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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4제1부 화상머리글인품: 냉철한 사업욕 - 앙브루아즈 볼라르연구와 학습: 수집하는 화상 - 나탕 윌당스탱절대 후원: 대수집가 - 페기 구겐하임선견지명: 인상파의 대부 - 폴 뒤랑뤼엘끈기: 일본 화상의 선구자 - 하세가와 진풍부한 지식: 톱 딜러 - 조셉 듀빈제2부 예술가머리글선도적 창조 - 프란시스코 고야꿈꾸는 이상 - 빈센트 반 고흐셀프 마케팅 천재 - 살바도르 달리사실 묘사 개척 - 카라바조천재적 상상력 - 레오나르도 다 빈치전통 타협 거부 - 에두아르 마네아방가르드 리더십 - 파블로 피카소자기표현 완성 - 렘브란트제3부 문화예술기관머리글복지, 자선, 사회 공헌, 박애 - 필랜스러피미래 지향의 유산 - 스미소니언 연구소결단의 힘 - 루브르 미술관의 설립애호의 힘 - 고궁박물원의 초석제3의 눈 - 보스턴 미술관의 뿌리열정의 결과 - 뉴욕 근대미술관의 탄생혁신적 사고 - 기차역을 뮈제 도르세로 집념의 결과 -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제4부 예술과 앙트러프러너십머리글 대한민국의 문화예술기관문화예술기관과 리더십예술의 리더십예술의 존재리더십 무용론문화예술에서 앙트러프러너십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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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르는 당대에 성공한 화상이 되었다. 폴 세잔의 뒤를 이어 1891년에 타히티로 떠난 고갱Paul Gauguin과의 전면 계약도 그의 작가에 대한 애정과 몰입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난해진 고갱은 볼라르와 계약을 하고 나서 1899년에 부채를 청산하고 자기 집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잊힌 작가 세잔과 타히티로 떠난 고갱에 대해 집념을 불태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모두가 바로 볼라르의 집념과 인품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의 집념은 시장에서 절정에 있던 르누아르까지 붙잡을 수 있었다. 이미 르누아르는 뒤랑뤼엘에 전속되어 있었지만 볼라르와 거래를 했던 것이다. 만년의 르누아르 자택에 자주 출입하고 때론 머무르며 많은 작품들을 입수했고 르누아르 사후 남겨진 700점 중 상당수의 작품들을 그의 자녀들로부터 입수했다.
볼라르는 일면식도 없던 르누아르를 처음 만났을 때 비즈니스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네의 그림 모델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나머지 수소문하다가 르누아르라면 알고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만나러 왔다고 했다. 자신의 인품을 무기로 삼은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의 손을 거친 작가들 이름을 열거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볼라르는 수많은 인상파 화가들과 거래했다. --- p.26~27 인상파라고 후에 불리게 되는 무명 화가들이 제1회 전람회를 파리에서 동료 사진가 나다르Nadar의 스튜디오에서 개최한 것이 1874년이었다. 온갖 악평에도 굴하지 않고 뒤랑뤼엘은 1876년 제2회 전시회를 자신의 화랑에서 개최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실패였다. 어려움은 있었지만 그는 계속 달렸다. 뒤랑뤼엘은 여기에서 심각한 경제적인 위기에 직면했으므로 이를 타개할 방안들을 구상해냈다. 뒤랑뤼엘의 화랑 경영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1) 예술을 지켜야 한다. (2) 화가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진다. (3) 개인전을 개최한다. (4) 국제 네트워크를 갖춘 화랑을 운영해야 한다. (5) 누구나 화랑을 드나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6) 화가의 작품은 반드시 인쇄물로 홍보해야 한다. (7) 금융과 결합해야만 한다. 모든 것이 선견지명이었다. 처음 시도되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 p.54 또한 달리는 그의 그림처럼 독특한 옷차림과 용모 그리고 언변으로 20세기의 가장 특이한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 점과 관련하여 필자는 달리를 위대한 마케팅 전문가라고 평한다. 예술가의 성공 전략이 과연 필요한지 여부는 뒤로 하고 달리 그 자체가 셀프 마케팅 교과서였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공격적인 그만의 홍보 전략을 구사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자서전 전략이다. 달리는 자서전을 통해 그림에서 이해할 수 없는 작업 방식 등을 알렸다. 더욱이 자서전이 더 잘 팔리도록 책 내용을 자위행위, 성 체험, 연상인 유부녀 갈라와의 운명적인 사랑, 그의 독특한 예술관 등 가능한 한 독자의 호기심을 최대한 자극하도록 서술했다. 물론 그는 글도 잘 썼다. 둘째는 그만의 튀는 행동이다. 달리는 1936년 런던의 초현실주의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한 많은 예술가들을 제치고 일약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잠수복과 잠수모자, 납 단추가 달린 장화 차림에, 단검 두 자루를 벨트에 꽂고, 머리에는 벤츠 자동차의 냉각 캡을 쓴 채 하얀색 그레이하운드 두 마리를 끌고 참석했다. 달리는 호텔에 전용 브리핑 룸을 만들고, 기자회견장에는 삶은 가재를 머리에 얹고 나타나기도 했다. --- p.113 마네의 그림은 그가 비록 모네, 르누아르 등과 친하게 지내긴 했어도 보수적인 파리 예술계에 파문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대표적인 파문 대상 그림이 바로 「풀밭 위의 점심」이다. 1863년 파리 화단에서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환한 대낮에 부르주아들이 벌거벗고 매춘부와 함께 노는 그림이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다. 곧이어 충격, 분노, 비난이 쏟아졌다. 이 그림은 낙선작 전시회인 ‘살롱 데 레퓌제Salon des Refuse’에서 전시되었다. ‘살롱 데 레퓌제’는 1863년의 살롱전에서 출품작 5,000여 점 중 3,000여 점이 낙선하는 일이 벌어져 편파적인 기준에 의한 선정이라는 항의가 뒤따르자 나폴레옹 3세Napolen III까지 나서서 낙선 작품들을 별도로 전시할 것을 명령한 데 따라 기획된 전시였다. 낙선작들은 쓰레기라는 주최 측 설명과는 반대로 악평을 받을수록 대중의 인기는 도를 더해갔는데 이 낙선작 전시회에서 모든 이들의 관심은 전람회 정중앙에 걸려 있는 작품에 쏠렸다. --- p.138 스미소니언 연구소라고 하면 누구나 우주개발이나 해양 연구를 떠올린다. 그러나 미국항공우주국NASA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국가사업을 할 뿐이며, 인류의 생활과 밀접한 역사, 고고학, 그리고 환경 문제 등에 막대한 지원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뉴욕, 보스턴, 디트로이트 등 전미 지역은 물론 심지어 파나마에까지 배후 시설인 도서관, 자료 수장고, 연구소 등 다양한 시설을 운영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연구 설비 및 환경이 뛰어나고 연구 기풍이 자유롭기 때문에 이 연구소에는 연구실 제공만 조건으로 내걸어도 정년 후 무급으로 연구를 계속하는 고명한 학자들이 많다. 이처럼 스미소니언 연구소는 다방면에 걸쳐 전문가들을 지원하면서 한편으로는 지식의 보급을 도모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모든 시설을 일반공개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따라서 입장료는 무료이며 연중무휴 개관된다. 동 연구소에 속하는 모든 시설은 보관 창고로서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지식을 체험하는 장소로서 언제나 누구에게나 그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연구소에서는 저명한 학자부터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질의를 해 온 사람에게는 반드시 답신을 보낸다는 기본 방침을 취하고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문점이나 질문에 대한 회신을 받아보는 아이들은 스미소니언 연구소로부터 공식적인 답변을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쁨을 제공한다는 점까지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젊은 세대의 사물에 대한 반응이나 의문이 다음 세대의 예술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을 낳고 성장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 p.180~1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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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선도하는 아방가르드로서 앙트러프러너십“미술사는 미술시장의 역사를 말한다.” 이 한마디는 의미심장하다.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아는가? ‘미술사’란 제목을 단 책을 가장 먼저 쓴 사람이 아트딜러(art dealer) 즉 화상이었음을.”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과 ‘생계’ 사이에 놓인 간극과 모순 때문에 번민하고 실제로 고통당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실이다.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시장에서 팔리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생존과 직결되는 절박한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작품과 시장 사이에 가교 역할을 담당하는 직업군으로 화상이 등장한 것은 어찌 보면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이 책 제1부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미술시장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해온 아트딜러들에게서 어떤 특질을 발견할 수 있을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이를 ‘앙트러프러너십’이란 화두로 풀어나간다. 인품과 집념을 바탕 삼아 대화상으로 성장한 앙브루아즈 볼라르, 연구와 학습으로 탁월한 식견을 갖춘 화상 집안의 선구자 나탕 윌당스탱, 예술가들을 위한 절대적인 후원을 자처하여 거대한 컬렉션을 이룩하고 직접 미술관을 설립한 페기 구겐하임, 선견지명으로 이전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경영 방식을 도입한 인상파의 대부 폴 뒤랑뤼엘, 끈기와 인내로 일본 화상의 선구자가 된 하세가와 진, 풍부한 지식을 겸비한 톱 딜러 조셉 듀빈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독특한 기업가정신으로 예술의 역사와 미술시장에 새 장을 열었다.제2부에서는 프란시스코 고야, 빈센트 반 고흐, 살바도르 달리, 카라바조,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에두아르 마네, 파블로 피카소, 렘브란트가 어떤 앙트러프러너십을 발휘하여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현하고 현실에 대응해갔는지를 살핀다. 이들 모두의 앙트러프러너십을 포괄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창작을 하는 화가는 어느새 철학자가 된 자신을 보게 된다. 생시몽(Saint-Simon)은 그래서 예술가를 ‘아방가르드’라고 불렀던 것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행동을 가지고 세상의 구원자가 되는 것이다. (…) 예술가는 모든 권력을 거부하는 존재로서 이러한 화가의 창의성에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반드시 수반된다. ‘전문성’과 ‘애착’이 그것이다. 확실히 재능이 예술가의 본질을 결정한다. 하지만 꾸준한 작업이 따라야 한다. 예술적 소양과 꾸준한 작업에 따른 조화를 바로 예술적 영감이라고 할 수 있다.”제3부에서는 필랜스러피, 스미소니언 연구소, 루브르 미술관, 고궁박물원, 보스턴 미술관, 뉴욕 근대미술관, 뮈제 도르세,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의 설립 동기와 이념을 통해 문화예술기관이 ‘보관하는’ 곳에서 ‘보여주는’ 곳으로 변모해온 과정을 이야기한다. 예컨대 저자는 나라의 역사도 짧고 미술관의 역사도 일천한 미국이 오늘날 미술관 천국이 된 것을 예로 들면서 이를 “대중을 교육하기 위해,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와 국민을 만들기 위해 누구나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문화예술의 장으로서, 또한 민주적인 교육의 장으로서 미술관의 역할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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