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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허기 충전 격자의 창틀 아래서 깎인 것에 대하여 점박이꽃 개의 표정 자운영 꽃밭 딱따구리 소리는 날 멈춰 세우고 물의 설법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추석날 아침 빗방울에 대하여 덜어 낸다는 말 2부 물들고 터지고 빛나는 소매치기 만년필 적멸을 위하여 못,에 대하여 우루무치의 낙타 예감 시간 도둑 왕의 말씀 네 채의 집 말라 가는 벤자민 화분 곁에서 나무들의 묵시록 벚이라고 하고 벗이라고도 하는 사월의 혼례 3부 투명한 심장들이 안쓰러워 꽃 피는 소리 물방울 속으로 시 나와 고양이와 소녀 이야기 느티나무 화초장 어떤 산수화 이슬 빠지는 발톱의 말 저 꿀벌의 생 살쾡이와 다람쥐 외로운 개화 우연이라는 말 거미집 4부 내 몸에도 흐르는 살별들 오늘 내게 제일 힘든 일은 우화등선 수박 거룩한 허기 물벽 거미 숲의 제왕 정낭 개구리한테 불알 물린 이야기 경계 메추라기 팔공산 사내 이야기 단풍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르겠다 해설 공감 왕국의 대령숙수 ―이숭원(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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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째 성업 중인,
그 묘한 허기가 떠오를 때마다 가는 밥집이 내 일터 가까운 곳에 있다 ‘허기 충전’이란 상호를 내건 저 카운터의 흰머리 사낸 알고 있다는 걸까 한 끼의 식사 같은 거로는 원기가 충전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 충전된 허기가 더 검게 빛난다는 걸 밤새 달빛이 어루만지다 간 알 같은 부화를 기다리는 둥근 지붕의 저 식당에는 아닌 게 아니라 펄럭이던 검정 비닐에 구멍 뚫어 마늘을 심던 벌건 얼굴들의 담배 연기와 인근 공사장 인부들 발꼬랑내 나는 군화와 막걸릴 마시다 시비가 붙어 막 씩씩거리는 짧은 머리의 롱 패딩들 허기의 사촌쯤인 불만과 불만의 양아들뻘인 분노와 상처들이 연탄난로 위 주전자가 흘린 물방울처럼 따그르르, 츠잇츠잇 굴러다닌다 삶에 대한 계획 같은 건 아예 없는, 성실한 것이 아름답다고만 믿지 않는 눈빛의, 부시지 않은 빛 두르고 있는, 음지식물 같은 저들은 먹을수록 충전되는 단단한 허기 맷집처럼 키우러 집요하게 소슬한 저녁들을 찾아오는 게 틀림없다 --- 「허기 충전」 ――――――――――――――――――― 두어 달 전 명절 끝날 산책길 인적 뜸한 고향 신작로를 지나다 들었네 점잖지 못하게 왜 그랬어? 오빠란 놈이 동생을 그렇게 하면 어째? 아침 공기 잔잔히 물들이는 어떤 중년의 음성 그 오빤 보이지 않고 하, 누렁이 한 마리가 고갤 숙여 그 말 고분고분 듣고 있는 곁엔 누운 암탉 한 마리 (아마 옛 버릇을 참지 못하고 유순하던 개가 닭을 물었던 모양) 머릿수건을 쓴 그의 아내인 듯한 환한 여인은 또 왜 암말도 안 하고 아궁이에 장작불만 지피고 있었는지 몰라 가축 두어 마리, 가금 대여섯 키 낮은 채송화 분꽃, 해바라기와 사는 필부인 그 사내 부부의 울타리 너머 꿈결같이 들은 그날의 음성과 실수 때문에 가책받은 얼굴로 고갤 숙이던 그 착한 개의 표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가 다 죄인인 듯 마음이 저려 온다네 알아듣기나 했으려나 그 말? 메아리 소리 곱게 울리던 그날 아침 아 참, 내가 진정 못 본 건 또 무얼까? --- 「개의 표정」 ――――――――――――――――――― 일기예보가 어긋났나, 피서 온 가족은 숫제 물의 지배 아래 들었다 폭풍우의 멱살잡이에 제 성질 못 이긴 창이 덜컹거린다 쿵쿵 우둥퉁 쳐들어오는 물기둥은 햇살에 수런대는 나뭇잎의 기척이며 지저귀는 새소릴 작살내고 배음으로 흐르는 시냇물의 아예 감옥으로 처넣는다 손을 넣어 만질 수도 벌컥 삼킬 수도 없는 저 돌멩이가 다 된 물은 무엇 때문에 혁명처럼, 쿠데타처럼 깡패처럼 세상을 온통 찢을 듯한 훈계로 도회의 더위와 피로 피해 찾아든 식솔들에게 막무가내 가르치려 드는가?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오도도 떠는 몰골로 들으라고만 하는가?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습한 이불 끌어 덮어도 꿈속 몸을 불리는 불길한 새끼 원숭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밤 딱딱한 공기를 더 딱딱하게 음울한 것을 더 음울하게 우리 간까지 슬슬 보는 손아귀에 가슴을 잡힌 세찬 급류의 며칠 돌로 핀 험상궂은 물의 말씀, 그와 맞닥뜨리기 전엔 생이 그리 놀라운 것도 두려운 것도 알지 못했다 --- 「물의 설법」 ――――――――――――――――――― 저이만큼 흰 종이가 숨긴 저잣거리를, 가파른 계곡을 잘 파헤치는 이는 드물리 고요와 소음을 가로질러 가는 저이의 발자국이 발자국의 열정이 미소 짓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표정보다 광산이 거느린 분화구보다 더 뜨거우리 백지의 첩첩계곡 들어가 답답한 것들을 부둥켜안고, 오오래 심해에 갈앉은 겹겹으로 둘러싸인 숨결에 주파수를 맞추는 저 입술이 지나간 백지엔 더 이상 낱장의 평면은 없으리 도약을 위해 고개를 박은 말꽃이 컹컹, 혹은 화들짝 피어날 때까지 저 곡괭이는 죽음마저 따뜻한 체온, 사랑을 캐내곤 했으니 어느새 시큼해진 발자국 뒤꿈치에선 마악, 몇 마리 나비 팔랑체로 넘실거리는 글줄을 피워 올리리니 저이는 가파른 거죽을 갈아엎으면서도 히힝, 눈물이 고인 푸른 힘줄의 울음을 운다 --- 「만년필」 ――――――――――――――――――― 초여름 하오 산책길 오늘 내게 놀라운 사태事態는 연 이파리 위 소리 물고 파닥이는 물방울을 보는 일 제 몸에 똬릴 트는 하늘도 해도 털어 내며 굴러 내리는 맨얼굴의 말 알아듣는 일 (……) 머물던 세상, 손 탈탈 털고 한 방울 바다의 중심으로 뛰어드는 일 밀어라 밀어라 바람아 전율하는 이 가슴을 수평선을 기울였다 펴는 세상 가장 아찔한 상쾌 속으로! --- 「물방울 속으로」 중에서 ――――――――――――――――――― 그때 예기치 않은 한 손님이 찾아왔다 내가 쓴 문장 속 식구들이 서로의 목소릴 내며 문 닫고 등 기대어 돌아앉아 있을 때 그는 외계에서 온 것도 문을 따고 들어온 도둑도 아니었는데도 식구들은 몰랐다 공기인 듯 물줄기인 듯 식구들 틈으로 스며들어 모를 소리를 풀어내고 뚫어내고 녹여내는 그의 발걸음을 그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은 더더욱 거짓말같이 한방 가득 맑은 기운이 퍼졌다 --- 「시」 중에서 ――――――――――――――――――― 자정이 넘은 설산의 휴양림 깊은 골 따라 랜턴을 비추다 씨앗처럼 심긴 눈동잘 기어이 캐내고야 만다 신음처럼 켜져 무겁게 숨소리마저 보내는 내 몸에도 흐르는 저 살별들을 나는 밤의 창이라 부르고 싶었다 (……) 날갯죽지나 뱃가죽 아래 두근거리는 여린 뼈와 가슴이 내는 저 흐르는 빛의 발광發光은 소심하거나 격렬한 영혼에 더 가깝다 어둠의 옆구리에 손 질러 볼 필요도 없이 못 보던 빛줄기가 그 영혼을 간섭할 때 머루알처럼 또렷이 켜지는 구멍은 때론 표정 감추기 위해 초조를 절반쯤 깨물고 웅크린 창窓이다가도 피로가 더해지면 찌를 태세로 불붙는 창槍! ---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르겠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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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볼 일 없는 일상을 놀랍고도 극적인 징후로 읽어 내는 시선
―인간, 자연, 사물의 관계를 잇는 현대의 신화적 세계 손진은 시인의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가 걷는사람 시인선의 44번째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199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손진은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이며 지난 『고요 이야기』(문학의전당, 2011) 이후 십 년 만에 선보이는 새로운 시집이다. 손진은 시인은 그간 축어적 표현으로 사물 혹은 시인의 본질을 열어 놓는 존재론적 세계를 거쳐, 자연의 약동하는 생명력에 집중하고 깊은 사유와 특유의 상상력으로 시세계를 구축해 왔다. 이번 시집은 그러한 시인의 세계를 더욱 확장시켜 인간, 자연, 사물을 하나로 연결하여 이룬 하나의 신화적 세계다. “그의 시선이 닿으면 보잘것없는 것들은 극적인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으로 무장한다. 그의 상상력은 별 볼 일 없는 사물이나 흔해 빠진 장면을 마법적으로 변화시키면서 놀라운 광경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김기택 시인) 수년째 성업 중인 식당에서 “마늘을 심던 벌건 얼굴들의 담배 연기”와 “인근 공사장 인부들 발꼬랑내 나는 군화”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매일같이 삶의 비참을 견뎌 내며 “허기를 충전”(「허기 충전」)하는 기층민의 비애를 노래하고, 추석날 아침 신나게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를 타는 소년이 한순간 트럭에 치이는 불행에 직면하여서는 “옥색의 공기”들이 “가슴에서 둥근 손”을 꺼내어 “어린 영혼”을 받는다고 표현하며 찰나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한다. 이런 삶의 비극적인 단면을 보여 줌으로써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현실 삶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폭풍우의 멱살잡이”에 쩔쩔 매는 인간(「물의 설법」)을 다룰 때나 “몸의 왕국 점령하고” 쇠락해 간 병(「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을 다룰 때도 인간과 자연, 사물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고향 신작로에서 닭을 물어 죽인 누렁이에게 “오빠란 놈이 동생을 그렇게 하면” 어떡하냐고 중년 사내가 핀잔을 주는 상황을 보면서, “가책받은 얼굴로 고개 숙이던 착한 개의 표정” 때문에 자신이 “죄인인 듯 마음”이 저리고, “내가 진정 못 본 건 또 무엇일까?”(「개의 표정」)라고 자문하기에 이른다. 누군가에게는 다소 익살스럽기만 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손진은 시인은 개의 표정에서 원초적 순수함을 읽어 낸다. 그로 인해 냉랭한 현대 사회를 살아온 자신의 시간을 성찰하고 반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상황들이 내부의 맑은 정서로 치환되어 나오는 시적 진술은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시인은 자연과의 교감을 계속 시도한다. 흔한 풍경에 새로운 의미를 절묘하게 겹쳐 놓는 능청스러움으로 한순간 독자의 마음을 훔쳐 버리는(「소매치기」) 그의 시작은 “공기인 듯/물줄기인 듯”(「시」) 자연스럽다. 연 이파리 위에서 “소리 물고 파닥이는 물방울”을 응시하면서 “바다의 중심으로 뛰어”(「물방울 속으로」)들어 순환하는 자연의 생명력을 포착하는가 하면, 「저 꿀벌의 생」이라는 작품에서는 시골 우체부의 삶을 꿀벌의 생애에 비유(“빨간 모자 눌러쓴 저 꿀벌이 이쁜 눈매를 꽁지에다 매달고/골목으로 날아간다”)하며 동화적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시인의 이런 태도는 “백지의 첩첩계곡” 속에서도 “팔랑체로 넘실거리는 글줄”(「만년필」)을 피워 올려 사물의 본질을 견지하는 것이 시인의 업(業)이라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이처럼 그만의 깊은 사유와 특유의 상상력으로 발견한 모든 사소한 순간들이 의미를 가지고 광채를 발휘한다. 이런 시인의 신화적 사고는 해설을 쓴 이숭원 평론가가 언급하는 것처럼 “외부의 사물은 인간과 무정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언하며 결국 그것이 “인간인 나와 관계를 맺는 유정한 존재가 되어 내 생활 영역에 들어와서 나와 대화를 나누고 내 의식에 의미 있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이 그려 낸 인간 삶의 비극적인 단면, 자연의 이치와 아름다움, 사물의 본질 등은 결국 하나의 메시지로 귀결된다. 무참한 현실 세계 속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구원하는 것은 과학적 세계관이나 거대 담론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경외(敬畏)와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근신(謹愼)의 마음이라는 것. 시집을 펼친 독자들은 시인이 직조해 낸 다채로운 신화적 세계를 체험함으로써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래 갇혀 있었던 말들을 내보낸다. 이 시들은 과묵했던 문학소년을 길러 낸 고향의 정경과 일상의 자잘한 사건 들을 내 ‘몫’의 말들로 풀어낸 무늬들이다. 터덜거리는 발걸음이 만나는 민들레, 고라니, 주름을 거느린 삶 하나에도 분화구보다도 뜨겁고 죽음마저 따뜻한 체온으로 녹이는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 2021년 여름이 가까운 날에 손진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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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란 놈이 동생을 그렇게 하면 어째”(「개의 표정」). 아이를 꾸중하는 소리가 담장 안에서 들려오기에 슬쩍 들여다보니 쓰러진 닭 옆에 있는 개가 혼나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순간 개는 오빠가 되고 닭은 동생이 되고 꾸짖는 이는 아빠가 되고 채송화, 분꽃, 해바라기는 구경꾼이 되는 유쾌한 일탈이 일어난다. 인간과 동물과 식물이 경계 없이 드나드는 신화적 공간이 바로 이웃에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다.
손진은의 시를 읽으면,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일상이 이토록 풍요롭고 흥미로운 것이었나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그의 시선이 닿으면 보잘것없는 것들은 극적인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으로 무장한다. 별 볼 일 없는 사물이나 흔해 빠진 장면을 놀랍고 신기한 사건으로 만드는 아이의 호기심처럼, 그의 상상력은 지루한 일상을 마법적으로 변화시키면서 놀라운 광경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자전거 타고 가던 소년이 트럭에 받히는 순간의 비극적 사건은 공중에서 큰 원을 그리며 도는 영혼을 받으려고 “옥색의 공기들”이 “가슴에서 둥근 손을 꺼내 드는” 일이 되며(「추석날 아침」), 글 쓰는 일은 “몇 마리 나비/팔랑체로 넘실거리는 글줄”을 피워 올리거나 “눈물이 고인/푸른 힘줄의 울음”을 우는 경험이 된다(「만년필」). 슬픔도 웃음이 되는 해학, 괴로움도 흥이 되는 넉살이 여기에 더해져서 활기 넘치는 삶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일상과 신화가 서로 스며들고 섞이는 시적 상상력은 코앞의 일에 연연하던 답답한 마음이나 고정관념과 습관에 갇혀 있던 생각을 해방시켜 여유와 자유를 회복하게 한다. - 김기택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