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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서문 아메리칸 노트 추신 작가 소개 작가 연보 책 속의 역사 문화 산책 작품 해설 판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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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한 위대한 작가가 던진 질문
우리는 왜 180년 전, 영국의 대문호가 미국을 여행하고 쓴 글을 읽어야 할까. 단순히 오래된 여행기 한 편을 읽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찰스 디킨스의 『아메리칸 노트』를 펼쳐야 한다. 이 책은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다. 한 시대의 가장 예리한 관찰자가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 공화국, 즉 ‘미국’이라는 거대한 실험과 마주하며 겪은 지적, 감정적 여정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디킨스는 삐딱한 시선으로 미국을 바라본 냉소주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 누구보다 뜨거운 기대를 품고 대서양을 건넜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편견이라고 하신다면, 저는 처음부터 줄곧 미국을 지지하는 쪽으로만 편향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미국 땅을 밟았을 때 품고 있던 공화국에 대한 믿음보다 더 큰 신뢰를 가지고 그 해안에 발을 디딘 방문객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구세계의 낡은 계급 질서와 부패에 신물이 난 지식인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위대한 이상을 내건 신생 공화국에서 인류의 희망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현실은 어땠을까. 『아메리칸 노트』는 바로 이 기대와 현실 사이의 거대한 낙차를 탐사하는 지적인 모험담이다. 디킨스의 눈에 비친 미국 사회의 첫인상은 생경함과 기묘함으로 가득하다. 그는 특유의 생생한 묘사력으로 미국인의 습관을 포착한다. 온 사방에서 벌어지는 ‘침 뱉기’ 문화에 대한 그의 질색하는 묘사는 희극적이면서도 날카롭다. 피츠버그에서 신시내티로 가는 증기선에 대한 묘사를 보자. “이 운하에서는 밤새도록, 그리고 매일 밤 완벽한 폭풍과 침뱉기의 광풍이 몰아쳤다. 어느 날 밤 내 코트가 다섯 신사가 일으킨 허리케인 한복판에 놓여 있었는데 (…), 다음 날 아침 나는 코트를 갑판에 펼쳐놓고 다시 입을 수 있을 정도가 되도록 깨끗한 물로 문질러 닦아야 했다.” 이런 관찰은 사소해 보이지만, 디킨스는 표피적인 현상을 통해 사회의 심층을 들여다본다. 그는 미국인들의 끝없는 질문 공세, 모든 것을 ‘영리한(smart)’ 거래로 귀결시키는 물질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경악게 한 언론의 저열함에 주목한다. 그는 당대의 미국 신문들이 선정적인 가십과 비방, 조작된 거짓말로 대중을 선동하며 공적 담론을 파괴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는 마치 오늘날 우리가 겪는 미디어 환경의 문제를 180년 전에 이미 예견한 듯하여 소름이 돋을 정도다. 하지만 디킨스의 비판이 가장 날카롭게 빛나는 지점은 단연 ‘노예제’에 대한 고발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선언한 나라에서 인간을 가축처럼 사고파는 현실. 이 거대한 위선 앞에서 그의 분노는 폭발한다. 그는 감상적인 동정에 머무르지 않는다. 대신 노예 소유주들이 자신들의 신문에 올린 ‘도망 노예 광고’를 직접 인용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는 건조하지만 그 어떤 웅변보다 강력한 고발이다. “도망쳤음, 흑인 여자 베티. 오른다리에 쇠막대기를 차고 있었음.” “도망쳤음, 흑인 여자 패니. 목에 쇠띠를 차고 있었음.” “도망쳤음, 메리라는 흑인 소녀. 눈 위에 작은 흉터가 있고, 이가 많이 빠졌으며, 뺨과 이마에 A자가 낙인으로 찍혀 있음.” 이 끔찍한 기록들을 통해 디킨스는 노예제가 단순히 ‘불행한 제도’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절대악’임을 논증한다. 그는 노예 소유주들의 위선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인간이 인간을 소유할 때 어떤 야만성이 드러나는지를 냉철하게 분석한다. 이 부분은 이 책의 심장이며, 디킨스가 왜 단순한 소설가를 넘어 위대한 휴머니스트였는지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비판으로만 가득 찬 것은 아니다. 디킨스는 자신이 감동받은 것들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특히 보스턴의 퍼킨스 맹인학교에서 시청각 장애를 모두 가진 소녀 로라 브리지먼을 만나는 장면은 깊은 감동을 준다. 한 인간의 영혼이 굳게 닫힌 감옥에서 어떻게 빛을 찾아가는지를 묘사하는 그의 필치는 따뜻하고 섬세하다. 그는 찬란한 이상이 현실의 오물 속에서 길을 잃는 모습을 보며 절망했지만, 동시에 암흑 속에서도 인간성을 꽃피우려는 숭고한 노력을 보며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이 책의 백미는 1868년, 디킨스가 두 번째 미국 방문을 마치고 남긴 추신이다. 25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는 남북전쟁을 거치며 노예제를 폐지하고 엄청난 변화를 이뤄낸 미국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전 비판이 과했거나, 적어도 이제는 수정되어야 함을 공개적으로 인정한다. “이 증언을 제가 살아있는 한, 그리고 제 후손들이 제 책에 대한 법적 권리를 갖는 한, 제가 미국에 대해 언급한 두 권의 책 모든 판본에 부록으로 재출간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 일을 단순히 사랑과 감사의 마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정의와 명예의 행위로 여기기 때문에 하고 또 하도록 할 것입니다.” 한 위대한 지성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변화한 현실을 끌어안는 이 모습은 얼마나 지적인 용기를 필요로 하는가. 이 추신 덕분에 『아메리칸 노트』는 단순한 비판서를 넘어, 한 사회와 한 지성이 함께 성장하고 화해하는 대서사시로 완성된다. 『아메리칸 노트』는 19세기 미국에 대한 보고서이지만, 그가 던지는 질문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우리가 내세우는 이상에 얼마나 충실하게 살고 있는가? 우리 사회의 화려한 외피 아래 감춰진 모순과 위선은 없는가? 언론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은 제대로 보장되고 있는가? 디킨스는 끈질기게 묻는다. 이 책은 편안한 독서 경험을 약속하지 않는다. 때로는 불편하고, 때로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고전은 우리를 편안하게 만드는 대신,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찰스 디킨스라는 위대한 작가의 눈을 빌려 세상을 바라보는 이 지적 여정에 동참해보라. 책을 덮고 나면, 우리는 19세기 미국이 아니라 21세기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며, 고전이 가진 힘이다. |