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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단행본 도마뱀을 시작하며 / 편집부
종말이 오기 전에 폴짝! / 박은정 새 / 이병률 경력 탕진잼 / 조수진 흥청망청 살아도 우린 행복할 거야 / 한경록 짜다고 철든 건 아니다 / 김봉현 경계면 / 이소연 우리가 있었다는 사실 / 오경은 탕진잼 / 백영옥 좋아서 하는 거 / 김준성 노 스트레스, 장미의 기분 / 장은주 탕진잼의 육하원칙 / 김마스타 다운 라이프 / 백민석 슬기로운 ‘덕후 생활’은 가능할 것인가? / 백남주 만년의 문자 / 이유진 동해 / 이현호 불안을 잘게 찧자, 달콤한 나의 탕진잼 / 김나리 세계를 다시 만들기에 충분히 좋은 재료니? / 김재훈 지뢰찾기 덕분에 무탈하게 / 이소영 백 살이 되면 / 황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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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먹은 대로 흥청망청 퇴직금을 쓰는 동안, 가슴속 응어리가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이것은 그저 돈을 흥청망청 쓰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 응당 받아야 할 보상을 받지 못해 울증과 광기의 조증으로 헤매던 날들이 지나고, 이제 나는 누구보다 귀한 사람이라는 생각.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야말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서 나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인생에서 아주 가끔, 이렇게 탕진 인간으로 살아봐도 좋지 않겠는가.
--- p.20, 박은정, 「종말이 오기 전에 폴짝!」 중에서 보통 호감이 가는 사람에게 궁금한 게 많아진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 반대다. 궁금한 점이 점차 많아지는 그 사람을 알아가게 되면서 그 사람에게 마음이 가게 되는 거다. 내가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지고 나를 알아가게 되면 나 자신에게 마음이 간다. 우리는 마음이 가는 누군가의 상태를 자꾸 살피게 되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하면 그이를 진정 행복하게 할까 고민한다. 같은 논리다. 나를 자꾸 살피고 사랑하게 되면 어떡하면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 p.30, 조수진, 「경력 탕진잼」 중에서 짜다고 철든 게 아니듯 쓴다고 철없는 건 아니다. 모든 절약이 존중받아야 하듯 모든 소비를 보는 관점도 존중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다시 탕진잼의 사전적 정의로 돌아가 본다. ‘낭비’라는 두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보통 ‘꼭 필요한 것’ 외의 물건을 샀을 때 그걸 낭비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걸까. 어쩌면 이건 그냥 우리가 어릴 때 배워서 외워놓은 소비 엄숙주의가 아닐까. --- p.58, 김봉현, 「짜다고 철든 건 아니다」 중에서 모르는 사람의 과거를 상상하며 현재의 내 시간을 기꺼이 탕진할 때, 나는 어쩐지 다른 인간이 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나 역시 누군가의 시간을 비집고 들어가 상상력을 작동시키고 그의 일상을 변화시키겠지. 그렇게 우린 완벽한 타인이자 다정한 친구이며, 그때 우린 서로에게 무결한 ‘이미지’로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 p.71, 오경은, 「우리가 있었다는 사실」 중에서 날 계속 사랑하는 줄 알았던 사람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날이 있다. 문득 전화를 걸면, 여보세요, 되돌아오는 목소리로 단박에 알 수 있다. 나는 이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구나. 그러면 나는, 아 조금 이따가 다시 걸게, 혹은 잘못 걸었어 미안, 하고 황급히 통화를 마친다. 사람이 아니라 세계로부터 거절당하는 기분이 들어 자꾸만 고꾸라질 때, 응급 처방으로 서둘러 돈을 쓰고 나면 놀라운 속도로 기분이 많이 회복되어 있는 걸 느낀다. 그 회복의 가능성을 아는 나는 주기적으로 별 생각도 없었던 것들을 충동적으로 구매한다. 충동구매는 실은 본능적인 구매 활동이다. 적극적인 방식의 회복 활동이다. --- p.134-135, 김나리, 「불안을 잘게 찧자, 달콤한 나의 탕진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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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에서 진담까지, 침묵에서 수다까지
때로는 절박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삶을 따듯하게 끌어안는 노래, 우리를 사유하게 하는 이야기 ‘문예단행본 도마뱀’ 시리즈의 첫 책인 『흥청망청 살아도 우린 행복할 거야』가 출간되었다. 이번 책의 주제는 ‘탕진잼’이다. 주지하다시피 ‘탕진잼(蕩盡+재미)’은 자신의 경제적 한도 내에서 마음껏 낭비하며 느끼는 즐거움을 뜻하는 신조어다. 요 몇 년 새 새로운 소비 트렌드로 자리 잡은 탕진잼은 저성장 시대 젊은 층의 불안감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책은 각계각층 문화예술인 19명이 탕진잼에 대해 쓴 에세이를 담고 있다. 필자의 삶이 있는 그대로 묻어나는 솔직담백한 글부터 마치 엽편소설을 읽는 듯한 픽션에세이까지 내용도 형식도 다채롭다. 더불어 이병률, 이소연, 이현호, 황인찬 시인의 시와 장은주 사진작가의 작품을 수록했다. 각자의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문화예술인 19명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나볼 수 있다. 박은정 시인, 조수진 기자, 백영옥 소설가, 백남주 큐레이터, 이유진 편집자, 김나리 작가, 이소영 작가는 탕진잼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짚는다.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삶,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삶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펑크록밴드 크라잉넛의 베이시스트 한경록, 뮤지션 김마스타는 삶의 활력소로서 탕진잼을 얘기하며, 그에 얽힌 일화를 유쾌하게 풀어낸다. 김봉현 음악평론가는 탕진잼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인문학적인 눈으로 살펴본다. 오경은 시인, 장은주 사진작가는 불안을 탕진한 끝에 마주친 아름다움을 감각적인 문체로 그린다. 김준성 편집장, 백민석 소설가, 김재훈 시인은 각자 독특한 상상력으로 마치 엽편소설 같은 글을 선보인다. ‘문예단행본 도마뱀’ 시리즈는 여러 문화예술인의 다채로운 목소리를 한데 묶으려는 기획이다. 매 계절 흥미진진한 주제를 선정하고, 그에 걸맞은 참신한 필자들을 모아 단행본을 발간한다. 언뜻 잡지처럼 보일 수 있으나 잡지는 아니다. 단행본이 아니면서 단행본이고, 시리즈 아닌 시리즈다. 말장난이 아니라 정말 ‘문예단행본 도마뱀’은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이 되려는 시도다. 조화로운 불협화음, 불협화음의 조화를 꿈꾼다. 주제는 책마다 다르지만, ‘문예단행본 도마뱀’은 주제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따로 또 같이, 때로 겹치고 때로 어긋나는 말들의 어울림 그 자체가 목적이다. 오롯이 빛나는 개성들이 어우러져 만드는 하모니. 일 년에 네 번 새롭게 찾아오는 오케스트라의 공연이랄까. ‘문예단행본 도마뱀’의 에세이는 어떠한 형식적 제약에 얽매임 없이 필자들이 자유롭게 쓴 것이다. 주제는 있지만, 주제가 갖는 응집력은 강하지 않다. 회의를 하자고 만나서는 제 말만 실컷 하고 가는 자리랄까. 그 웅성거림 속에서 누군가는 무겁게 입을 떼고, 누군가는 가벼운 수다를 이어간다. 농담과 진담이 뒤엉킨다. 아무렴 어떤가. ‘문예단행본 도마뱀’은 그렇게 쓰이고, 또 그렇게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책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 책장을 넘기다가 눈길이 닿는 문장에서 시작하는 책 읽기. 반가운 이름을 발견하면 거기서부터 출발해도 좋다. 삶을 따듯하게 끌어안는 노래, 우리를 사유하게 하는 이야기 들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책을 덮으면 또 다른 노래와 이야기를 실은 목소리들이 어느새 곁에 와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