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젤다와 나 하성란
폴록 강영숙 미인 박정애 첫사랑 조두진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강병융 다옥정 7번지 윤고은 만년필 조영아 소년 7의 고백 안보윤 진짜 거짓말 서진 상자 이영훈 고귀한 혈통 손보미 연애의 실질(?質) 주원규 키스와 바나나 황현진 해설_역사, 진실, 글쓰기 박진(문학평론가) |
Seong-nan Ha,河成蘭
하성란의 다른 상품
강영숙의 다른 상품
박정애의 다른 상품
조두진의 다른 상품
윤고은의 다른 상품
조영아의 다른 상품
안보윤의 다른 상품
서진의 다른 상품
이영훈의 다른 상품
손보미의 다른 상품
주원규의 다른 상품
황현진의 다른 상품
강병융의 다른 상품
|
스콧이 장편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내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 사랑은 기껏 한 달여 이어졌을 뿐이지만 이후로 내 삶은 송두리째 바뀌고 말았다. 그를 잃은 뒤에야 나는 깨달았다. 스콧과 나. 우리는 결혼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를 이용했을 뿐이다. 스콧이 나를 고향에서 데리고 도망쳐준 대가로 나는 그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주었다. 그가 혼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보여주었다. (24p)
_하성란, 〈젤다와 나〉 중에서 한 소년이 있었어요. 소년은 충청남도 서산 출신인데 열다섯 살이었어요. 영등포에 있는 무슨 계공,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거기 취직했는데 겨우 삼 개월을 일하고 수은중독으로 죽어버렸어. (…) 그 애의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빨리 일어나 학교에 가라는 개그 같은 말을 했대요. 겨우 열다섯 살, 지금까지 살았어도 마흔 살 정도밖에 안 된, 그런 어린애가 수은중독에. 사실 수은중독만이 아니었어. 온산병, 이타이이타이병, 그런 거 들어봤어요? 우린 그 애를 보면서 이상적인 공동체 얘기를 했어요. 아무도 아프지 않고 아무도 죽지 않는 공동체. 그런 공동체를 세우는 일. (43p) _강영숙, 〈폴록〉 중에서 “원,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 모양인지. 마마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돌아가신 부원군 대감의 소실이셨으니 대비마마의 서모가 아니시오. 허견, 그 꼴같잖은 얼자가 무슨 권세를 믿고 감히 대비마마의 서모를 때린단 말이오?” 예형과 진웅이 나졸의 말에 반은 수긍하면서도 대꾸를 하지 않는다. ‘꼴같잖은 얼자’가 걸려서다. 자매는, 얼자도 못 되는 얼녀인 것이다. (88p) _박정애, 〈미인〉 중에서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 어쩔 수 없는 이유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고 믿었다.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고 믿었다. (…) 그러나 내가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메하라 게이이치. 그를 버림으로써 나는 사랑을 잃었고,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었다. (123p) _조두진, 〈첫사랑〉 중에서 텔레비전과 신문에서는 매일매일 내 이야기가 나왔다. 난 괜찮았다. 어차피 텔레비전과 신문은 거짓말투성이니까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를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나에게 ‘인간’도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역시 괜찮았다. 어차피 세상엔 인간 같은 인간은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쳤다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남편과 아빠와 자식을 잃고 미치지 않고 사는 것도 이상한 것 아닐까? (153?154p) _강병융,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중에서 그 밤으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더 흘렀고, 내가 이해한 사실은 이렇습니다. 사라진 건 집이나 약국, 골목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라고. 여기 제 살던 시대를 통째 도둑맞은 사내가 있다고. 그렇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누구의 식민지도 아니고 모던 보이도 없는 그런 시대로 떨어져버린 겁니다. 그러고 보니 시대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그저 그 시대로부터 내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게 더 간편한 것도 같군요. 그 시대에서 나만 증발해버리면, 그 시대나 이 시대나 무탈하지 않습니까. (158?159p) _윤고은, 〈다옥정 7번지〉 중에서 윤기의 부고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의 만년필이었다. 재킷 주머니에 늘 단정히 꽂혀 있던 검은색 만년필이 행성처럼 밤새도록 내 주변을 맴돌았다. 종내는 내가 지구이거나 지구본인 듯한 착각이 들었고, 그가 죽은 건지 만년필이 죽은 건지 슬픔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189p) _조영아, 〈만년필〉 중에서 ……모르겠어요. 이젠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제가 그날, 거기 있었던 게 맞나요? 동네 애들이 빠짐없이 모두, 303동 옥상에 모여 있었어요? 제 손이…… 우리 발이 정말로 그렇게 움직였나요, 미주 누나를 우리가…… 형사님, 딱 한 번만 솔직하게 얘기해 주세요. 이제 조서도 다 썼고 카메라도 껐잖아요. 그러니까 말해 주세요. 우리가 정말, 구제불능의, 파렴치한 성폭행범이 맞는 건가요? (215p) _안보윤, 〈소년 7의 고백〉 중에서 “전쟁이구먼.”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네?” “1차 세계대전 때부터 나는 여러 전장을 돌아다녔지.” 알고 있다.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연상의 간호사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던가? 아니지, 짝사랑이었나?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전쟁은…….” 그가 술잔을 비웠다. “부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법이지.” (262p) _서진, 〈진짜 거짓말〉 중에서 부친이 손을 거두었다. “그래서, 법은 말이다.” 거둔 손의 손가락을 세워 서로 비비며 부친이 말했다. “눈이 먼 것이다.” 부친이 가볍게 손을 털었다. “도리라 믿을 수도 있고, 이치라 생각할 수도 있고, 약속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그것들 다 관계없다. 그저.” 잠시 어두침침한 허공을 바라보던 부친이 내게 눈을 돌렸다. “뱉은 말이 아무렇게나 흘러 다니다 산목숨을 덮치는 것이지.” (294p) _이영훈, 〈상자〉 중에서 이사벨라는 몹시 화가 나서 다시는 패리스를, 아들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패리스와 그런 일이 있기 전부터 그녀는 이사도라를 끔직하게 싫어했다. 그녀는 이사도라가 예술을 더럽히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사벨라 앞에서 이사도라 얘기를 꺼낸 남자들은 다시는 이사벨라를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이사도라가 얼마나 천박한 집안의 출신인지도 알고 있었고, 온갖 남자와 놀아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춤을 출 때마다 허벅지를 다 드러내고, 때로는 가슴까지 보여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이사도라야말로 자신이 어렸을 적 술집에서 보았던 이 빠진 여성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런 여자가 우리 가문의 아이를 낳는다는 말이냐?” 패리스는 전화기 너머,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327p) _손보미, 〈고귀한 혈통〉 중에서 “그이가 오늘 한 행동, 잘한 일이라고 말해줘요.” 여사의 말을 들은 ‘군’이 잠시 멈칫했다. ‘군’은 한동안 여사를 바라보다 끝내 머리를 식탁에 처박고 만 ‘서’를 내려다봤다. (…) 떨리는 ‘군’의 음성이 여사의 귀에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군’은 답이 아닌 질문을 꺼냈다. “그게 지금 왜 중요하죠?” ‘군’의 질문에 대한 여사의 답은 확고했다. “잘했다고 믿는 게 중요하니까요.” (361?362p) _주원규, 〈연애의 실질(?質)〉 중에서 왜 안 죽였어? 전략촌 밖을 돌아다니는 민간인은 사살해도 무방하다는 지침을 우리는 서로에게 다시 상기시켰다. 한 번쯤 안 죽이고 싶었거든. 키스가 장총을 끌어안고 천진하게 대답했다. 얼굴에 화색이 나돌았다. 순간 키스를 뺀 나머지 모두에게 알 수 없는 시기심이 끓어올랐다. (374?375p) _황현진, 〈키스와 바나나〉 중에서 ---본문 |
|
소설가들은 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선택했을까?
역사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과 발견, 그리고 상상 문학평론가 박진은 이들이 어느 시대의 어떤 인물과 무슨 사건을 다루었는가 하는 소재의 측면 이상으로 그 장면을 지금 불러낸 이유는 무엇인지, 그것을 통해 이 사회와 우리 자신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지에 관심을 기울이자고 말한다. 하성란의 〈젤다와 나〉에는 두 명의 화자인 나와 젤다 세이어가 등장한다. 젤다와 피츠제럴드, 소설가 부부인 나와 김의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이고, 진짜 이야기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서진의 〈진짜 거짓말〉에는 키웨스트에서 헤밍웨이를 만나는 나의 이야기와 직장을 그만두고 장편소설을 쓰는 남편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며 “작가가 된다는 것과 작가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말한다. 이영훈의 〈상자〉는 조선 세조 때의 소경 점복가 홍계관의 일화를 통해 “작가의 정체성과 윤리적 책임에 대해 말하며, 말을 지어내는 소설가들은 어쩌면 모두 소경 점복가일지 모른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조영아의 〈만년필〉은 대구 지하철 참사 현장에서 여고생을 죽이고 혼자 살아남은 소설가 윤기가 자신의 경험을 소설화하는 이야기를 통해 “소설에 대한 실존적 진실에 대해” 묻는다. 이처럼 하성란, 서진, 이영훈, 조영아는 소설가로서 소설에 대한 고백을 이야기로써 완성한다. “말과 이야기에는 진실을 생산하고 영향을 미치는 힘”이 있다. 강영숙의 〈폴록〉은 과거 환경운동을 했던 K 이사를 취재하는 환경단체 인턴인 나를 통해 잭슨 폴록의 그림처럼 사회변혁의 열정이 끓어올랐던 1980년대를 지금의 시선으로 담아낸다. 고바야시 마사루의 단편소설 〈일본인 중학교〉를 다시 쓴 조두진의 〈첫사랑〉은 식민자 2세인 “재조(在朝) 일본인의 죄의식과 모순적 감정에 주목”한다. 황현진의 〈키스와 바나나〉는 전쟁고아이자 베트남전에 참전한 키스라는 군인를 통해 “베트남전의 외상적 상처”를 바라보는 것에 집중한다. 이처럼 강영숙, 조두진, 황현진은 더 중요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진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야기를 꺼내어놓는다. 박정애의 〈미인〉은 “정쟁에 희생된 비운의 주인공 허견”이 아닌 《숙종실록》에 짧은 기록이 남아 있던 그의 처 홍예형을 등장시켜 신분 차별에 대한 “남성 중심의 정치 권력”의 모순을 이야기하고, 손보미의 〈고귀한 혈통〉은 이사도라 덩컨이 아닌 패리스 싱어를 중심인물로 내세워 “고귀한 혈통이라는 해묵은 이야기의 집요함과 기만성”을 드러낸다. 윤고은의 〈다옥정 7번지〉는 과거의 박태원을 지금 여기로 불러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실제 작가가 허상”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처럼 박정애, 손보미, 윤고은은 실제 있었던 역사를 다루는 데에 있어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은 실제 역사에 덧붙여진 허구를 제거하기보다는, 더 많이 상상하는 쪽을 택한다. 강병융의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쥐’로 그리는 우화적 이야기를 통해 MB 정권 시절에 벌어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드러낸다. 주원규의 〈연애의 실질(?質)〉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직도 멈추지 않는” 거짓말에 맞서 거짓 일화를 우스꽝스럽게 이야기한다. 안보윤의 〈소년 7의 고백〉은 수원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 드러난 “경찰 공권력의 폭력성”을 포착해낸다. 이처럼 강병융, 주원규, 안보윤은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진실이 아니라 또 다른 진실을 말하려 애쓰며, 만들어진 진실 앞에서 결코 굴복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어떤 이야기들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야기가 된다 흘러갔던 과거의 역사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능숙한 솜씨로 써내려간 이 13편의 이야기는 때로는 우화와 풍자로, 때로는 냉정한 재현으로, 때로는 무한한 상상력으로 우리의 소설적 영역을 확장시킨다. 우리는 피츠제럴드와 젤다 세이어, 헤밍웨이와 박태원, 잭슨 폴록과 이사도라 덩컨 등 유명한 인물들을 만나며 황홀경에 빠지기도 하고, 내전이 한창인 베트남과 5?18 당시 대한민국, 촛불 집회와 죄 없는 이들이 조사받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오가며 분노하거나 실망하기도 한다. 열세 명의 소설가는 놀랄 만큼 진지한 시선으로 판타지를 현실로, 현실을 이야기로, 이야기를 다시 판타지로 만드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의 이야기가 담긴 《키스와 바나나》는 소설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충분한 매력으로 다가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