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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슬픈 순환
봄날 소금쟁이 염소의 힘 전어 짱뚱어 1 송홧가루 회화나무 떨어진 동백꽃 혈육 황룡강 미루나무 숨구멍 식분증 국도의 거울 짱뚱어 2 메타세쿼이아 2부 진달래는 메가폰이다 무등산 삵 나무 물고기 밤 기차 말 되새 떼 5월의 딱따구리 진달래는 메가폰이다 평사리, 거기 꼬리조팝나무 벚꽃 대지 3부 생명을 틔우는 마술 덧니 연리근 관계 마술 고인돌 산돼지 세숫대야論 나는 도대체 몇 번째 나인가 물소리 파도 참새 떼 혈압기 먹이사슬 착시 아무래도 눈이 올 것 같아 4부 최후처럼 주저앉고 최초처럼 일어서는 쓸쓸한 무대 단식 해가 질 때 뜨는 해 사랑 불회사 장승 노점상 사내 빨간 고무장갑 보성 가는 길 혼잣말 거리 말집 사라지지 않는 방울뱀 발문 옹이와 뿔 -김형중(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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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넘자
봄밭에서 라면발 같은 아지랑이 어질어질하다 무덤 속에서 허리 지지고 누워 있던 사람 하나 한숨 잘 잤다며 벌떡 일어나 살아 돌아올 것 같다 ---「봄날」중에서 바람에 떠밀려 산에 오른다 산길엔 집 몇 채, 설핏 돌아서는 모서리에 복사꽃 환하다 도장 박듯 동그랗게 둘러선 꽃들은 봄이면 무슨 서약을 지키려는 것인지 둥근 무덤 하나 밭 가운데 끌어안고 있다 에헤라, 거기쯤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도 다시 나올 수 없는 곳 그 곁에서 할머니가 둥근 무씨를 던진다 세상의 모든 것은 둥글어지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아닐 건데 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각이 죽어 둥근 숨 쉬고 있다 복사꽃잎 몇 낱 챙겨 든 할머니의 둥근 손이 다 안다는 듯이 무씨 속에 잠든 숨소리 가만히 끌어당겨 흙 속에 내려놓는다 ---「평사리, 거기」중에서 세숫대야를 보면 징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수를 하고 비누 거품으로 가득 찬 물을 버리면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투로 그려진 세선의 물결무늬 물속의 네 육신이 흔들리고 어푸어푸 물먹은 네 육신이 흔들리다 멈추어 섰을 때 지나온 내 꿈보따리를 뒤적이다 보면 나 또한 너처럼 사무친다 우리 모두는 울고 싶은 거다 혹은 말하고 싶은 거다 우리가 가는 여행에 대해 아무도 증거하지 않았지만 대개는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 눈시울 적시며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거다 징, 하고 울린 적 없지만 너처럼 속으로 감춘 말줄임표가 한없이 가슴속에 그려져 있는 거다 ---「세숫대야論」중에서 토끼는 업이 있는 동물이다 업을 풀기 위해 자신이 벌렁벌렁 내뱉은 똥을 제 입으로 다시 먹는다 이 슬픈 순환이 토끼의 업이다 토끼의 반복되는 삶 속에는 과거를 되돌려서 잘못된 자신의 기억을 재편집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이걸 식분증食糞症이라 하는데 누군가 이 순환을 막으면 토끼는 영양실조로 죽어 버린다 평생 가까이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적이기도 친구이기도 한 사람들아 그대들은 그대들이 싼 똥을 내가 다시 먹자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눈을 감은 채 우리가 살아온 세상을 함께 핥자고 하면 아, 그 무궁無窮의 똥 덩어리 안에 나와 그대들이 있다면 오늘도 나는 내가 싼 똥을 다시 또 먹을 준비를 하고 있다 ---「식분증」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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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나는 시를 믿는다. 시는 나를 망가지지 않게 지켜주었다. 낡은 안경처럼 오래되었으나 그것으로 오롯이 내가 가야 할 앞길을 놓지 않았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경계에서,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날이 오면 좋겠다. 2020년 9월 김호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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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등 돌리지 않는 시. “슬프고도 거룩한 걸음걸이”를 한 시. 세상에 무릎을 대고, 시인은 “생의 전투”를 치른다. 삶은 사라지는 과정이고, “불안투성이”이며, 슬픔은 “세상의 것”이다. 그리하여 김호균의 시집을 읽는 우리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요동치는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그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세상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으며, “온통 멍 빛”인 세상에 발을 내디뎌 “단단한 것들”을 뚫고 나아간다. 절망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자못 감동적이며 진정성이 깃들어 있어 울림이 크다. 시집을 읽는 내내 화두를 쥔 수도승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한 사내가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물음에 골몰하여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 물음이 우리를 가만히 끌어당겨 “눈부신 이 세상”으로 안내할 것이 틀림없다. - 최지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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