의 언어가 “비극적이지 않고 다정하다”는 점에 주목하며 그의 첫 행보에 찬사를 보낸다. 이 책을 펼친다면, “바라는 것 없이 사랑하는”(「매화나무를 감고 기다릴게요」) 우리의 태도가 틀리지 않았음을 속삭이는 서정의 언어에 흠뻑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시인의 말 퇴근길 지하철에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한쪽 어깨를 내어 줬다 곤한 숨소리에 망설이다가 나도 눈을 감았다 시가 그렇다 2023년 가을 강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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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살고 우리는 광안리에서 죽었다”.(「광안리·1」) 우리의 최후를 지나온 시인은 우리 이후의 세계에서 ‘우리’를 다양한 기표와 기의로 전환한다. 그림자과 키스와 나쁜 꿈과 그리움 들은 부재함으로써 현존하는 ‘우리’인데, 이는 시인 자신이 실체적으로 또 비유적으로 관통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분절된 이름들이다. 굵기와 색상과 질감이 다른 뜨개실로 꿈틀거리는 파도를 뜨는 일이나 손에 잡히지 않는 당신이라는 안개를 뜨는 것이 시/삶이어서 시인은 한 구절마다 숨결을 불어넣는다. 한 단 한 단 편직한 내면 풍경은 고스란히 바깥 풍경이 된다. “연둣빛 소란들이 콩콩콩”(「선물」) 뛰어다니는 낮의 실타래와 “수만 개의 검은 보자기들이 출렁”(「광안리·1」)이는 밤의 실타래로 짠 빛과 어둠의 뜨개질로 지은 옷 한 벌이 이 시집이다. 강나무 시인은 시에게 “연한 목덜미”(「아프리카 톰슨가젤」)를 내어 주는데, 비장보다는 순정에 가깝다. 맹세보다는 그리움에 가깝다. 그의 언어는 그리하여 비극적이지 않고 다정하다. “사탕에 혀를 베었다//(……)//피를 쪽쪽 빨았다//아, 달다!”(「아픈 연애」) 이토록 달큰한 피 맛이라니. “사랑해 대신 사탕해”라니. 아카시아잎과 조약돌과 붉은 단내를 찾다가 별까지 길을 잃은 한 영혼이 반갑다. - 박지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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