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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과학을 넘어서
여성 과학자의 대명사, 마리 퀴리 핵분열을 발견한 유대인 여성, 리제 마이트너 어머니의 뒤를 이어, 이렌 퀴리 옥수수와 교감한 유전학자, 바바라 매클린톡 봄이 침묵하는 까닭은?, 레이첼 카슨 결정학의 어머니, 도로시 호지킨 DNA의 다크 레이디, 로잘린드 프랭클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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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사회 활동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왔다. 하지만 아직 그 수치는 크지 않다. 예를 들어 음악가나 요리사 중에는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많지만 오케스트라 지휘자나 특급 호텔 주방장은 거의 남성이다. 과학자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현실 세계에서 여성 과학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교과서나 대중매체에서 여성 과학자를 접하기는 더욱 어렵다. 2007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연구원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14.9퍼센트로 집계되었다. 과학자 열 명 중 여성 과학자는 한두 명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선진국은 우리나라보다 여성 과학자의 비중이 높지만 전체의 30퍼센트를 넘는 국가는 많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 과학자는 과연 몇 명일까? 대다수 사람들이 떠올리는 여성 과학자는 아마도 마리 퀴리(Marie Curie)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녀는 1903년 노벨 물리학상과 191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위대한 과학자였다. --- pp.3-4
그러나 날이 갈수록 마리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백내장 수술을 네 번이나 받았고 1931년부터는 손가락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백내장은 방사능 병이 생긴 후 나타나는 첫 번째 징조이다. 퀴리 부부가 연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방사능의 위험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피에르는 액체 상태의 라듐이 든 시험관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으며, 마리는 방사능 물질을 두 사람의 침대 머리맡에 두기도 했다. 결국 마리는 1934년 알프스 산맥 밑에 있는 한 요양원에서 죽었다. 사위 졸리오가 마리의 실험 노트를 조사해 보니 엄청난 양의 방사선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결국 마리는 자신의 연구에 대한 순교자였던 셈이다. --- p.27 그러나 기대와 달리 매클린톡은 찬밥 신세였다. 한번은 그녀와 동명이인인 또 다른 매클린톡이라는 젊은 여성이 약혼했다는 기사가 지역 신문에 실렸다. 이를 보고 착각했던 미주리 대학교의 식물학과 주임교수는 매클린톡에게 “당신, 결혼하면 교수 그만둘 각오해!”라고 윽박질렀다. 당시만 해도 여자가 결혼하면 대학교수를 그만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미주리 대학교의 보수적인 분위기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매클린톡은 대학 학장을 찾아가 “저는 이 학교에서 어떤 사람이지요?” 하고 따져 물었다. 학장의 대답은 “당신? 당신은 스태들러 교수만 없으면 당장 쫓겨날 사람이지.”였다. 결국 매클린톡은 종신교수직을 받지 못하고 1940년에 미주리 대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 pp.54-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