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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전동균
창비 2019.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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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부
약속이 어긋나도
‘자정의 태양’이라 불리었던
예(禮)
이토록 적막한
누구의 것도 아닌
이것
이 저녁은
정오
허기의 힘으로
벙어리 햇볕들이 지나가고
사랑 혹은 흑암
흰, 흰, 흰
밤마다 먼 곳들이
그러나 괜찮았다

제2부
가을볕
보말죽
독바위
잊으면서 잊혀지면서
거돈사지(居頓寺址)
손님
죄처럼 구원처럼
춘수(春瘦)
원샷으로
아무 데서나 별들이
떨어지는 해가 공중에서 잠시 멈출 때
한옥(韓屋)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불러도

제3부
오대산장
멧돼지는 무엇일까
술을 뿌리다
천둥 속의 눈
살아 있는 것보다 더 곧게
문밖에 빈 그릇을
필터까지 탄
밤의 파수꾼
녹지 않는 얼음
내 대신 울고 웃는
마른 떡

제4부
봄눈
1205호
눈은 없고 눈썹만 까만
눈물을 외롭게
이번엔 뒷문으로
모래내길
내 곁의 먼 곳
부끄럽고 미안하고 황홀해서
변명
검은 빵
물속의 기차
P
당신 노래에 저희 목소리를

해설|최현식
시인의 말

저자 소개 1

1962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소설문학』 신인상 시부문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오래 비어 있는 길』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거룩한 허기』 『우리처럼 낯선』 등이 있다. 백석문학상과 윤동주서시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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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6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132쪽 | 186g | 125*200*8mm
ISBN13
9788936424329

책 속으로

내가 새매라고, 예티라고, 부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저를 무엇이라고 생각할까요
그들의 형제인 나를

왜 내게는
소리 없이 소낙비를 뚫고 가는 날개가 없을까요
어떻게 나는
인간의 육신과 마음을 얻었을까요
구겨진 종이 같은
재를 내뿜는 거울 같은
--- 「약속이 어긋나도」 중에서


내 눈이 보는 게 무엇인지
나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의심하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 나는 만나리라

태양이 돌고 있는 별 같은
은하의 중심, 블랙홀 같은

단 하나의, 수많은 얼굴을
--- 「누구의 것도 아닌」 중에서


저는 키가 작고
불면증이 좀 있고
담배는 하루 반갑
일없이 빈둥대는 것을 좋아합니다
흰 종이 구겨지는 소리와
갑자기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
속에서 펼쳐지는 날개,
어떤 꽃을 피워야 할지 망설이는
나뭇가지의 떨림을 보는 것도 좋아하지요
(…)
그래서 밥을 먹을 때마다
하늘을 볼 때마다
부끄럽고 미안하고 황홀해서
부서지는 햇빛이나 먼지 속으로 달아나고 싶어요
한낮에도 발가벗고 춤을 추고 싶어요
--- 「부끄럽고 미안하고 황홀해서」 중에서


가을에 피는 벚꽃을 찾겠습니다

정면에 속지 않겠습니다
그 너머를 보겠습니다

날마다 집을 짓는
거미들과 함께

슬픔에 가득 차서 항상 기뻐하며 살겠습니다

초록 앞에서 벌벌벌 떨며
뱀과 모래와 사람은 무엇이 다른지 계속 묻겠습니다

이제 저희는
저희 죄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 「당신 노래에 저희 목소리를」 중에서

출판사 리뷰

“그러나 괜찮았다”
슬픔과 고통뿐인 삶을 보듬는 따뜻한 사랑의 노래


“있음과 없음,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소통과 불화 등 이항대립의 실존적 사건이 뒤죽박죽 얽힌”(최현식, 해설) 이번 시집에는 신성의 세계를 지향하는 종교적 감성이 두드러진 시가 적지 않다. 시인이 가톨릭 신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집이 오로지 종교적 죄의식이라든가 영적 각성에 침잠해 있는 것은 아니다. 정작 시인의 눈길이 가닿는 곳은 종교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지금-여기’의 현실, 어둑하고 신비한 삶의 안쪽이다. 시인은 현실에 대한 비극적 인식 속에서 삶과 인간 존재의 궁극적 의미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묻는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슬픔과 고통뿐인 삶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사람으로 와 기쁘다고”(「떨어지는 해가 공중에서 잠시 멈출 때」).

시인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 했다. “곁에 있어도 안 보이는 것들”(「잊으면서 잊혀지면서」),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존재들의 그림자를 늘 깊이 응시하면서, 불화의 세계를 함께 견디어내며 살아가는 타자의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시인은 시가 “깨진 그릇 같은 존재들”(「1205호」)을 위로하는 기도가 되고 “슬픔을 빛으로/신음을 향기로 내뿜는”(「춘수(春瘦)」) 노래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빛이 없는 찬란”(「‘자정의 태양’이라 불리었던」)을 발견하고자 세상을 “더 멀리, 더 깊이”(「물속의 기차」) 바라보는 시인의 선한 눈길이 더없이 애틋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추천평

“아프니까 내가 남 같다”라는 구절에서 쿵 그랬다. 아프니까 내가 남 같지가 않더라, 하는 게 늘상 내 입말이었으니까. “나는 내 손님이었구나”라는 구절에서 또 쿵 그랬다. 나는 내 주인이구나, 하는 게 일상 내 태도였으니까. 그게 뭐 별 문장이라고 그리 유난스러운 쿵쿵거림이냐 하면 무심한데 세심하게 굴러떨어져 나를 다치게 하지는 않았으나 일순 나를 멈춰 세우게는 한 돌의 심장 소리를 들어버려서라는 말은 할 수 있으리라. 이 들림의 열림, 그 사이를 들락거리는 바람의 있고 없음, 빨랫줄에 널려 말라가는 젖은 빨래의 무거움과 가벼움, 덕분에 나는 옷걸이에 걸린 옷가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앉았어도 또 하나의 나를 만난 듯한 안도를 언도받기도 했지. “오늘 하루도 다 갔네, 뭘 했는지 몰라”…… 그러게, 그렇지. 이생이라는 게 사는 내내 갔는데 모르겠는 그것이지. 지나온 것만은 분명함을 알겠다 싶은 그것이지. 그러하니 시인은 제 안에서 저의 바깥으로 자주 걸어나올 수밖에 없던 게 아닐까. 그래도 괜찮았다,가 아니라 “그러나 괜찮았다”라는 말. 왜 좋지. 글쎄 왜 좋을까 하면 ‘그러나’의 돌려세움, ‘그러나’의 전반과 반전이 가져다주는 몸 비틂의 힘, ‘그러나’의 그러나저러나 결국엔 우리 모두 지나가고 지나갈 사람이라는 사실이 주는 절망의 희망. 내가 바닥이다 싶었는데 그 바닥에 박힌 돌 같은 시를 만났으니 요리 엉기고 조리 엉켰거늘 더불어 이 부러움을 어쩔까, “허리띠는 또 한칸 줄어드는데”라니! -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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