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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 박성원
글렌 김유진 잘 가, 언니 조해진 아무도 아닌, 명실 황정은 아무도 거기 없었다 김선재 후 최진영 백일 년 동안 걸어, 나무 임수현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정용준 유리 최 이야기 장강명 추구(芻狗) 조영석 반대편으로 걸어간 사람 강태식 한밤의 산행 김혜진 내 사람이여 조수경 해설_기억에 관한 열세 개의 변주 김형중(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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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서울에 있는 거지? 그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린 왜 고향에서 몇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는 걸까. 어쩌자고. 그건 말이야, 너희가 허약하기 때문이지. 중심에 비해서. J는 언제나 당당하게 말했고 그 당돌함에서 빛이 났다. 좋은 냄새도 나고. 중심이란 말처럼 중심 없는 말은 없을 거야. 그곳이 중심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곳을 중심이라고 말하면 되는 거야. 너흰 그 사실을 알아야 해. (17p)
_박성원,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 중에서 옆자리의 남자는 진에게 음반에 대해 설명했다. 진은 물어본 적이 없었지만, 침묵보다는 나았다. 그것은 짧은 피아노 소곡집이었 다. (…) 첫 번째 연주곡은 피아니스트의 장례식장에서 마지막 순서로 흘러나온 이별의 곡이기도 했다는 남자의 설명이 끝나자, 진은 어렴풋이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진은 이 연주자를 알고 있었다. 그 장례식은 1982년 10월 15일 열렸다. 그가 오랫동안 기억하리라며 책에 밑줄을 그었으나 금세 잊었던 그 남자였다. 평생을 고독하게 살다 홀로 죽었다, 로 마침표가 찍힌 피아니스트였다. 진은 갤러리에 온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57?58p) _김유진, 〈글렌〉 중에서 닮았구나. 우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했죠. 제 얼굴에 당신의 과거가 있다고,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환하게 웃으며. 그리고 당신이 떠난 이후론 슬픔을 억누른 목소리로, 흔적을 찾듯 더듬는 눈길로, 닮았구나, 그들은 같은 말을 다르게 합니다. 다른 어조와 다른 억양으로, 다른 감정을 실어 말합니다. 서른 살 이후로 당신은 더 이상 나이 들지 않고 있으니 서른여덟 살의 저는 이제 당신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되어버린 셈이군요. 그렇다면 당신의 사라진 미래는 저 차창 안에 있는 건가요. 저토록 좁고 어둡고 고독한 곳이 당신이 있는 곳인가요. 말해주세요. 그곳에선 바람도 불지 않고 비도 내리지 않는다고, 그래서 비에 젖어 추워할 일도 없으며 발이 시리지도 않다고, 그런 곳이라고……. (74?75p) _조해진, 〈잘 가, 언니〉 중에서 이렇게 앉아서 몇 번의 겨울을 더 맞게 될까. 몇 번의 봄과 몇 번의 여름을. 그녀는 생각했다. 죽은 뒤에도 실리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난처한 상상인가. 얼마나 난처하고 허망한가. 허망하지만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게 필요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것, 저기 그게 있다는 지표 같은 것이.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했다. (109p) _황정은, 〈아무도 아닌, 명실〉 중에서 남자는 사는 것처럼 사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점점 흐려지는 기억을 이따금 서글프게 떠올리며 특별히 기쁘거나 슬프지 않게, 적당히 사는 것이 사는 것일까. 실제로 세상에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수가 선택한 삶이 삶의 옳은 태도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남자는 묻고 싶었다. 그렇게 산다고 냉장고 속에서 죽은 아이가 살아서 냉장고 바깥으로 나올 수 있을까. 새장 밖으로 날아가버린 우리의 작은 새가, 돌아올 수 있을까. (129p) _김선재, 〈아무도 거기 없었다〉 중에서 너무 사랑했다는 말은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다. 너무 가지려고 했다. 독점하려고 했다.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차지하고 구속하는 것 역시 사랑이다. 이것은 사랑이고, 저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얌전한 나도 나고, 되바라진 나도 나인 것처럼. 아름다운 마릴린이 조의 나쁜 점을 끌어냈듯 아름다운 노마는 내 안의 괴물을 끌어냈다. 나도 내가 그런 아이인 줄 몰랐는데, 몰랐을 뿐, 그것 또한 분명 나였다. 조금 과장하자면, 근본에 가까운 나였다. (158p) _최진영, 〈후〉 중에서 나는 여전히 노파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기억 속에서 만난 노파가 알렉산드라, 그 백한 살의 여행자가 맞는지 장담할 수도 없다. 다만 노파의 모습은 내 얼굴과 닮았을 것이다. 우리는 좀 더 나무에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어쩌면 한 계절이 바뀌고, 나를 찾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들은 나를 노파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어떤 말을 건네건 나는 여전히 아무 대꾸도 않겠지만, 그때쯤이면 그들이 내 침묵의 내용이 조금 달라졌다는 걸 눈치챘으면 좋겠다. (196p) _임수현, 〈백일 년 동안 걸어, 나무〉 중에서 소위님.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면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만나고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우리가 겪었던 일들과 시간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어쩌면 나는 그것이 두려워 소위님 곁에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위님도 생각을 하셔야 할 겁니다. 모든 것은 끝나기 마련이니까요. 나는 이 산을 내려가며 천천히 생각해보겠습니다. 이제 홀로 남으시겠군요. 부디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221?222p) _정용준,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중에서 유리는 이방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생각해보았다. ‘칼을 든 강도가 집에 들어와 아내와 누이를 위협해도 가만히 있겠는가?’ 지금 누가 내 아내이고 누이인가?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겠다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살인을 당할지 모르는 사람이 나와 민족의 원수라고 해서 그 살인을 묵인해야 하는가? 유리는 섬뜩한 기분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집 안을 몇 바퀴 돌았다. 신이 그에게 시험을 내려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내 가르침대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느냐? 그 원수가 이토 히로부미라 해도? (239p) _장강명, 〈유리 최 이야기〉 중에서 명화는 나으리라는 말을 좋아했다. 제상의 집을 다녀가는 갖바치나 서라벌 벼슬아치들이 제상더러 이르는 말을 명화는 제상의 이름으로 알아들었다. 나으리가 명화의 나라에서 명화를 겁탈하고 그네의 어미를 죽인 무사와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명화는 알지 못했다. 나으리라고 부르면 제상이 돌아다보았고, 명화는 제상의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260p) _조영석, 〈추구(芻狗)〉 중에서 제군들, 역사란 누군가에 의해 기록된 문자의 총체입니다. 즉 역사란 문자요, 그 문자가 이루고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누군가 허위의 사건을 문자로 기록했다고 칩시다. 그럼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역사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화두는 문자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 제군들, 이제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책을 펴십시오. 수업이 끝난 후에는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수업 중에는 책에 적혀 있는 문자를 믿으십시오. 그래야 진도를 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315p) _강태식, 〈반대편으로 걸어간 사람〉 중에서 근데 아저씨, 내일도 올 거예요? 와야지. 별 수 있나. 아저씨, 어디에서 타요? 구로. 오 번이 간신히 말을 뱉는다. 앞은 보이지 않고, 여자의 체중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고, 무릎이 꺾인다. 눈꺼풀 주변을 뒤덮은 땀 때문에 좁은 산길이 촉촉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푹 꺼진다. 별일 없겠죠? 아, 근데 이러고도 얘 내일 또 나오는 거 아니야? 오 번이 잠깐 멈춰 서서 여자를 추켜 업는다. 사 번이 여자의 몸을 오 번의 등 위로 떠밀어준다. 그럼, 내일은 더 잘해야지. 잘해요? 뭘요? 뭘 잘해요? 뭐든. 잘해야지. (343?344p) _김혜진, 〈한밤의 산행〉 중에서 처음 당신 품에 안겼을 때, 당신 옷에서 섬유 유연제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그 냄새가 좋아 종종 당신 가슴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쉬었다. 당신의 아내가 입고 있는 옷에서도 같은 냄새가 풍길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향기는 악취로 변했다. 그것이 당신의 진짜 삶이었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거짓말 같은 존재는 당신 아내와 당신의 아이가 아닌, 바로 나였다. (367p) _조수경, 〈내 사람이여〉 중에서 ---본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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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이르는 이야기들, 기억을 기다리는 사람들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기억은 대뇌의 특정 부분이 아니라 한 곡의 노래 속에, 노랫말 한 구절, 가락 한 소절 속에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박성원의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는 장발 단속과 무단 구금, 긴급조치 1호와 간첩단 사건으로 얼룩진 1970년대를 기억에서 끄집어내며, 그런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피어났던 ‘나’와 ‘J’, ‘희원’, ‘제임스’, ‘민’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조수경의 〈내 사람이여〉는 김광석의 죽음과 그의 노래를 통해 ‘죽은 연인’에 대한 ‘유경’의 기억과 ‘죽은 남편’에 대한 ‘영주’의 기억을 번갈아 보여주며 한 남자의 죽음을 바라보는 두 개의 기억을 이야기한다. 화재로 아들을 잃고 눈이 먼 아내가 버스 터미널에서 노래 부르는 걸 보며 어릴 적 보았던 ‘눈먼 여가수’의 사진을 기억해내는 ‘나’의 이야기인 〈아무도 거기 없었다〉는 “한 장의 사진 속에도 기억”이 깃든 소설이다. 김유진의 〈글렌〉에서 작중 ‘진’은 죽은 아내의 마지막 전시회가 열리는 갤러리에서 예전에 읽은 글렌 굴드의 자서전을 기억해내고 자신과 아내를 이어주었던 끈의 실마리를 찾는다. 조해진의 〈잘 가, 언니〉에서 ‘정아’는 장거리 버스 안에서 차학경의 《딕테》를 보며 이국 땅에서 살해당한 자신의 ‘언니’를 떠올린다. 그녀는 도착지인 샌프란시스코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언니’에 대한 애도를 끝낸다. 임수현의 〈백일 년 동안 걸어, 나무〉에서 ‘나’는 사진작가가 놓고 간 잡지를 보며 어릴 적 만났던 ‘노파’(알렉산드라 다비드 넬)를 기억해낸다. 최진영의 〈후〉에서 ‘나’는 어릴 적 친구인 ‘노마’가 건넨 마릴린 먼로의 자서전을 읽으며 사랑이라 생각한 것들이 사실은 소유욕이었음을 깨닫고, 이 모든 게 아름다움의 상징이자 자신이 그토록 소유하고자 노력했던 ‘노마’에게서 시작되었음을 받아들인다. 이 작품들은 “책이 가진 잠재력”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한한 대화 가능성’, 즉 기억을 촉발시킨다고 말한다.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 명실〉에서는 치매에 걸린 노인 ‘명실’이 수만 권의 책을 남기고 죽은 친구 ‘실리’의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한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명실’의 글쓰기는 한 줄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실리’가 ‘명실’에게 들려준 ‘마리코’ 이야기처럼 ‘명실’은 사력을 다해 책상에 앉아 있는 행위로 ‘실리’를 기억해내려고 노력한다. 한편, 정용준의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는 필리핀 루방 섬에 스스로를 가둔 채 전쟁이 끝났다는 기억을 망각하려는 두 군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김형중은 “무언가를 기억하는 일에는 그런 위험이 동반된다”고 경고한다. 조영석의 〈추구(芻狗)〉는 왕자를 구하기 위해 왜로 간 박(김)제상의 이야기를 조금 비튼다. 대마 여자 명화와의 사랑 이야기를 집어넣음으로써 충신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박(김)제상을 새롭게 드러낸다. 장강명의 〈유리 최 이야기〉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에 유리 최라는 러시아 신부를 등장시켜 전혀 다른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만든다. 강태식의 〈반대편으로 걸어간 사람〉은 19세기 초 영국 산업혁명 과정에서 등장한 네드 러드의 일기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과 러다이트 운동이 벌어지기까지 재미있는 상상을 벌인다. 김혜진의 〈한밤의 산행〉은 어리숙한 두 철거 용역과 아르바이트 시민운동가의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우리들이 외면하고 기억에서 배제했던 수많은 사건들을 불러온다. 이제는 없는 이야기들, 이제야 말해진 이야기들 열세 개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소설들 《한밤의 산행》은 후대에 주요하게 평가되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이 아닌 소설가 개인이 바라보거나 느낀 열세 개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이야기다. 열세 개의 이야기에 귀 기울임과 동시에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찾아나서는 소설적 탐사에 동참하는 것은 흥미롭다. 소설들이 담고 있는 것은 기쁘거나 즐거운 기억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원치 않는 사이 가혹한 기억 앞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기억 안으로 들어갈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우리의 자율적 선택이지만, 기억에 대한 진심 어린 시선들 앞에서 우리는 읽음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