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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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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십이야>를 펼쳐야 하는 이유: 혼돈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웃음의 향연
우리는 왜 400년도 더 지난 영국 극작가의 작품을 지금 여기, 한국에서 읽어야 할까요?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름만 들어도 무게감이 느껴지고, 왠지 어렵고 고리타분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햄릿>이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비극에 익숙하다면, 셰익스피어의 또 다른 얼굴, 바로 유쾌하고 발랄하며 때로는 신랄한 풍자로 가득 찬 희극의 세계를 만나는 것은 매우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십이야, 혹은 마음대로 하세요(Twelfth Night, or What You Will)>는 사랑의 열병,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한 유쾌한 탐구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셰익스피어 희극의 정수라 할 만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손에 들린 이 번역본은, 그 매력을 한국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려는 진지한 노력의 결실입니다. <십이야>의 무대는 일리리아라는 가상의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이야기는 난파로 쌍둥이 오빠 세바스찬을 잃고 홀로 남겨진 비올라가 남장을 하고 오르시노 공작을 섬기면서 시작됩니다. 오르시노 공작은 올리비아 백작부인을 향한 열병 같은 사랑에 빠져 있지만, 올리비아는 죽은 오빠를 애도하며 모든 구애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남장한 비올라, 즉 세사리오는 공작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올리비아에게 보내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올리비아는 세사리오에게 첫눈에 반해버립니다. 한편, 비올라는 자신이 섬기는 오르시노 공작을 남몰래 사랑하게 되죠. 여기에 비올라의 쌍둥이 오빠 세바스찬이 극적으로 살아 돌아오면서 오해와 혼란은 극에 달합니다. 과연 이 꼬이고 꼬인 사랑의 실타래는 어떻게 풀릴까요?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오르시노 공작은 사랑에 대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첫 장면부터 이렇게 외치죠. 음악이 사랑의 양식이라면, 계속 연주하라! 더 많이, 더 많이 내게 들려다오. 과도함으로 인해 내 식욕이 병들고 마침내 죽어버릴 때까지. (1막 1장) 마치 사랑을 앓는 청년처럼 보이지만, 그의 사랑은 다분히 자기중심적이고 관념적입니다. 그는 올리비아라는 ‘대상’을 사랑한다기보다는, 사랑에 빠진 ‘자기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 듯 보입니다. 반면, 올리비아는 세사리오(비올라)를 만나자마자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집니다. 그녀의 당혹감과 열정은 이렇게 표현됩니다. 이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전염병에 걸릴 수 있지? 이 젊은이의 완벽함이 보이지 않는 은밀한 방법으로 내 눈을 통해 스며드는 것 같아. (1막 5장) 이렇듯 <십이야>는 사랑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감정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독자들은 등장인물들이 사랑 때문에 벌이는 해프닝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그들의 애틋한 감정에 공감하기도 합니다. 특히 남장을 한 채 오르시노 공작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하는 비올라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그녀는 공작의 심부름꾼 역할을 하면서도 이렇게 독백합니다. (혼잣말로) 하지만 얼마나 힘든 싸움인지! 내가 누구를 설득하든, 나는 그분의 아내가 되고 싶은데. (1막 4장) 이처럼 엇갈리는 사랑의 화살들은 독자들에게 끊임없는 흥미와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이 번역본은 각 인물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따라가며 그들의 복잡한 심리를 현대적인 언어로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어, 마치 우리 주변의 이야기처럼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십이야>의 또 다른 핵심 주제는 바로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비올라의 남장은 단순한 극적 장치를 넘어, 성별과 사회적 역할, 그리고 진정한 자아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녀가 세사리오라는 이름으로 남성 세계에 뛰어들면서, 기존의 질서와 관념들은 유쾌하게 전복됩니다.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겉모습과 실체 사이의 간극이 드러나면서 극은 더욱 풍성한 의미를 획득합니다. 올리비아가 여성인 비올라를 사랑하게 되는 설정은 당대의 엄격한 성 역할에 대한 도전으로 읽힐 수도 있으며, 사랑의 본질이 성별을 초월할 수 있음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정체성의 혼란은 비단 비올라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올리비아의 집사 말볼리오는 이 작품에서 가장 희극적이면서도 풍자의 대상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근엄하고 청교도적인 위선으로 가득 차 있으며, 스스로를 대단한 인물로 착각합니다. 마리아를 비롯한 하인들의 장난에 속아 올리비아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게 된 말볼리오는 우스꽝스러운 노란색 스타킹에 십자 가터를 하고 나타나 올리비아를 경악하게 만듭니다. 그가 조작된 편지를 읽으며 자신의 이름과 연결시키려는 장면은 자기애와 망상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M.O.A.I.가 내 삶을 지배한다.’… 아니, 먼저 보자, 보자, 보자. … ‘M’… 말볼리오. ‘M’! 내 이름이 이걸로 시작하잖아! (2막 5장) 말볼리오의 이러한 모습은 인간의 허영심과 자기기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영국 사회의 청교도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담고 있습니다. 이 번역은 말볼리오의 과장된 언행과 심리 상태를 익살스럽게 그려내어 원작의 풍자적 효과를 잘 살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과 정체성의 소동극 속에서, 셰익스피어는 어릿광대 페스테라는 독특한 인물을 통해 극의 균형을 잡고 촌철살인의 지혜를 전달합니다. 페스테는 단순한 바보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현실을 명확하게 꿰뚫어 보는 인물입니다. 그는 노래와 농담, 그리고 역설적인 발언을 통해 극중 인물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관객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예를 들어, 올리비아에게 그녀가 바보임을 증명하겠다며 던지는 말은 그의 예리함을 보여줍니다. 착하신 성모님, 왜 슬퍼하시나요? … 그럼 더욱 바보시군요, 성모님. 오빠의 영혼이 천국에 있는데 슬퍼하시다니. (1막 5장) 이처럼 페스테의 대사들은 때로는 철학적인 깊이를, 때로는 신랄한 사회 비판을 담고 있어 <십이야>를 단순한 소극(farce) 이상의 작품으로 만듭니다. 이 번역본은 페스테의 언어유희와 노래의 맛을 살리면서도, 그 안에 담긴 지혜를 명료하게 전달하여 독자들이 그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돕습니다. 셰익스피어 작품 번역의 어려움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400년 전의 언어, 당시의 사회상과 관습, 그리고 셰익스피어 특유의 시적 표현과 언어유희를 현대 한국어로 옮기는 것은 지난한 작업입니다. 이 번역본은 원문의 의미를 충실히 전달하면서도 현대 독자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둔 것으로 보입니다. 운문과 산문이 혼용된 원작의 특징을 살리면서도, 대사의 호흡과 리듬감을 고려하여 마치 실제 연극을 보는 듯한 생동감을 주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입니다. 예를 들어, 비올라가 오르시노에게 자신의 숨겨진 사랑을 에둘러 표현하는 이 아름다운 대목은 번역가의 고심과 섬세함을 느끼게 합니다. 제 아버지에게는 한 남자를 사랑한 딸이 있었어요. 제가 만약 여자였다면 공작님을 그렇게 사랑했을 거예요. … 그녀는 사랑을 말하지 않고 꽃봉오리 속의 벌레처럼 은밀히 그녀의 장밋빛 뺨을 갉아먹게 했죠. 생각 속에서 그리워하며 초록빛과 노란빛 우울함으로 기념비 위의 인내처럼 앉아 슬픔에 미소 지었어요. (2막 4장) 이러한 구절들은 원작의 시적인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한국어의 자연스러움을 잃지 않아, 독자들이 셰익스피어 언어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게 합니다. 물론, 어떤 번역도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원어의 모든 뉘앙스와 문화적 배경을 고스란히 옮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번역가가 얼마나 원작의 정신을 이해하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했는가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번역본은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훌륭한 안내자가, 이미 다른 번역본으로 읽었던 독자들에게는 새로운 발견의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십이야>는 유쾌한 혼란과 오해, 그리고 사랑의 소동 끝에 결국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단순한 웃음을 넘어선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입니다. 사랑 때문에 기뻐하고 절망하며,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고 방황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결국, 우리는 왜 이 책을 읽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재미 속에는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 번역본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차려놓은 유쾌하고도 지적인 잔치에 참여해 보시길 권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일리리아의 혼돈 속에서 길을 잃은 인물들을 따라 웃고 안타까워하다가, 문득 우리 자신의 모습,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4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셰익스피어가 우리에게 여전히 말을 걸어오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 책을 덮고 났을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십이야’ 축제의 마지막 날처럼 즐겁고도 여운 깊은 무언가가 남아있기를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